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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은 <어떤 작위의 세계>로 처음 읽었고, 책을 놓자마자 이이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작가. 그래서 2년 후에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을 사 읽었다. 이후 늘 기억은 하고 있었는데 어찌 더 찾지 않았던 이. 1996년에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등단했다면, 데뷔 때부터 나하고는 인연이 그리 가깝지 않았을 사람이다. 1996년이면 국제통화기금발 외환위기 바로 전, 나라 전체가 국제화, 세계화 광풍에 휩싸여 흥청망청하던 때지만 정작 회사원들은 쥐꼬리 만한 추가근무수당 받으며, 때로는 그것도 없이 간혹 회식 한 번으로 만족한 척하면서, 밤 열 시까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사무실에서 퇴근도 하지 못하고 빌빌거릴 때였는데, 그렇다고 구석에 짱박혀 책을 읽을 수도 없었으니 정영문이라는 앞으로 대단할 작가가 데뷔를 했는지 어땠는지 알 게 뭐람, 하던 시절.
하여간 <어떤 작위의 세계>와 《검은 이야기 사슬》을 읽었으면 운 좋게도 (아직 절판되지 않은) 정영문의 최고 유명작,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상문학상을 받았으면 그냥 유명작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하여간 찾아 읽을 수 있는 유명작은 다 읽은 셈이어서 그랬을까?
이제 이이가 혈기방장하던 스물여덟 살 때 발표한 데뷔작,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읽었다. 여태 절판상태로 있다가 출판사를 바꾸어 다시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은 책인데, 나도 참, 2024년 7월에 출간한 걸 여태 몰랐다.
작품의 화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니’. 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작가의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었으니 주인공 ‘나’는 스물여섯에서 일곱 정도의 젊은 사내로 봐도 좋겠다. 남자의 경우 스물여섯에서 일곱이면 대학을 막 졸업해 어디 취직을 했거나, 쉬고 있거나,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를 갔다 와서 2~3년차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일 터. 그러니 아직 삶에 익숙하다고 보기는 힘들 때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20대 중후반부터 우리나라 법원에서 (판사가 아니라 법정 서기 신분으로) 평생 일하다 정년퇴직 후 뇌졸중과 치매를 앓고 있고, 어머니는 당시의 어머니들이 거의 다 그랬듯이 전업주부였고, 지금(1995~96년)은 병자 남편을 수발하는 요양보호사 겸 가정주부이다. 내가 굳이 괄호를 치고 1995년~96년을 강조한 건, 책을 읽는 시각을 지금 기준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읽어도 꽤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발견하지는 못했는데 ‘나’의 전 직업은 교사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뜻한 바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게 염증이 나고 권태스러워서 학교를 때려치운 후, 그동안 번 돈으로 다세대주택 하나를 전세로 얻었든지, 어차피 오늘 내일 하는 아버지의 돈을 엄마가 뒤로 빼 주어 샀든지, 작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돈벌이를 하지 않으니 먹고사니즘은 전적으로 엄마가 보내주는 후원금에 의지한다.
후원금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 어머니들처럼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아들 사는 연립주택에 찾아와 지저분한 수준을 넘어 더러운 아들 집구석을 깔끔하게 대청소해주고, 이젠 먹지 않아 안 해오지만 전에는 온갖 반찬거리도 바리바리 싸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아주고는 했다. 당연히 여간해 갈아입지 않아 뻣뻣하게 풀먹인 듯한 팬티 등 속옷 일습도 깨끗하게 빨아 빨래걸이에 널기까지 해주었다.
자식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부모한테 원인이 있다. ‘나’는 어릴 때 학교 성적이 조금 좋았던 듯하다. 그래서 판사가 아닌 법원서기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법원서기가 아니라 판사 신분의 법원 공무원으로 평생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이면 날마다 김칫국물을 벌컥벌컥 마셨겠지. 하지만 ‘나’는 공부보다 예능쪽, 이를테면 피아노 연주 같은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이 미국의 저 유명한 문필가 커트 보니것의 경구:
“부모를 미치게 하고 싶은데 게이가 될 용기가 없다면 예술계로 진출하라!”
이 말 대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하려는 것 같아 피아노 레슨을 단칼에 중단시켰으며, 그래서 ‘나’는 이후 살면서 잘 하는 게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세상에 남은 건 그저 따분한 일과 지루한 일과, 뭐 둘 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고급스럽게 말하자면 권태뿐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비행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을까?
‘나’가 세상에 나온 기념으로 아버지가 직접 심은 등나무 줄기도 제법 튼실해진 ‘나’의 나이 열네 살 때, 아버지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등나무의 밑둥을 잘라버리고 그 위에다 휘발유를 들이부어 등나무를 기어이 말려 죽인 일이 있다. 막 극성의 사춘기를 달리고 있던 ‘나’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 사실상 부모와의 끈, 저 예전 탯줄로 이어지기 시작한 지긋지긋한 끈을 딱 잘라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여간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평론가 김경수가 쓴 해설에 의하면 잠깐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때려치운 이후에 ‘나’는 도심에 새로 조성된 시립공원의 한쪽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다. 6월의 아침.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자의 삶과 권태. 그러나 노숙인으로 대표하는 다른 무위자들과 다른 것은 언제나 엄마가 금전적으로 지원을 해 주어 크지 않은 연립주택에서 나쁘지 않은 먹을 거리로 배를 채우며, 꾀죄죄하지 않은 의복을 걸치고 산다. 다만 하는 게 없을 뿐. 이때 “하는 게 없다”는 건 다분히 독자 같은 보통의 사람이 보는 시각이요, 겨우 존재하는 사색과 권태와 우울과 절망의 대가인 ‘나’의 눈에는 참 여러가지 현상이 눈에 보인다. ‘나’ 자신부터 그렇지. 여름 아침에 무료하게 따사로운 기분과 평화를 느끼는 기분. 이게 살아있다는 것. 얼마나 순수한 은총인가 말이지. 근데 한편으로, 굳이 ‘나’한테까지 은총의 빛을 이렇게 아낌없이 쏟아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하는 마음도 든다.
사물은, ‘나’말고 보통의 인간은 찬란하다.
일요일 아침이었던 모양이지? ‘나’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두 여자 아이. 틀림없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그러나 같은 장소에서 존재한다. 가까운 곳에서 종달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는 비둘기들이 후두염 환자들이 내는 목소리 같은 방자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두렵게 한다. 비둘기는 ‘나’를 두렵게 하는 얼마 안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나’는 지나가는 사람과, 공원에 오기 전에 본 아스팔트 도로 중앙선 근처에서 메마른 피와 엉겨붙은 털뭉치로 존재하는 한 시절 살았던 포유동물에 관해 생각하고, 줄을 맞춰 뭔가를 잔뜩 지고 바쁘게 이동하는 개미떼를 관찰한다. 절반이 잘렸지만 그래도 살겠다고 흙을 향해 기어가 기어이 굴을 파고 들어가는 모습과 파인 굴의 흔적을 오래도록 관찰한다.
이 가운데 제일 지면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거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지는 아닐 것 같은, 거지는 아니겠지만 거지일 수 있을 것 같은, 원숭이를 닮은 남자. 이들의 대화랄까, 관계랄까, 하여간 약하디 약한 연대는 하지 즈음부터 시작해 겨울이 공원을 할퀼 때까지 이어진다. ‘나’는 며칠 전에 본 아스팔트의 털뭉치처럼, 거리로 달려나가 아스팔트 위로 몸을 던져 기어코 몸이 짓물러터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살지만, 자신도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안다.
틱. 방아쇠 당긴 소리. 한 번 이렇게 말했으니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렇게 죽이고 싶은 작가의 마음.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니.
어느새 밤이 되고, 집에 가는 길에 식료품점에 뭔가 먹거리를 사들고 집에 간다. 옥상. ‘나’는 한번도 하늘을 날고 싶은 소망을 갖지 않았다. 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자유의 상징이 아니었다. 날아봤자 언젠가는 날개를 접고 다시 하강해야 하는데,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하늘을 날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막강한 권태일 것이 분명하니. 그러나 날리고 싶은 건 있다.
엄마가 왔다. 이번에도 먼지가 잔뜩 낀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그동안 벗어놓기만 했지 한 번도 빨래하지 않은 천 뭉치들을 주워 세탁기에 돌린 다음에 펴 걸고, 베란다에서 유일하게 만났던 C로부터 선물받은 나팔꽃에 물을 준다.
‘나’는 엄마를 뒤에서 꽉 껴안으려 엄마한테 간다. 사랑하는 엄마. 그녀를 꽉 껴안아서, 힘껏, 비실비실한 ‘나’가 얼마나 세게 껴안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가능한대로 제일 세게 껴안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 그녀를 번쩍 들어 3층 연립주택 베란다 창문 밖으로 시멘트 포장길에 내던지고 싶은 충동.
당신들 때문이다. 당신들이 외아들 하나를 향해 저질렀던 구질구질한 사랑, 상한 음식 같은 사랑, 넝마 같은 사랑. ‘나’를 짓누르며 혐오감에 북받치게 하면서도 어쨌든 참아내게 했던 것. ‘나’의 넋을 빼놓는 질긴 음모와 견딜 수 없는 포만감을 강요하던 것들.
초인종이 울린다. 이 연립주택 3층 꼭대기 집에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나’는 문을 열고 말한다.
“누구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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