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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르터레스쿠의 소설집 《멜랑콜리아》가 2019년 작품이다. 그걸 먼저 읽고 흥미롭기는 한데 소년/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의 수사가, 그러니까 (청)소년이 쓰는 단어/문장치고 수식이 너무 과해 조금 얹혔었다. 그럼에도 이이의 주인공들이 사물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해서 작가의 이름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해 두었다. 기억하기를 잘했지.
이번에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 480번으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1989년 작품, 작가가 서른세 살 때 <꿈>이라는 제목으로 루마니아 아카데미 상을 받은 작품이 책방에 나왔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곧바로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다른 독자들 한테도 《멜랑콜리아》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여러 도서관을 통틀어 내 책상에 놓인 <노스탈지아>. 딱 한 권이다.
아, 이이가 젊은 시절에는 이랬구나.
이게 책을 읽은 첫번째 소감이다. 《멜랑콜리아》도 서로 약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단편을 모은 책이다. <노스탈지아>도 마찬가지. 다섯 편의 개별적인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이걸 퉁쳐서 한 편의 장편소설이라고 해야 하는지, 《멜랑콜리아》와 마찬가지로 소설집이라고 해야 하는지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 그냥 소설책이어서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책. <노스탈지아>도 《멜랑콜리아》처럼 한 권으로 묶어 나왔다고 한다. 원래는 1989년에 《잠》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으로 발표하여 루마니아 아카데미 상을 받았는데 잔인한 장면묘사와 아슬아슬한 성적 표현 때문에 검열 과정에서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가, 1993년에 <노스탈지아>라고 간판을 바꿔 달고 재출간했다고 작가 연보에 나온다. 그러니까 크게 필요하지 않지만 굳이 분명하기 바란다면 <노스탈지아> 역시 소설집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잠>. 그래서 다섯 작품 모두 꿈이 나온다. 희망사항을 일컫는 꿈이 아니라, 자면서 뇌활동의 결과로 뭔가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이루어진 유성sound 영상. 그래서 네 번째 작품이자 가장 긴 분량인 <REM>의 “REM”이 가리키는 것이 잠잘 때 뇌의 활동이 활발해져 눈알이 빠르게 운동하며 Rapid Eye Movement 꿈을 꾸는 단계를 뜻한다.
현대소설에서 작가와 독자가 가장 기피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꿈 이야기하는 것. 그럼에도 커르터레스쿠가 꿈꾸는 행위와 꿈 이야기를 갖고 나타났을 때는 뭔가 보여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문제는 꿈도 꿈 꾼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니, 나 같은 범부들이야 수염 허연 조상님이 나와 숫자 여섯 개를 불러주어 혹시 로또라도 맞을까 김칫국물 벌컥벌컥 들이켠 이야기나 하겠지만, 현대 루마니아 문학계의 큰 별이라 일컫는 커르터레스쿠 같은 장인이 꿈 이야기를 했다 하면 이거야말로 독자가 꿈 해몽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수준의 그 무엇이냐, 그래, 초현실주의적的이고, 보르헤스적이며, 오비디우스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대략난감이며 오리무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책 좀 읽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려 하니, 루마니아 검열당국이 지적한 아슬아슬한 성적 묘사가 깜찍하게 재미있어서는 아니고, 도무지 끝간 데 없는 장황한 묘사가 간혹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기는 하지만, 일관된 긴 어둠의 통로와 이어지는 지하의 제법 큰 공간에서 펼치는 큰 구라, 동유럽 작가들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거대한 묵시록적 이야기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동유럽, 나아가 전 유럽에 지하 땅굴로만 이어진 특별한 통로가 있어서 저 마드리드부터 모스크바, 베오그라드, 베이징까지 도무지 못 가는 장소가 없다는 이야기가 없던 건 아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 99번, 두샨 코바체비치가 쓴 <옛날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지>에 자세하게 나오니까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그러나 코바체비치의 지하 땅굴은 광범위한 지하망과 생존을 위한 땅굴이었던 반면, 커르터레스쿠는 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과거의 죽음과 밀접하니, 지난 금요일에 업로드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작품 <슬픔의 물리학>에 등장하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의 거처와 비슷하다. 흠. 코바체비치(구 유고슬라비아), 커드러레스쿠(루마니아), 고스포디노프(불가리아) 전부 동유럽 작가. 우연은 아닐 거 같다. 작가가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쓰지 못했던 옛 독재시절의 길고 괴로웠던 시간의 터널과 무관하지 않을 거 같다는 내 의견이 조금 과한 해석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독후감에서는 다섯 편의 이야기 가운데 제일 앞에 배치해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룰렛 승부사>만 소개하겠다. 분량도 제일 짧다.
룰렛. 도박장에서 스테인레스 금속 구슬이 뱅뱅 뚜르르르 굴러가다가 작은 박스에 쏙 들어가면 번호나 색깔에 돈을 건 숱한 사람들의 탄성과 비명이 터지는 룰렛. 그거 아니다. <룰렛 승부사>의 룰렛은 영화 <디어헌터>, 크리스토퍼 월켄이 베트콩의 포로수용소에서 자기 관자놀이에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 그것을 말한다.
화자는 약 60년간 글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노인. 룰렛 승부사는 그의 친구다. 실존했던 사람이라는데 당연히 허구. 하여간 그 친구 아드리안은 곤충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버리고, 지저귀는 새들을 돌로 쳐 죽이는 거친 아이였다가, 발작적 분노의 순간을 겪으며 성적 욕망이 왕성한 청소년을 거쳐, 강간과 강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성인 죄수로 악당의 3단계를 차근차근 밟은 전형적인 범죄자였다. 화자 제레누스 차이트블룸이 아드리안이 점차 악마화하는 과정을 숨가쁘게 따라가면서 그걸 글, 일종의 보고서로 쓴 것이 <룰렛 승부사>이다. 거친 아드리안은 힘 없는 찌질이 제레누스를 한 번도 때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위기에서 구해주어 특별한 관계를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소설가와 범죄자가 제대로는 어울리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해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마주치지 못했다.
제레누스가 쓴 책이 제법 많이 팔려, 팔려도 너무 많이 팔려 이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시절이 왔고, 그래서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어여 쁜 아내 자랑도 할 겸 시내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들렀더니, 그곳에서 화려한 만찬을 차려놓고 세 명의 사업가와 함께, 의자에 거의 누웠다고 해도 좋을 만큼 멋대로 앉아 있는, 잘 차려 입은 아드리안을 만나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 제레누스는 알아차렸다. 내 술고래 범죄자 친구 아드리안과 룰렛 승부사는 동시에 태어난 검은 쌍둥이라는 것을. 독자가 이 문장을 읽을 때는 모른다. 검은 쌍둥이. 쌍둥이 자리, 6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또 나온다는 걸. 이 장면부터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승부사라고만 할 예정이라는 것도.
사업가들과 승부사는 ‘나’ 제레누스의 눈이 안 보이게 검은 천으로 가리고 어느 건물의 지하로 들어간다. 길고 어둡고 지저분한 좁은 통로를 거쳐 나중에 옛 코냑 공장의 작업장이라는 것이 알려질 제법 넓은 지하에는 별다른 인테리어 없이 그저 술통 비슷한 것과 열에서 열다섯 정도의 잘 차려 입은 사람들 가운데 반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으로 갈아입은 술고래 친구가 등장하고, 이미 관중 또는 돈을 걸 신사 숙녀들한테 검증을 받은 리볼버 권총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총알 하나를 보여준 후견인이 총과 총알을 들고 앞으로 나선다. 곧바로 탄창에 총알을 넣고 한 바퀴 차르르르 돌린 후에 권총을 승부사에게 건네면, 벌써 통 위에 올라선 승부사는 극도의 공포에 질린 얼굴표정을 하고 자기 관자놀이에 총구를 댄 채 바들바들 떨다가, 눈을 꽉 감고 방아쇠를 당긴다.
“딸깍.”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피와 살점과 뇌수의 흔적이 잔뜩 묻은 회벽에 한 번 더 피와 살점과 뇌수와 뼈조각을 보태면 돈을 건 관중들이 따는 거고, 아니면 승부사와 후견인이 돈을 번다. 생존할 확률은 5/6. 그러면 아무도 여섯 번을 생존할 수 없다. 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아니다. 살 확률은 5/6. 여섯 번 내리 살 확률은 (5/6)^6. 내가 계산해드리지. 33.490%. 여섯 번 방아쇠를 당겨도 살 확률은 1/3이 넘는다. 책에서는 네 번 이상 생존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연이어 생존에 성공해 큰 돈을 번 승부사는 하도 많이 죽음과 직면해 더 이상 실제로 살 마음이 없는지, 이제 스스로 후견인을 겸하면서 마음대로 도박 룰을 정한다. 그리하여 권총 탄창에 실탄 두 발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세 발, 네 발, 다섯 발을 넣고 쏴도, 안 죽는다.
결국 여섯 발을 다 넣을 테니 돈을 걸라고 하는 승부사.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안 죽겠지? 그렇다. 만장하신 신사 숙녀를 모시고 과거 어느때보다 큰 돈을 건 부쿠레슈티의 도박사들.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 리볼버를 머리통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아이쿠, 부루레슈티에, 그만 다른 곳도 아니고 부쿠레슈티에 큰 지진이 나서 승부사가 딛고 선 통이 흔들, 총이 머리통 위를 살짝 지나가버린다.
왜 안 죽었을까? 세번째 실린 작품 <쌍둥이 자리>에서 (p.269)쌍둥이자리 사람들은 스스로 몰입하고 만족한다는데 이거하고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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