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1913년 8월 끝자락생. 남성. 수두, 홍역 등 유년기 모든 질병과 함께 전쟁도 통과함.
나는 해 뜨기 두 시간 전에 초파리로 태어남. 오늘 저녁 해가 지고 나면 죽을 것.
나는 1968년 1월 1일생. 남성. 68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기억함. 지금 사는 올해는 기억 못 함. 몇 년도인 지도 모름.
나는 언제나 태어나 있음. 빙하기의 시작과 냉전의 끝을 기억함. 죽어가는 공룡을 보는 것은 견딜 수 없이 힘든 일이었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음. 마이너스 7개월. 올리브 열매 만하고 무게는 1.5그램. 성별 모르고 꼬리가 없어지고 있음.
나는 1944년 9월 6일생. 남성. 일주일 뒤 아버지는 전방으로 떠남. 어머니 젖이 말라 와인에 적신 빵으로 나를 달래줌.
나는 기억함. 장미 덤불로, 자고새로, 은행나무로, 민달팽이로, 6월의 구름으로, 가을의 보라색 크로커스로, 체리꽃으로, 눈으로.
프롤로그를 정리하면 이렇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2011년에 자신의 두 번째 장편소설 <슬픔의 물리학>을 출간해 불가리아 국가문학상을 받고 특히 독일에서 필명을 떨치게 되는 ‘나’는 1968년 1월 1일생에 제일 가깝다. 직업이 작가이고, 책이 무지하게 팔려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 인터뷰 따위는 가뿐하게 사절하고 그저 책 읽고, 글 쓰고, 세계로 돌아다니며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돈 주고 사는 사람. 그걸 글감으로 작품을 쓰는 사람. 반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자신을 투영한 허구의 인물이다.
그럼 다른 ‘나’는 누구일까?
1913년 8월 끝자락에 딸 일곱이 있는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사실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1944년 9월에 아들을 낳고 일주일 만에 큰 전쟁터였던 헝가리 방면으로 떠난다. 1944년생 ‘나’는 자라 변호사 여성과 결혼해 1968년생 아들을 낳는데, T시에서 아파트를 배정받기 위하여 곳곳을 다니며 그리 크지 않은 지하방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이들 전부 ‘나’이다. 심지어 초파리, 민달팽이, 6월의 구름 같은 것도 모두 ‘나’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 작가가 자신,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이에 공감하여 들으면서 스스로 자신이 할아버지가 되어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공감각을 지녔다.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와의 공감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이야기의 예를 들어보자.
어린시절 ‘나’는 어린이용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게 기억에 콱 박혔다. 신화 가운데 파시파에가 아름다운 흰 소와 관계하여 낳은 황소의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 이야기가 제일 심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니까 자기가 도와 왕이 된 미노스가 다스리는 크레타 섬에 아름다운 황소가 한 마리 있어서 그걸 희생해 바치라고 요구했다. 욕심 많은 미노스가 정말 바치려고 보니 이게 아까웠다. 그래 다른 소를 희생했다. 명색이 포세이돈인데 그걸 몰라? 그래 주문을 걸어 미노스의 정숙한 아내 파시파에가 흰 소에 반하게 만들었다.
이제 신의 심술 때문에 암소와 비슷하게 발정을 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재주꾼 다이달로스에게 나무로 가짜 암소를 만들게 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 흰소가 발정한 나무 암소에 다가와 다른 암소들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교접을 하니, 파시파에는 그 일 때문에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타우로스가 사람의 몸을 하되 얼굴은 뿔이 달린 황소의 모습이라 이를 불길하게 여긴 미노스는 다시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라 해서 그 한 가운데로, 어린 미노타우로스, 여전히 엄마 파시파에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있는 아기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미노타우로스는 자라면서 괴물이 되어 1년에 아테네의 처녀 일곱 명, 총각 일곱 명을 일용할 양식으로 잡아먹는다. 훗날 아테네에 영웅이 나왔으니 테세우스. 테세우스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종 괴물을 소탕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크레타 섬에 와서 미노스의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여버린다.
이때 미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자기 동생을 살해한 뒤에 어떻게 미궁에서 빠져나오겠느냐고 하면서 테세우스에게 실의 한 끝을 계속 잡으며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일을 끝낸 테세우스는 실을 따라 밖으로 나왔고, 나라에 죄를 짓게 된 아리아드네를 옆구리에 차고 그길로 크레타를 떠나 낙소스 섬에 도착한다. 거기서 아리아드네한테 야매로 장가를 든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에 그냥 두고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섬에 홀로 남은 아리아드네, 한탄만 하고 있는데 다른 배가 도착하니 선주가 누군고 하면 바로, 바쿠스. 주신이다. 그래 그의 여인이 되어 낙소스 섬을 떠난다는 이야기.
‘나’가 이야기를 보는 관점은 어린 아이가 갇힌 상황. 버림을 받은 일. 그러면 아이는 얼마나 공포에 떨겠는가 하는 것이다. 막강한 영웅,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떠도 전혀 꿀릴 것 없으며, 어쩌면 헤라클레스의 다른 버전인 것처럼 거의 비슷한 모험을 감행하는 영웅 가운데 영웅 테세우스가 어찌하여 크레타 섬에 들어와 비록 이상한 모습의 머리를 하고 있지만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청소년의 가슴에 양날 검을 박을 수 있겠느냐, 이런 걸 따지지는 않는다. 대신 버림받은 아이의 상태에 깊게 공감한다.
1925년, 열두 살의 ‘나’. 내 안의 할아버지. 즉 실체는 할아버지이되 2011년이 되어 그 상황을 공감각을 이용해 느끼는 것은 작가인 ‘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나’에서 작은 따옴표 ‘…’는 사라질 수 있다. 나는 불가리아 돈 5레바를 들고 장터로 달려간다. 구경을 할 수 있고, 소소한 놀이기구를 탈 수도 있고, 달고 맛있는 군것질도 할 수 있다.
시장 속에 작지 않은 천막이 쳐 있고, 입구에는 어른 한 명이 큰 소리로 미노타우로스를 구경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열두 살의 어린 미노타우로스란다. 나는 어린 시절 충격적으로 읽은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 떠올라 도무지 충동을 감출 수 없다. 그래 딱 하나 있는 5레바 동전을 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무대가 있었고 무대 가장 안쪽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객석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드디어 쇼를 시작한다. 이제 객석으로 돌아앉은 소년은 집에 있는 책에서 흑백 삽화로 본 괴물과 너무 다른 모습이다. 전혀 무섭지 않다. 무섭기는커녕 슬프고, 외롭고, 우울하다. 얼굴이 크고 털이 많이 났으며 좀 이상하게 생기기는 했는데 몸은 그냥 보통의 소년이다.
집에서 버림받아 순회 서커스 또는 쇼단에 팔려 장터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여주는 대가로 음식과 허름한 옷을 얻는 소년.
1913년생 나는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새에 엄마와 일곱 누나들과 어떻게 하든 먹고 살아야 한다. 없는 살림에 수탉이 그려진 마차가 딱 하나 그나마 재산이라고 있는데 그걸 타고 제분소로 간다. 엄마와 나와 누나 세 명이 함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훗날, 꼴에 이것도 마차라고, 마차를 가지고 있었다고 부르주아 신분을 가진 반동분자 가정으로 몰리는데 그건 나중의 일이고, 하여간 제분소에 가서, 엄마와 누나들이 일을 하는 사이에 어린 나는 제분소 창고의 빈 밀가루포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 보니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두려움의 첫 발자국이었다. 울음을 터뜨리지도 못할 만큼의 두려움. 너무 시끄럽고 부산한 제분소. 하얀 거인 두 명과 흰 안개 같은 밀가루가 날려 거미줄마저 희다. 절박함은 더욱 거세게 밀려오고 그때서야 나는 엄마아아아아…, 엄마아아아아아아… 크게, 크게 외친다. 절망과 분노, 당혹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눈물이 끊이지 않는다. 눈물이 유일한 위안이다. 바는 버려졌다.
누나와 엄마는 나를 버리고 수탉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갔다. 얼마나 갔을까? 큰누나가 엄마한테 말한다. 막내가 안 탔어요. 엄마가 대답한다. 그래서?
전쟁 중에 자신이 맡아 키워야 하는 아이가 여덟 명. 이 가운데 하나 정도는 없어져도 그리 크게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세 딸은 말이 없다. 잠시. 어쨌든 마차는 멈췄다.
“내가 갔다 올 게요.”
마차에서 뛰어내려 다시 제분소로 원피스 치마를 휘날리며 달려가는 큰누나. 나, 하마터면 미노타우로스 꼴 날 뻔했다. 이게 1913년생 ‘나’.
이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유소년 시절뿐 만 아니라 청년 시절, 2차세계대전 중 헝가리에서 부상당해 여성 혼자 사는 집의 지하실에 숨어 몇 개월을 살던 시기의 정황까지 공감한다. 죽음의 침상에서 할아버지가 ‘나’에게 전해준 편지 한 장. 해독할 수 없는 헝가리어로 쓰인 편지 위에 연필로 외곽선을 따라 그린 한 아이의 작디작은 손바닥 그림. 그리고 주소.
이미 성공한 작가가 된 ‘나’는 정말로 헝가리의 주소지를 찾아가고, 늙은 여성을 만나고, 늙은 여성이 낳은 ‘나’보다 나이를 좀 덜 먹은 것처럼 보이는 건장한 사내를 만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이렇게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훗날 <타임 셸터>를 위하여 20세기, 그리고 지구 탄생의 시점부터 시간을 구분하여 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타임 셸터>의 중요한 등장인물 가우스틴과 함께.
‘나’의 공감능력에 가우스틴의 엽기적 발상을 합하면 독자는 슬픔의 양자 물리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명색이 “양자” 물리학이니, 아니, 물리학이니, 그리 만만하지 않겠지만. 양자물리학 쪽으로 일천한 독자는 정말 드문 아이디어를 발견했다는 생각과 함께 재미나게 읽고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 한 대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는 것은 안 비밀. 그래서 별점 하나 깠다는 것도 안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