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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
  • 오노레 드 발자크
  • 16,200원 (10%900)
  • 2026-03-26
  • :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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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노레 드 발자크의 1847년 작품. 말년의 “인간극” 시리즈인 만큼 독자는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하는 편이 좋다. 먼저 읽어본 자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면, 발자크의 인간극 시리즈를 상당한 정도 읽어본 연후에, 적어도 <고리오 영감>과 <잃어버린 환상>은 읽은 상태에서 첫 장을 들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말이다. 안 그러면? 수다하게 등장하는 인물들 대다수가 전작에서 맺은 선연, 악연에 고리드우스의 매듭처럼 얽혀 있어 매듭을 풀기는커녕 양쪽 줄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또는 무수한 각주를 동시에 읽느라고 그만 정처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 한 명 곱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간이 없다.

  주인공 급 등장인물을 꼽자면 인간극 중에서 단편으로 꼽는 <곱세크>, 유대인 고리대금 업자 곱세크씨의 조카딸로 이 책에서는 나중에 7백만프랑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의 상속인이 되지만 이 가운데 한 푼도 손에 쥐기도 전에 삶을 등지는 전직 어린 창부, 현직 은행가 프레데릭 드 뉘싱겐 남작의 정부인 에스테르.

  이미 <잃어버린 환상>에서도 철딱서니 없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주인공 역을 맡은 바 있는 뤼시앵 샤르동. 전편에서 파리에 공부하러 갔다가 갖은 사치와 연애 행각을 벌이다 폭삭 망해 고향 앙굴렘으로 와서 다 죽어가던 찰나 선량한 사람들 덕에 기사회생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시 파리로 와 <잃어버린 환상>에서 한 때 연애했다가 헤어진 귀족부인들하고 원수지간이면서 새로운 귀부인과 염문을 뿌리고 있다.

  아마도 진정한 주인공은 <고리오 영감>에서 인간극의 터줏대감 라스티냐크와 질긴 인연을 만든 극악무도한 악당 보트랭일 것인데, 여기서는 뤼시앵을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스페인 출신 사제이자 스페인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밀사라고 주장하는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 참칭자僭稱者로 등장한다.

  이 외에 조연급들도 서로 조밀하게 전작들과 연결되어 있어 발자크의 전작을 건너뛰고 읽자면 곤란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감안하시면 좋겠다. 특히 <잃어버린 환상>을 읽은 즉시 이 책을 시작하면 더 좋고. 마침 민음사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이 작품 바로 앞에 배치한 책이 <잃어버린 환상>이니 이어서 다섯 권 내리 독파하는 게 장땡이다.


  두 번째로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 또는 미리 감안할 것은, 이 작품이 인간극 가운데서도 소위 “풍속연구”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프랑스 고등학생들도 배우지 않을 것 같은 19세기 초의 프랑스 특히 파리의 구역과 특정 건물, 거리 같은 곳의 상세 설명에 학을 뗄 수 있다는 점. 영국에서는 몇 십 년이 지나야 등장할 헨리 제임스가 있지만 프랑스엔 19세기 초부터 발자크와 그의 후배들이 있어서 이 상세묘사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독보를 과시하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웬만한 독서력이 없으면 콱 질려버리고 말 걸? 겁주는 게 아니라 미리 각오하시란 뜻이다. 나는 이 책이 독후감을 쓴 열다섯 번째 발자크의 작품인데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이의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뒷골이 뒤숭숭하다. 이거 이러다 뇌일혈 생기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유라시아 대륙의 제일 오른쪽 끝에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도대체 파리의 19세기 초에 있었던 건물과 거리, 1820년대 말에 벌써 사라진/개축한 건물의 옛 구조를 왜 알아야 하며, 거리 이름이 뭣이 중헌디?

  그런데 여태 이야기한 두 가지 허들을 바꾸어 생각하자. 딱 이것들 두 개만 극복하면 독자는 소위 발자크 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현란한 솜씨에 넋을 잃을 권리가 생긴다. 도무지 더 이상 스토리를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절묘하게 또다른 이야기를 벌써 시작하고 있는 거다. 이 재미 때문에 읽을 때마다 골머리를 썩이면서까지 내 눈에 띄기만 하면 발자크를 읽어 버리곤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도 이를 악물고 한 번 견뎌 보시기 바란다. 읽다가, 읽다가 도저히 못 견디면 그건 당신 팔자 소관이니 내 탓하지 마시고.


  시작은 1824년. 오페라극장의 무도회. 각주에 의하면 1824년 2월 말일의 오페라 무도회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유명인이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맨 얼굴이었다고. 이 무도회에 세상물정 1도 모르는 무뇌아 수준이지만 세상천지 둘도 없는 미남 청년 뤼시앵이 유대 혈통이 가미된 절세 미녀 에스테르와 함께 등장해 사람들의 넋을 빼놓는다. 뤼시앵은 그와 지속 기간에 관계없이 연인 관계였거나 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더라도 그냥 품에 한 번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여성들의 눈길을 받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에스테르는 아주 뛰어난 아름다움의 소지자라서 오페라 극장의 모든 남성들로 하여금 혀를 쑥 빼물게 해 놓았다.

  그런데 발자크가 쓴 작품에서 빼놓지 않고 문제를 들춰내는 데 특화되어 있는 인물 라스티냐크가 에스테르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해서 에스테르의 정체를 작지 않은 목소리로 주위의 친구들에게 떠들기 시작한 거다. 뤼시앵이 데리고 온 에스테르가 여기 오신 만장하신 신사분들의 7할 정도를 상대한 경력이 있는 매춘부라는 것을. 이러니 어떻게 되겠나? 뤼시앵과 에스테르는 죽을 맛이겠지. 그런데 아무리 노류장화라지만 열일곱 살 순정을 품고 있는 에스테르가 더 독하게 상처를 받았겠지? 이때 여태 뤼시앵의 뒤를 좇던 건장한 체격의 자객 가면, 멕시코 정의의 사자 조로가 쓴 가면을 걸친 남자가 재빨리 에스테르 뒤에 근접해 속삭인다.

  “뤼시앵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조금이라도 에스테르의 기운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에스테르는 이날 파리의 2월이면 아직 한겨울인데 파리에서도 가장 흉물스러운 구역인 랑글리드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기도해버렸다. 극장에서 비지우라는 이름의 찌질이가 만인이 보고 있는데 자기를 향하여 “어이, 에스테르!”하고 외친 일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이 에스테르가 처음 시도한 자살이라 번개탄의 수가 모자랐고, 가뜩이나 외풍이 있는 방에 문도 조금 열려 있어서 죽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아까 자객 가면을 쓴 사내, 스페인 국왕의 프랑스 밀사이지만 와 있는 도중에 정권이 바뀌어 그대로 머물고 있는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가 발견해 목숨을 건져낸다.


  이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앞에서 말한 바대로 일찍이 <고리오 영감>에서 부르주아 타유페르의 아들을 결투를 빙자해 살해하고, 라스티냐크에게 타유페르의 집 나간 딸과 결혼해 상속을 받은 후 가로채려 했다가 라스티냐크가 망설여 본전도 건지지 못한 악당 ‘보트랭’ 역으로 조연 출연한 인물로, 본명이 ‘자크 콜랭’이라고 한다.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가 에스테르를 어엿비녀겨 살려준 것이 아니다. 그가 바란 것은 어떤 남자도 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에스테르의 몸. 근데 글자도 읽지 못하는 게 흠이라, 카를로스 신부는 그길로 에스테르를 수녀원에 집어넣고 1년 반 동안 글자, 숙녀로의 몸가짐, 옷 입는 법 등등에 익숙하게 교육시킨다. 비용은 전부 신부가 대고. 근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훗날 카를로스 신부는 에스테르를 프랑스 최고 중의 최고 은행가인 뉘싱겐 남작에게 넘겨 수백만 프랑을 울궈내려 하고 있다.

  전직 흉악범죄 미수자이며 현직 국왕의 비밀 사절 참칭자인 자크 콜랭은 사실상 도형수의 신분이다. 도형장에서 탈출해 세상의 음지에서 사는 어둠의 사나이.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발자크가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뤼시앵을 아마도 동성애적으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사랑을 넘어선 숭배의 단계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카를로스 신부는 에스테르를 뉘싱겐 남작에게 접근시켜 뜯어낸 돈으로 뤼시앵을 그랑뤼에 공작의 영애 클로틸드에게 장가들여 후작으로 만든 다음, 궁정 귀족이 되게 해주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다. 그 이후에 뤼시앵이 여전히 에스테르를 향한 애정이 남아 있으면 그냥 라 파보리타la favorita, 정부 또는 정부 가운데 한 명으로 삼으면 그만이고.

  그런데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간디? 밥은 다 지어가는데 그만 어쩌다 훌쩍 하는 바람에 콧물이 밥솥에 빠져버리고 만다. 만사 파투가 나버리고 이야기는 어느덧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이자, 악당 보트랭이자 탈옥한 도형수 자크 콜랭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발자크를 읽다보면 이이가 워낙 많은 작품을 쓰는 바람에 앞 뒤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눈에 띈다. 이걸 다 까탈을 잡으면 발자크 읽기 쉽지 않다. 그런 건 그냥 패스하는 게 좋다. 일일이 시비하기엔 발자크의 이야기 솜씨가 너무 끝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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