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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56년 잔나비띠 시인. 임실 덕치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6남매 가운데 셋째로 났는데, 그 험한 시절에 아이들한테 손찌검 한 번 안 하고 큰소리 한 번 안 치는 천생 지게 같은 아버지와, ‘양글이’라는 별호를 단 작은 체수와 화려한 입담이 야무졌던 어머니 덕분에, 가난 때문에 고생은 했을지라도 하여간 우애는 좋게 살았던 모양이다.
학교는 전주의 영생대학 국문과에 들어가 학교 이름이 바뀌어 전주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지 않았을까 싶다. 졸업한 후에 희망대로 학교 교사가 되지 못했으니 그저 되는대로 책도 읽고, 시도 써보고 이것저것 하면서 살았겠지. 그러다 서른살이 오고 서울로 올라갔다. 거기서 고향 아는 사람들을 따라 아파트 현장일도 하고, 잡지사에도 잠깐 다녀보고, 구로노동자문확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했다고, 세계일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말했다. 그래서 이이의 농사짓는 시 속에 간혹 노동시도 섞여 있다.
1990년, 35세 때 부산노동자문학회에 속한 간호사와 결혼해 이후 줄곧 부산에서 살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지역에서 일하기가 쉽지 않아 그저 너댓 명 두고 철물 가공업을 하는 작은 가게 소위 마찌꼬바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을 배우기 시작해 무려 30년을 넘게 그렇게 산다.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렇게 영세 철물 가공공장 노동자로 30년 넘게 지내다가 은퇴를 하루 앞둔 2016년 12월 24일에 야구장 철망 보수작업을 하다가 휴대전화를 받으니, 아이쿠, 위암이란다.
마침 전에 누이동생이 소개해 사 둔 완주 위봉산 자락에 텃밭이 달린 작고 낡은 집이 있어서 치료와 항암 과정을 마친 후 그곳에 들어가 지금껏 거기서 농사짓고 산다.
시업은 1987년에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해 2026년에 두번째 시집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을 냈다. 데뷔 후에 첫 시집을 발표하고 그 속에 마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 시집에 담았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이스라엘이 미국 대통령을 꼬드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것보다 손톱을 바투 깎아 나물 무칠 때마다 기름이니 된장이니, 청양고추 다진 것들이 닿을 때의 아리고 아린 손끝을 더 괴로워하는 거. 사는 거, 징그러운 거.
가시
산초나무 가시 하나
외약손 손가락에 박혔다
일주일간 함께 지냈다
손톱 밑 가시라더니
돋보기 쓰고도 보이지 않는
이 작은 가시 하나
받아줄 수 없어
괴로워하다니
엄살떨다니
결국 곪아터지다니 (p.10 전문)
짧으면서도 할 말 다했다. 둘째 행 “외약손”은 왼쪽 넷째 손가락이 아니라 그냥 왼손의 사투리. 작은 가시 박이면 거 참 신경 쓰이지. 돋보기를 써도 안 보일 정도로 작은데 따끔따끔하면 그걸 그냥 놔둬? 부처님이네. 나는 일단 가시 박인 부위 전체를 알코올 소독하고 손톱깎이로 따끔거리는 부위 전체를 막 후벼 파서 없애 버리는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른 모양이다. 뭐 내 성질이 좀 별나서 그러겠지.
위암 환자인 김용만이 농사도 잘 짓는다. 아무래도 어려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도 지어본 가락이 있어 도시 사람들보다 적응하기 수월했겠지. 그래도 농사는 힘든 일이다. 나 아는 농촌 출신 도시 사람은, 세계적으로 흉작이 와 식량무기화 수준이 오지 않는 한 다시는 농사 짓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힘든 일이다. 김용만이 감자 농사도 좀 했던 모양이다.
감자 캤다
묵정밭 감자 캤다
약도 안 하고
퇴비만 넣었더니
감자가 고르지 않다
그래도 첨 농사치고는 솔찬하다
앞집과 옆집, 또랑 건너 최씨 아재
산 밑 할머니, 주말에나 왔다 가는 이층집 나눠주고
대전 해숙이, 형님네, 명희네
한봉지씩 보내고 나니
잔챙이만 남았다
괜찮다 잘 짓든 못 짓든
나누는 것도 농사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언제나 앞줄에 섰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잘 살았다
큰 놈은 잔챙이가 키운다 (p.12 전문)
김용만이 6남매, 4남2녀. 해숙이와 명희가 여동생. 그리고 형님네. 형이 둘 있다. 맏이한테는 ‘큰형님’이라 올림말을 한다. 그냥 형님은 둘째, 자기 바로 윗형이다. 서울 사는 김용구. 큰형님은 시골에 살아(p.90) 굳이 농사 지은 거 보낼 필요 없다. 초등학교 선생이지만 시골 사는 건 시골 사는 거니까. 누구냐 하면 이름 좀 알린 섬진강 시인 김용택. 대전 해숙이는 바로 아래 동생. 군산 복숙이는 둘째 여동생. 그러면 명희는 남해 사는 막둥인가? 아니면 막둥이의 딸? 뭐 이집 족보를 대강 추리하면 이렇다. 시인의 아내는 아직 부산에 살아 자기도 주민등록이 부산으로 되어 있다가, 나중에 아내마저 은퇴하고 완주 산골로 올라와, 너는 만날 남의 시만 읽고 자기 시집은 한 권 내지도 못하느냐, 하면서 바가지 득득 긁는다. 그렇게 산다. 그래서 시인들아, 나 한테 시집 좀 보내지마, 울상을 하기도 하며. 늙어서 귀엽게.
두번째 시집이라도 등단 후 발표하지 않고 그냥 써 둔 시들이 많았겠지. 그래서 아직 부산 살며 아들 동해, 딸 도연이와 살 때 지은 시도 몇 편 들어 있다.
기분 좋은 밤
야내 퇴근이 늦는 밤이면
가끔 우리는 저녁을 시켜 먹는다
짜장면 하나
짬뽕 곱빼기 하나
전화해놓고
신이 난 동해는
베란다 창가에 붙어 있고
아빠 돈 있느냐고
도연이는 자꾸 묻는다
아들딸 앞에 두고
국수 가락 잘라주며
소주 두어잔 받아 마시는
기분 좋은 밤
아내가 가끔은 늦어도 좋다 (전문. P.20)
김용만은 영세 공장의 주임이고 아내는 간호사. 맞벌이하는 집이다. 시를 가만 읽어보면 평소에 이집 안주인, 여자는 돈벌이도 하면서 온갖 가사를 전담하는 모양이다. 엄마가 늦게 와서 어쩌면 아빠가 그냥 밥 짓고 차려주기 귀찮아서 짜장면 시켜 먹었을 수도 있지만, 밥은 당연히 여자가 하는 거라 엄마 기다리기 싫어 주문음식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이왕이면 첫번째 경우였으면 더 좋겠다. 이왕이면 아내도 좀 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네 식구가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 동해는 짜장면 먹고, 아빠와 도연이는 짬뽕 나누어 먹고, 엄마가 탕수육 한 접시 홀랑 다 먹었으면 더 좋았을 그림.
이렇게 살다가, 은퇴 며칠 앞두고 위암 진단. 이어서 치료. 그리고 완산으로 낙향. 홀로 낙향했다.
선글라스
혼자서도 살림 잘하고 산다며
아내가 선글라스 하나 사줬다
도수 들어간 비싼 걸로
그런데 산중에 사니
자랑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소양이랑 산책 갈 때 쓰고 간다
산길 오르며 감나무에게
산길 내려오며 참나무에게 자랑한다
그래도 사람이 아니어서
좀 시시하다 (p.68 전문)
부산 살 때 가끔 시인이 아내 대신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국이나 찌개도 끓여 밥상 좀 차렸겠지? 혼자 병 고친다고 완산 산골에 들어가 있는 남편한테 비싼 선글라스도 사 가져오는 거 보니까. 다행이다. 그래야지. 이러다가…. 아내마저 은퇴하고 이제 남편 곁으로 왔다. 설마 아주 오지는 않았겠지. 천생 도시 사람이 단번에 시골살이 할 수야 없겠지. 여전히 부산 살며 완주에는 왔다갔다 하겠지.
차마
퇴직하고 산골 내려와
아내 곤히 잠든 밤
홀로 깨어 서늘히 시집 읽는다
밤새 눈 내려 쌓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에 별들 깊다
문밖을 나서려다
눈 귀한데 살다 온
아내 위해 차마
마당에 내려서지 못했다 (p.96 전문)
부산 아줌마인 아내라서 평생 눈구경이 몇 번 없었을 거라, 잠 깨어 숫눈 가득 펼쳐진 마당을 처음 밟아보라는 늙은 남편의 마음이 곱네. 아내도 이 마음 꼭 알아주었으면 더 좋겠다.
근데 어라, 이제는 완주 완산에서 부부가 아주 사는 모양이네? 이런 시를 쓰는 거 보니까.
핑 다녀오세요, 했다
아내가 십이일간 유럽 여행을 갔다
나는 안 갔다
나는 유럽보다 봄이 오는 우리 마을, 내 작은 집이
더 좋다
긍게 안 갔다
그래서 늦은 밤 터미널에 아내 내려주고
핑 다녀오세요, 했다 (p.101 전문)
오늘은 시인의 가정사를 한 스토리로 해서 독후감을 써 보았다.
이런 장면보다 좋은 시들이 훨씬 많다. 그걸 다 읽어드리지는 못하겠고, 딱 한 수만 소개하자.
산길에서
다시 또 봄은 왔는데
어떻게 앉아만 있냐
겨우내 녹슨 호미 걸어놓고
어찌 책만 보냐
저 앞산 진달래
산벚꽃 팡팡 터지는데
환장 없이 앉아만 있냐
매급시 가슴 울렁이는데
내게 진정하라니
그게 할 소리냐 (p.61 전문)
8행의 “매급시”는 “맥 없이”의 사투리이기도 하고 시어이기도 하다. <선글라스>에서 시인과 함께 산책을 나간 ‘소양이’는 시인이 기르는 시고르자브종 강아지.
엇다 모르겠다. 딱 한 수만 더 읽어드리겠다.
고백
또랑 건너
최씨 아재네
비닐하우스 집 짓고
콘크리트 쳤다
온종일 땅 고르고
터 닦아 레미콘 받았다
수고했다며 십오만원 주길래
한동네 살며 그럴 수 없다
손사래 친 후
대문 나서기도 전 후회했다
오만원이라도 받을 것을 (p.16, 전문)
30년 넘게 철물 가공, 용접 같은 영세 공장 노동일을 했으니 손끝이 맵겠지. 비닐하우스 짓고 콘크리트 타설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겨. 그래 하루 종일 일 해주고 막걸리 잔도 좀 얻어먹었으니 같은 동네에서 같은 사투리 쓰는 사람끼리 됐다,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섭섭한 건 어떡해. 속으로 그랬겠지. 내가 염병을 한다고 손사래까지 쳤어, 그래. 뭐 사는 일이 다 그런 거여. 십오만원 준다고 그걸 덥석 받아오면 또 이게 사달이 나거든. 거기서 다시 오만원이나 십만원은 돌려주면서, 집에 돼지고기에 쐬주 한 병 사가려면 이걸루다 충분허요, 하면 좋았을 것을, 그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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