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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현. 드디어 2000년생, 21세기 출생 작가의 책을 읽는다. 아직 동국대 문창과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하더니 벌써 소설집을 냈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에는 데뷔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나는 이 책에서 <보아>를 제일 먼저 읽었다. 네 번째 순서로 실린 작품이다. 2024년 6월 웹진 <비유>에 발표했던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다음 날 아침에 데뷔작이자 표제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부터 순서대로. 일정상 퇴근 시간에 맞추느라 제일 짧은 거 하나만 더 읽고 가자, 싶어서 고른 것이지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보아>를 읽으면서, 앗, 또 한 명의 문제 작가가 나온 건가? 이렇게 생각했다. 강렬한 문장들. 첫 문단부터 그러했다. 두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 너는 이미 기체와 빛으로 존재하기를 그만 둔 뒤였지. 그러는 대신 너는 그늘과 그림자로 존재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너는 나의 눈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너를 절대로 돌아볼 수 없었어. 그래도 나는 네가 나의 뒷면에, 내 시선의 반대편에, 모든 종류의 사각지대에 늘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다.” (p.256)
보아?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스타 가수이자 탤런트 보아, 권보아? 그이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해하는 보아는, 화자를 보는 인격이다.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비슷한 것. 예컨대 내가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또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로부터 ‘보임’을 당할 때, 그 보는 행위를 하는 사람 비슷한 것. 어쩌면 또다른 나. 프레임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무한 공간 속의 나.
사실 나를 관찰하는 무엇에 관한 생각은 누구나 한 번씩 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일단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읽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위 인용문에서 화자 ‘나’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는 정말로 젖먹이가 유아로 성장했을 때를 뜻한다. 저 1950년대 장용학 식으로 말하자면 화자 ‘나’에게 이름이라는 속박이 주어져 ‘나’의 행복이 거덜난 순간과 비슷할 수 있다. 그렇게 화자 ‘나’는 유아가 되고, 소년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다. 이때 ‘나’ 앞에 다시 등장한 보아. 이때는:
“나는 내 주변의 어떤 아이들을, 어떤 어른들을, 나아가 어떤 행인들을 띄엄띄엄 건너다니는 너를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할 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지,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야 할지 늘 고민스러웠지. 보아, 네가 내게서 떠나 있던 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없다면 당장 시작해봐. 어땠을까? 나는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두려웠을까? 반대로 아주 멀쩡했을 수도 있지만, 전부 아니야. 나는 화가 났다. 늘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렇게 주이현은 자신의 격동하던 학창 시절을 화자 ‘나’와 보아를 통해 이야기한다.
다음날, 일찌감치 출근한 열람실에서 이이의 데뷔작을 읽는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역시 강렬한 문장들. 예를 들어보자.
“무심코 돌아본 곳에 묽은 액체처럼 엎질러진 자신의 흔적들이 보일 때, 멈추지 않고 한 뼘씩 앞으로, 도 아래로 흘러가는 그것의 궤적을 발견할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 밝고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곤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러나 율은 정작 그런 것들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율이 진정 알고 싶었던 것은, 율에 의해 모서리부터 젖어가고 있는 루와 주안의 입장, 생각, 감상 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는 율의 발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제대로 울려 퍼지고 있는가, 들리고 있는가, 눈치채고 있는가, 대비하고 있는가, 무엇이, 바뀌어가고 있는가, 율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 (p.80~81)
한 컷을 중첩에 중첩을 보태 묘사하며 긴 문장 속에 담는다. 긴 문장을 읽으면서 즐거울 수 있는 때는 문장 안에 리듬감이 담겨 있을 때일 경우가 많다. 그러면 문장이 길더라도 독자가 알아서 호흡을 유지하며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우스개로 자주 말하는 “소설작법”에 의하면 긴 문장은 지옥이다. 그러나 간혹 사실이 아니다.
하여간 데뷔작이자 표제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인 P시는, 아마도 작가가 직접 경험해본, 또는 우연히 살던 곳(이나 근처)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는 땅꺼짐, 싱크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껏 내가 매체에서 읽어보지 못한 정도의 대규모 싱크홀이 발생해 P시의 상당한 부분이 꺼진 땅 속에 함몰되는 광경을 담았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시선은 “설탕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에 뭉개져 죽어버”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있지 않고, 성별이 확실하지 않은 등장인물 루, 주안, 그리고 율의 이탈離脫에 있다.
연달아 읽은 이 두 작품에 국한해 말하자면, 나는 주이현에게 반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책을 더 읽었다. 그래서 좀 허탈했다.
주이현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학생이라고 면피하려는 생각이 있었을까? 제일 마지막에 실은 <백야의 문은 얼어붙지 않으며>만 이야기해보자. 데뷔 즉 등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단 책을 냈으면, 독자가 그 책을 읽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건 곧 프로페셔널, 즉 프로 작가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이현도 전업작가로 나선 걸로 아는데, 전업작가가 120쪽에 육박하는 짧지 않은 분량의 “습작”을 독자에게 읽어보라고 내놓으면 안 되지. 프로면 프로답게 전에 쓴, ‘쓴’이 아니고 ‘써본’ 습작 정도는 노트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없었을까?
길게 썼다가 지웠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또 한 독자가 주이현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고, 다른 또 한 명의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런 것도 무겁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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