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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네미롭스키 선집의 1번으로 출간한 《무도회》를 재미있게 읽고 네미롭스키를 더 읽어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다가 금세 잊은 적 있다. 이번달에 책을 읽다가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여행 중에 늘 가지고 다니지만 정작 집중해 읽지는 못하는 책이 네미롭스키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아차,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도착 며칠 만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은 이이를 그동안 잊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단박 읽기로 결정한 것이 저번에는 소설집이었으니, 이번엔 장편소설 <뜨거운 피>였다.
주인공 화자의 이름은 실베스트르. 그러나 30년 전쯤 ‘나’를 사랑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가 이탈리아의 곤돌라 뱃사공을 닮았다고 하면서 붙여준 별명이 ‘실비오’였다. 그래서 이 시골 동네의 별로 친하지 않은 주민들은 ‘나’를 실베스트르라고 원래 이름으로 부르고, ‘나’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친척은 대개 실비오라고 한다. 독후감은 실비오라는 3인칭 별명으로 쓰겠다. 나는 3인칭으로 쓰는 게 편하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편해서. 편한 건 거의 언제나 좋은 거니까.
사실 이 소설의 중요한 스토리 가운데 하나가 누가 실베스트르에게 실비오라는 별명을 지었는지, 이걸 추리하고 맞추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독후감에 입도 벙긋하지 않을 터이다. 이 책, 나는 내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어 오랜만에 별점 만점을 줄 수 있을 정도, 웬만하면 당신도 직접 ‘아리따운 아가씨’가 누구인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럼 이게 추리극일까? 읽기에 따라 그럴 수 있겠다. 혼외 연애를 둘러싼 치정극이라면 그게 제일 재미있는 추리극 아닌가? 그럼 작품 속 이야기를 소개해보자.
장소는 프랑스 중부의 고집 센 농부들이 모여 사는 농장지대. 주민들은 대개 비사교적이며 형편이 넉넉하다. 자기 땅에서 이웃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랜 관습으로 굳어져 남의 일에 자신이 끼어들지 않게 매사에 조심한다. 외부인에게 배타적이고, 커뮤니티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짓을 저질러 따돌림을 받으면 거의 암묵적 압박을 받아 헐값에 자기의 땅과 시설을 다른 주민들에게 팔아 치우고 타지로 떠날 수밖에 없게 유도한다. 농민들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땅 욕심이 많아 이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새롭게 큰 농장주가 한 명씩 생긴다. 에밀 졸라의 작품 <대지>에 나오는 푸앙 가문 사람들을 연상하면 아마 비슷할 지도.
실비오는 늙고 가난한데다가 홀아비 신세. 아니, 결혼한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숲 깊은 허름한 집에서 은둔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실비오는 젊은 시절 이 답답한 고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마자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 받아 그걸 차근차근 팔기 시작한다. 젊은 청년이 부동산을 급하게 파는데 그게 제값을 받을 수 있겠어? 그리고 이런 완고한 동네 사람들이 땅을 팔아 현금을 만들어 자기 고장을 뜨려고 하는 청년에게 제 값을 주고 그걸 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관습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터이지만, 어머니 정도는 실비오가 얼마든지 구워 삶을 수 있어서 과감하게 그렇게 했다. 실비오는 현금을 가지고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가서 사업을 벌였다. 구리, 향신료, 금 등. 취급품목은 화려했으나 용기와 배포만 있지 경험은 하나도 없는 초짜 사장은 당연히 탈탈 털려 불과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잠깐 연애를 해 실베스트르 대신 실비오라는 별호를 얻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늙어가고 있다.
그래도 실비오가 성격이 올바라 책을 시작하는 가을 저녁 무렵 그의 작은 집에 사촌 에라르 부부와 아이들이 놀러 와서 불 앞에 모여 가벼운 펀치를 마시고 있는 것으로 막이 올라간다. 프랑수아와 엘렌 사이에 맏딸 콜레트가 있고, 아래로 두 아들과 어린 딸을 두어 2남2녀의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다. 콜레트와 이웃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 부모, 프랑수아와 엘렌 부부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조금의 도덕적 실금도 가지 않은 채 결혼 20여 년이 지나도록 진실한 사랑을 유지하고 있는 모범가족이다. 오늘 모임은 콜레트의 약혼자 장 도랭을 실비오 아저씨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
실비오가 보기에 사위 후보 장이 장인자리 프랑수아와 비슷한 성격인 듯하다. 예민하고 섬세하며 거의 여성적이고 아내가 지배하기 쉬운 남편 스타일. 매사에 조심스럽고 비사교적이며 수줍음을 타기까지 하는 부류의 남자들.
이 가족모임에서 콜레트는 습관적으로 자기 부모가 결혼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달라고 조른다. 핑계김에 그걸 요약해보자.
엘렌의 아버지, 그러니까 콜레트의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 했다. 첫째 아내가 낳은 딸이 엘렌. 두번째 아내도 첫 결혼에서 얻은 딸 하나를 데려왔다. 세실 쿠드레. 세실이 엘렌의 의붓 언니. 계모는 기가 센 여자였던 반면에 세실은 어디가 좀 모자라 보인다는 평을 얻었다. 집에서 결혼시키기 위해 몇 번 맞선 자리를 마련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해서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하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훗날 갓난 여자 아이를 입양해 이름을 브리지트 드클로라고 짓고 나름대로 잘 키우다가 브리지트가 성년이 될 즈음 일찍 세상 떴다.
프랑수아의 아버지는 프랑수아를 원래 세실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래 부자가 엘렌의 집에 가보니 뚱한 성격의 세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아 그냥 돌아가려고 현관문을 열자 눈 오는 날 양 볼이 빨갛게 얼었으면서도 짓궂은 남자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는 생기 넘치고 매력적인 열세 살 소녀가 눈에 띄었다. 사랑은 종종 한 눈으로 결정된다. 프랑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 프랑수아는 곧장, 지금은 아니지만 아이가 적당한 나이 열여덟 살이 되면 꼭 결혼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일단 공부를 좀 해야할 것 같아 파리로 떠나 열심히 일했다.
당시 엘렌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늙어 병이 들었고, 계모는 엘렌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아마도 엘렌은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순 살이 넘은 부자 늙은이를 선택해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했다. 당연히 둘 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남편은 모르겠는데 아내 엘렌의 마음 속에 사랑은 한 오라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라는 의무는 다 하겠다고 다짐한 엘렌. 이이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가히 홍살문이라도 하나 세워줄 만했다. 결국 심판의 날이 왔을 때, 남편은 엘렌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정도의 유산만 물려주고, 자기가 평생 모은 거의 전부의 재산은 자기 가문의 형제, 조카들에게 유증해버렸다.
과부가 된 엘렌. 지금 프랑수아가 오면 당장 결혼할 수 있을 터인데 그는 보헤미아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어 적어도 1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젊디 젊은 남녀, 프랑수아와 엘렌. 그토록 먼 거리에서 각자 홀로 지내며 정말 멀리 떨어진 연인만 사랑하고, 생각하고, 서로를 연상하면서 몸을 달래고 있었을까? 이렌 네미롭스키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럴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사람 사는 일에 집중해, 사람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렌 네미롭스키. 가히 눈이 매섭다.
엘렌은 이 과정을 뺀 채 조만간 결혼하는 딸 콜레트에게, 그리하여 아빠가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결혼해 너와 세 동생을 낳고 편안하게 살고 있단다, 라고 언제나처럼 이야기를 마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콜레트는 장 도랭과 결혼해 도랭의 집이자 직장인 풍차 방앗간, 물랭뇌프에서 산다. 방앗간 아래로 거품이 이는 녹색의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곳. 실비오도 가끔 그곳에서 송어낚시를 하고 그랬다.
콜레트. 실비오가 엘렌의 아이들 가운데 제일 아끼는 당조카. ‘당조카’는 북한말이고 당질이 옳은 표현이라는군. 하여간 콜레트 당질은 아빠를 닮지 않아 웃는 눈과 큰 입에 불꽃의 뜨거움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엄마 아빠의 가정처럼 남편 장 도랭과 즐거운 신혼을 보내던 콜레트. 그렇게 깨를 볶는 신혼을 지내고 있을 거라 누구나 생각하던 시기. 장 도랭은 이틀 예정한 출장을 갑자기 하루만에 마치고 다음날 밤에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려 방앗간 옆을 흐르는 강변의 나무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어느 검은 그림자와 몸싸움이 벌어졌고, 애초 예민하고 섬세하여 완력이 세다고는 할 수 없는 장은, 다리 구간에서 난간이 없는 곳까지 밀려가 강에 빠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이야기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급류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이렌 네미롭스키가 숨겨왔던 모든 비밀들이 이제부터 하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해 사람이 산다는 것의 날 모습이 드러나는데, 허, 그것 참.
왜 여태 네미롭스키를 잊고 있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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