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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 공현진
  • 15,300원 (10%850)
  • 2025-06-24
  • : 2,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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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이나 86년생 작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은 어딘지 모르겠지만 김수영∙신동엽∙김종삼의 시 연구로 박사까지 마친 소설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녹>이 당선해 등단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가 이이의 첫 소설집이라서 <녹>을 소설집의 첫번째 순서로 실었다. 이것 말고는 공개한 바이오그래피가 거의 없다.


  ‘녹’이 rust를 말하는 줄 알았지만(오래 전 양귀자씨가 이 녹을 제목으로 하는 <녹>을 써서….) 결혼 이주 여성의 이름이다. ‘녹綠green.’ 화자 ‘나’는 전공을 밝히지 않은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몇 개 대학의 강사로 출강하는 워킹맘. 성이 ‘노’씨니까 ‘노 강사’라고 하겠다.

  워킹맘 노 강사가 이혼한 다음에 가장 두려웠던 시기가 방학 시즌이었단다. 방학 기간 동안엔 수입이 없어서 생활비 조달 및 가계 유지가 힘들었다.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선배 언니가 다문화가정지원센터의 강좌를 알선해주어 3개월 동안 출강했을 때 수강생이었다.

  이혼 후에 엑스가 당연히 양육비를 꼬박꼬박 보냈다. 물론 사소하지만 사람을 진짜 열 받게 만들면서. 매달 양육비를 2만원에서 5만원 적게 보내는 거다. 전화를 하면 자기 사정이 지금 워낙 좋지 않아 그랬다고, 다음에 한꺼번에 다 보내겠다고 핑계를 댄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술 한 번 안 마시면 될 것을. 담배만 끊어도. 하다못해 치킨 한 두 번만 배달 안 시켜도 충분하잖아. 노 강사가 전화통에다 대고 싫은 소리 하는 걸 녹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베이비시터를 하겠다고 졸랐다. 이주 여성의 시터 금액은 우리나라 사람의 반 정도란다. 이렇게 노 강사는 녹을 시터로 고용을 했다.

  시터 녹은 아이 돌보는 일은 만족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청소나 음식 같은 건 정말 훌륭한 수준이었다. 시터가 그런 일까지 할 필요 없다고 해도 녹은 계속 청소도 하고,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했는데, 다만 노 강사 모르게 열살 먹은 자기 아들을 집에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이게 불만이던 차, 강사의 어린 아들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눈 주위를 여섯 바늘 꿰맨 작은 사고가 생긴다. 노 강사는 열이 잔뜩 받아 뭐라 한 바탕 지랄을 했고, 이후 녹의 아들도 출입을 자진해서 금지했는데, 착하디 착한 열살배기 아들은 비 오는 날이면 엄마 비 맞을까봐 우산을 갖고 강사님 아파트 현관까지 마중을 왔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어둔 저녁 시간에, 열살배기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 죽었다.

  방학이 끝나고 노 강사가 다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세상 포기하고 싶은 마음인 녹이 스케치북에 항의 글을 써서 들고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모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다음 학기부터 강사자리마저 떨려나게 된다.

  스케치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노교수를 고발하는다

  저가 아이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노교수는 책임입니다”

  이 문구를 본 노 강사는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마음 속으로는 녹의 문구를 교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직업병이었다고.

  “노교수를 고발하는다” → “노 강사를 고발합니다.”

  “저가 아이를 잃었습니다” → “저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노교수는 책임입니다” → “노 강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는 “노 강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흠. 그렇군. 이게 직업병이군.

  그런데 같은 작품 <녹>에서 공현진 박사님은 이런 표현을 쓰신다.

  “감사해요.” 13쪽. 어딘가 좀 어색하지 않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무 문제없이 흔하게 쓰는 표현이지만 내 세대가 듣기엔 영 이상하다. 대신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 또는 “고마워요.”는 익숙하다.

  16쪽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교정 앞에 서 있는 녹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와 잎 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조사 ‘로’는 (네이버 사전 참조)움직임의 방향, 경로,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위 문장에선 나뭇가지와 잎들의 “위치”니까 “녹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가 아니라 “녹의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로 써야 맞는 거 같은데?

  시비하는 거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직업병 말이 나온 김에.

  단편소설집에서 특정 작품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좀 그래서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만 골라 이야기하다보니 쪼잔하게 이런 거 가지고 한 마디 하게 됐다.


  표제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에는 채식주의자 남자 주인공 곽주호가 등장한다. 그가 전 애인하고 찢어지게 된 사연이 인상 깊은 것까지는 아니고 뭔가 좀 생각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채식이야?

  주호는 된장찌개에서 얇게 저민 돼지고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주호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호가 평소처럼 고기를 골라 담은 접시를 여자친구 쪽으로 밀었는데 그녀는 평소와 달리 팔짱을 끼고 접시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질린다, 진짜.

  갑자기 마음이 변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녀는 식당에 주호를 두고 나가버렸다. 나도 안다고. 주호는 혼자 앉아서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p.55)


  주호의 전 여자친구는 이 씬에서 딱 한 번 출연하고 사라지는 엑스트라다. 이 귀절만 읽어보면 전 여친이 참 나쁜 여자같다. 저 소갈딱지하고는…. 그지? 이게 앞뒤 다 잘라버려서 독자를 현혹시키는 기술이다. 주호 얘가 평소에 얼마나 찌질하게 전 여친을 대했으면 여태 잘 참다가 이제 와서 저 지랄을 하고 찢어지겠느냐고. 저 위 대목만 가지고 전 여친이 심했네, 너무했네, 판단하는 건 위험하지 않아? 마치 <녹>에서 노 강사 하는 얘기만 듣고 전 남편을 욕하게 되는 것처럼? 이 책 정말 읽어보신 분은, 흠, 흠, 웃지 마시라.

  이런 게 다 소설의 힘이다. 그래서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눈에 힘을 빡, 주고 읽어야 한다.


  하나만 더 얘기해볼까? 여섯 번째 순서로 실린 <권능>.

  주인공은 화자 ‘나’. 등장인물은 교회목사의 아내인 듯한 엄마와 엄마보다 열 살 많은 이모. 이모 딸 솔.

  이모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며 동생들을 다 서울로 데려와 뒷바라지했다. 그래서 엄마는 이모를 마치 엄마 비슷하게 대우한다. 여태 말도 높힌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이모는 결혼하고 10년이 훌쩍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었다. 목사의 아내 엄마가 나를 낳으니 이모가 선물로 ‘나’ 한테 은목걸이를 사주었다. 혹시 잃어버리면 누구네 집 딸인지 알 수 있게 이름하고 (늘 바쁜 엄마는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이 많으니까) 이모 전화번호를 새긴 목걸이.

  ‘나’가 조금 나이가 들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다른 아이 엄마들이 먼저 발견했다. 은목걸이에 작디작게 부적을 새겨 놓은 것을. 거기다 이모 전화번호를 박은 건, ‘나’ 덕에 자기도 아이 하나 회임해보려고. 난리가 났겠지? 목사 집에 웬 샤머니즘?

  어쨌거나 ‘나’가 다섯 살 때 이모가 임신을 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으니 그 애가 바로 솔.

  이모는 솔을 낳고 또 무꾸리 집에 가서 사주를 봤더니 명이 짧고, 남자 때문에 그렇고, 물 조심하란다. 그리하여 이 귀한 딸을 지키기 위해 별의 별 통제를 하고 ‘나’를 솔의 경비병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지. 솔은 아이가 착해, 혹은 물러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그저 어리숙하게 자라 대학에 들어간다. 진짜 바보스러울 정도로 엄마 말에 꼼짝도 못하는 솔. 하지만 2학년이 되자 봄 엠티에 가서 한밤중에 바닷물에 단체로 뛰어들었다가 솔만 빠져 죽고 만다.

  솔이 대학 다닐 때, 살고 있는 빌라 옥상에서 대여섯 살 많은 ‘나’에게 솔이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하찮기 그지없는 고민만 죽자고 하고 있는 솔이 어처구니없어서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너는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수동적이고, 자발적인 의지가 없어 보이는 솔이가 한심했다. 나조차 이모의 간섭이 견디기 힘들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데 그 모든 간섭에 항의하지 않는 솔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고민이야?” (p.202)

  문제는, <권능> 속에서 주인공 화자 ‘나’ 역시 독자가 읽기에 솔보다 하나도 나은 거 없이 수동적이고 자발적인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 <권능>의 ‘나’만 그럴까? 아니, 아니. 우리 소설의 많고 많은 주인공들이 이런 성향을 흔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발적인 의지 없이 수동적이기만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별로 없이 그저 아프고 우울하다는 주장만 하는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거 같아 독자인 나도 슬프다. 슬퍼 죽겠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슬퍼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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