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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생인 노터봄이 일흔한 살이던 2004년에 발표한 소설.
한 평생 신나게 산 작가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안다고 92세의 노인더러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것처럼 보인다는 걸로 충분하지. 나는 사는 게 지옥이었는데 노터봄은 낙원 속에서 살았을 리가 없잖은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이가 세상 천지에 안 가본 곳이 별로 없을 만큼 신나게 돌아다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세상을 다닐 수 있나 어디? 농사 질 땅이 변변치 않아 뭐 해 먹을 게 없어서 예부터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장사해 먹고 산 네덜란드 사람이니까 몇 가지 외국어에 능통한 거야 뭐 그럴 수 있어도, 주머니가 좀 넉넉해야 비행기를 타던, 배를 타던, 기차를 타던 멀고 먼 장거리 여행을 갈 수 있는 것이고,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객지를 돌아다닐 용기도 제법 갖추어야 할 터인데 그것마저 별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나마 행운의 별이 노터봄의 정수리 위에서 반짝이긴 했던 모양이다.
이 소설도 ‘나’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3국 국경에 위치한 보덴제 호수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 프리드리히샤펜(Friedrichshafen, 책에서는 “프리드리샤펜”)에서 베를린의 뎀펠호프 공항으로 비행하는 작고 아담한 비행기 대쉬Dash 8-300 비행기에 오르며 시작한다. 이게 본문은 아니다. 프롤로그.
작은 비행기라서 조종석에 앉은 조종사를 탑승객이 볼 수 있다. 아직 비행기의 엔진도 켜지 않은 상태. 시간이 남아서 그런지 ‘나’의 옆 좌석이 비었다. 실내를 둘러봐도 빈 자리가 무척 많다. 이 노선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글쎄, 한 50대 후반 정도의 남자. 그런 것처럼 보인다. 좀 지루했는지 ‘나’는 의자 등판에 꽃아 놓은 기내지를 꺼낸다. 늘 보는 항공사 광고와 ‘나’가 탄 작은 항공사가 운행하는 베를린, 빈, 취리히에 대한 정보가 조금 실렸고, 이어서 자유기고 기사가 두 꼭지 있다.
기사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그곳 선주민에 관한 것이다. 암각화와 화려하게 채색된 돛배 사진. 다른 하나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관한 기사. 지평선을 따라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부자들의 고급 주택가가 있는 반면, 이에 못지 않는 그림 같은 초라한 판자촌, 도시 빈민가도 보인다. 물결 모양의 함석지붕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판잣집들, 거기에서 사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이에 관한 장방형 프레임. 당연히 ‘나’는 프레임 밖의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그곳을 다녀와본 적이 있으니까. ‘나’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진은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좋다. 지금껏 떠났던 모든 여행을 여차하면 데자뷔 비슷한 비현실적 느낌이 들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미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여성이 비행기 기내로 들어왔다. ‘나’는 옆좌석이 비어 있어서 당연히 이 여성이 옆에 앉았으면 좋겠지만, 희망은 늘 배신하는 속성이 있는 것이라 그이는 앞 좌석 창가에 앉는다. 카키색 바지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 아래로 살며시 흔들리는 젖가슴을 바라보는 게 짜릿하다. 그녀는 진홍빛 포장지에 스카치테이프로 포장된 책을 꺼내 읽다가 잠시 후에 그냥 의자 위에 엎어 놓는다.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그러다가 여자도 기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고 상파울루를 달리다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그림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참을 더 써야겠지만 아직도 프롤로그이니 결론만 말하자. 이 여성 승객이 가지고 타서 읽어보려 포장을 뜯은 책은 지금 내가 읽으려고 하는 세스 노터봄의 <잃어버린 낙원>이다. 그러니 화자 ‘나’ 역시 세스 노터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기는 한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엄연하게 픽션이니까.
무엇보다, 이 프롤로그에서 독자가 책을 읽으며 보게 될 장소가 다 나와 있다는 것. 첫째가 브라질 상파울루요, 두번째가 오스트레일리아 남서부의 대도시 퍼스와 황량한 호주 사막. 마지막으로 프롤로그의 화자 ‘나’가 갔던 것처럼 보이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부근의 알펜호프라고 부르는 스파.
만일 프롤로그의 화자 ‘나’가 세스 노터봄이라고 한다면, 물론 아니겠지만, 그가 본 기내지 두 곳, 상파울루와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그리고 알펜호프 이야기는 기내지에서 기사를 보고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얇은 책이지만 내용이 많다. 상파울루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젊은 여성 이야기만 해보자.
상파울루의 여름밤. 자르뎅이라는 부촌. 이곳 주민들은 밤외출을 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이 동네 집안에서 하녀, 가정부, 요리사, 정원사로 일했던 노동자들이 대중교통 차량을 타고 두 시간 동안 지친 몸을 버텨내야 도착하는 집에 가기 위하여 어둠 속 그림자로 거리를 메운다.
그러나 이날, 알마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엄마의 세컨드 카를 빌려타고 한밤중에 차고를 나섰다. 소형차는 상파울루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금지된 구역인 파라이소폴리스, ‘낙원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상파울루에서 가장 열악한 빈민가이자 언제라도 피가 튀는 범죄가 발행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지역으로 진입했다. 여름밤의 무드 때문에 충동적으로 밤 드라이브를 선택한 알마. 하늘은 알마에게 무드 대신 고난을 주기로 결심했는지, 엄마의 세컨드 카가 낙원의 도시에 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 푸르륵, 작은 신음과 함께 엔진을 멈추고 말았다. 거의 완전한 어둠. 아무도 없는 공포.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알마는 자기를 원처럼 둘러싼 검은 그림자들을 보았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림자들의 잊혀지지 않을 웃음소리. 그들 목소리에 한없이 깊숙하게 깔린 증오와 분노가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았고, 실제로 삼켜버렸다. 몇 명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마치 쓰레기라도 되는 듯 내버리고 가버린 그림자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차와 알마의 가방 속 모든 것이 없어진 것도, 몇 명인지도 모르는 그림자들이 자신을 윤간한 것도 아니라, 자기를 내버려두고 가버린 것이었다.
키가 크고 금발의 미인 알무트. 알마의 가장 친한 친구. 알무트가 경찰에 신고했고, 산부인과에도 함께 가주었다. 기골이 장대한 미인이라 브라질 남자들은 알무트만 보면 사족을 쓰지 못했다. 이걸 잘 알고 있는 알무트는 자신을 보탄의 딸, 부륀힐트라고 불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마와 알무트는 부르주아 딸들이 전공하면 가장 어울리는 과인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했다. 알무트는 윌링 드 쿠닝, 뒤비페 같은 현대미술, 알마는 라파엘, 보티첼리, 지오토 등의 르네상스 미술. 둘은 열다섯 살 시절부터 암스테르담, 드레스덴, 피렌체, 파리 같은 곳을 순례하며 실물 명화를 직접 보기도 했다. 보통 부자가 아니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이들 할아버지 둘 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독일에서 브라질로 건너와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은 인물이다. 아버지들도 자기 아버지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독일어를 배울 생각도 없었다. 아하, 그렇구나.
두 미술사 전공 아가씨들 눈에 들어온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땅이었다. 시간과 기억 이전의 시대, 세상이 편평했고 텅 비어 있었으며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땅. 그리고 사람들. 그들도 없던 곳의 드림 타임.
상파울루에서의 사건 이후 집안의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알마에게 알무트가 오스트레일리아 행 저렴한 항공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져온다. 선주민이 인간 최초로 만들었던 예술품들. 벽화와 암각화, 그리고 지금의 선주민들의 회화. 시드니를 거쳐 선주민의 낙원인 시크니스 드리밍 플레이스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두 아가씨는 여행지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물리치료사 과정 수료부터 완료한다. 그래야 식당이나 술집에서 접시닦이, 홀 서빙, 애 보기 같은 허드렛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물리치료사를 고집하는 것은 정작 물리치료 또는 마사지시술로 돈을 버는 건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알펜호프이기 때문이다. 그럼 호주에선 뭘 해 돈을 버냐고? 천사가 나타난다. 정말이다. 천사.
2백쪽에 불과한 분량. 읽기 편하겠지? 아마도 아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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