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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멜 다우드
  • 13,500원 (10%750)
  • 2017-01-20
  • :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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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첫 독후감 <후리>를 쓴 작가 카멜 다우드. 그가 쓴 첫번째 장편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이 4월의 첫 독후감이 된다.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하나? 2015년에 공쿠르상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후리>로 2024년 공쿠르상을 받았으니 10년 전부터 싹수가 보였던 셈이라고 할까?

  사람이 참 웃긴 것이, 전에는 아무리 개가실을 돌아다녀 봐도, 바로 눈 높이에 이 책이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카뮈의 <이방인>을 다른 시각으로 본 작품이겠거니, 그냥 그렇게 치부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 딱 보니까 책을 쓴 이가 카멜 다우드, 바로 <후리>의 작가였던 거다. <후리>를 재미나게 읽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그러면서 속으로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들하고 비슷한 내용이겠거니.

  근데 문제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저 까마득한 옛 일이라서. 거의 반세기 전 고등학교 다닐 때 읽고 이후에 다시 읽어본 적 없으니 제대로 연결을 하기 어려울 것. 게다가 <이방인>과 나 사이에는 시절이 끼어 있다. 백기완 선생의 일갈. 식민국인 프랑스 청년이 아무 이유 없이 식민지 국민인 알제리 청년을 쏴 죽인 이야기에 왜 열광하느냐, 어찌 감동할 수 있느냐는 민족주의적 꾸짖음이 시절의 경종처럼 두개골 공간을 난타했다. 에세이집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에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나 역시 전혀 익지 않고 피만 끓을 때라, 그간 <이방인>과 뫼르소에 경도하던 청년으로 이게 대단히 부끄러웠다는 말이지. 그땐 그랬다. 오직 리얼리즘만 거리를 휩쓸고 모더니즘 작품을 읽으려면 집구석에 박혀 읽고는, 읽었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염병할 시절.

  핑계가 길다. 긴 핑계는 변명이다. 쉽게 얘기해, <뫼르소, 살인 사건>을 똑 부러지게 읽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다는 말이다.


  첫 문장부터 죽여준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카뮈, <이방인>의 가장 유명한 우리말 번역은 아마도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나온 김화영 번역일 듯한데, 그 책의 첫 문장이 이렇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에 진짜 열광하는 독자는 이 첫 문장이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른 지 그 이야기만 해도 밥도 안 먹고 2박 3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별로 관심 없다. 근데 카멜 다우드의 첫 문장은 확실히 죽여준다. “오늘”, 한 박자 쉬고, “엄마는 살아 있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지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걸세.”

  초장부터 화끈하게 알려드린다. 이 작품은 일흔살이 넘은 알제리의 늙은 남자 하룬이 카뮈 또는 <이방인>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하룬을 찾아온 프랑스 대학생과 바에 앉아 술잔을 홀짝이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2인칭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스 대학생이 왜 하룬을 찾아왔느냐 하면, 하룬의 형이 1942년 여름에 프랑스 국적의 청년 뫼르소가 해변에서 쏴 죽인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하고 다른 점은, 뫼르소가 살인죄가 아니라, 엄마가 죽었어도 제대로 상도 치루지 않고 애인 마리와 동침을 하고, 술도 마시고,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햇볕을 너무 쫴 일사병인지 열사병인지 하여간 가볍게 어지럼증이 일어,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이 너무 심심해서, 아무 이유 없이 한 “아랍인”을 쏴 죽여 비윤리적이라는 죄목으로, 살인이 아니라 “비윤리”라는 죄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은 되지 않아 몇 년 후에 감방에서 나와 당시의 일을 소설로 썼다. 그런데 책을 읽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앞에서 살인자의 고독에 공감했다면 한껏 멋부린 언사로 위로를 보내”기에 바빴다고 주장한다. 즉 살인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무죄를 얻고 시작했으며, 세계인들조차 그의 살인이 아니라 고독에 공감을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뭐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즉 기막힌 문장이. 문장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니까? 저 어둠의 시절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백기완 선생의 문장처럼. 웃기지? 뫼르소의 문장은 살인을 지워버렸고, 백기완의 문장은 뫼르소를 지워 버렸으니. 그럼 독자는? 그저 책을 읽으며 이쪽으로 흔들, 저쪽으로 흔들, 쇠부랄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뭐 아니면 말고.


  뫼르소가 죽인 건 알제리 청년이 아니라 “아랍인”이었다. 그런 뫼르소더러 유럽인이라고 하면 듣는 프랑스 인종들은 기분 좋겠어?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이슬람의 전통인 누구의 자식인지도 말하지 못했고,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랐다. 그냥 없어졌다. 그저 아랍인 하나가 없어진 일이다.

  1942년의 일로 죽은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다.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 작품 속에서도 기껏해야 두 시간밖에 못 살고 불분명한 장례를 치루고 70년이 넘게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야 했지만, 살인자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 말고 다른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무싸와 하룬. 이 형제를 만든 아버지는 형제가 어렸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들의 이름에 부칭은 없다. 무싸빈OO. 하룬빈OO. 하이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던 무싸가 하루 아침에 죽고, 시신도 찾지 못한 어머니는 무싸를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해서 빈 관을 매장하고 알제를 떴다. 바다와 물은 꼴을 보기 싫어 내륙으로 가 프랑스 지주의 하녀로 일했다. 1962년까지. 독립전쟁에서 알제리가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하녀로 일하던 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 화자 ‘나’ 하룬은 공부를 시작했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라서 형의 흔적을 형 대신 프랑스, 적의 언어로 떠들기 위하여. 국유재산관리국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는 틈틈이 무싸가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조리. 그것을 등에 지거나 땅 속 깊숙이 품고 있는 건 무싸 형제들이지 결코 뫼르소와 그의 동조자일 수 없다는 주장. 하룬은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애도하는 것도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지기 바라는 것이라 하는데, 여기까지 읽으면 이제 다분히 반식민적 희생에 대한 소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룬의 1962년. 프랑스가 패전해 물러갈 때. 알제리의 혁명군 병사들이 임의로 프랑스인 두 명을 살해한 죄목으로 총살당한 일이 있었을 때, 하룬은 프랑스인의 집이었다가 자기 집으로 바뀐 곳에 밤중에 숨어든 프랑스인에게 권총 두 방을 쏴 죽여버린다. 그냥 그가 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자기 등 뒤에서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죽여, 죽여버려,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국에 의하여 체포당한 하룬. 그의 죄목은 당연히 살인이다. 알제리 독립투쟁 기간이었다면 살인은커녕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었으나, 독립하고 이틀 지난 후라서 살인은 그냥 살인이라는 범죄일 뿐이다. 세상은 하룬의 살인을 어떻게 판정할까? 정말 독립 전과 후의 살인은 다른 것일까?

  뫼르소의 살인과 하룬의 살인의 차이. 이것이 결론일 것 같은데, 책은 <후리>처럼 잘 읽히지 않고 쉽지도 않다. 확실한 건 민족주의적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거. 하긴 카멜 다우드가 그럴 인간이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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