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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모든 열정
  • 비타 색빌웨스트
  • 12,600원 (10%700)
  • 2023-07-17
  • :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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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에 영국 켄트의 노울 하우스 Knole House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방긋 웃으며 엄마 배 속에서 나온 부르주아 귀족 따님. 아빠는 3대 색빌 남작 라이오넬 색빌웨스트. 엄마는 외교관이었던 2대 색빌 남작이 스페인 무용수 페피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서녀 빅토리아 색빌웨스트. 그러니까 적장자와 서녀 간의 결혼에서 출생한 무남독녀 외동따님이다. 위키피디아에서 비타의 부모가 4촌 사이라 했는데 그냥 편하게 말해서 그렇다는 거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복남매 간의 근친결혼이다.

  비타가 출생한 노울 하우스가 어떤 집인고 하면, 옛적에 대주교가 살던 궁전이다. 약 4백헥타아르 규모의 공원 속 5천평 규모의 건물이다. 전 잉글랜드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한다니까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었는지 감 잡히시지?


Knole House, Kent


  근데 딱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한사상속.” 딸에게 상속을 금하는 가문의 법칙이다. 이 거대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원과 저택과 남작 작위를 3대 색빌 남작 라이오넬이 자기 외동딸 비타한테 상속하지 못했으며, 색빌웨스트 가문 종친회가 모든 고정자산과 작위를 라이오넬의 동생 찰스가 이어받으라고 결정했다. 찰스 입장에서는 그려, 고기국물 떨어지기를 평생 기다렸는데, 당연히 넙죽 받아 자셔서 4대 색빌 남작 자리에 올랐다.

  이이의 생애를 소개할까 싶었다. 그러나 워낙 화려무비해서 짧게 써도 원고지 2백장 짧은 중편소설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 안타깝게 직접 위키피디아라도 검색해보십사, 권하는 수준에서 끝낸다. 아휴, 정말 웬만한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다. 딱 하나만 소개하자면 개방결혼을 했다는 것. 즉 혼인의 배우자 말고 서로 자유롭게 이성간, 동성간 연애를 배우자가 다 알게 비밀 없이 내놓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즐겼는데, 두 명의 아들은 과연 남편의 아이일까? 그것도 좀 궁금하다. 이이의 숱한 연인 가운데 역시 개방결혼 비슷한 결혼생활을 한 버지니아 울프도 들어 있다. 울프하고는 10년간 연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작품은 94세의 헨리 라이얼프 홀랜드 제1대 슬레인 백작의 사망으로 시작한다. 거의 모든 영국인들이 불멸의 존재로 인식할 만큼 오랜 세월 영국의 유력인사로 활약한 전설적 인물. 빛나는 대학시절, 매우 젊은 나이에 정부 내각에 참여해서 가터 작위와 바스 훈장, 인도의별 훈장, 인도제국훈장에 빛나는 쾌락주의자, 인문주의자, 운동 잘하는 사람, 철학자, 학자, 매력적이고 재치있는 인물, 진정 성숙한 정신의 보유자이며, 전직 인도 총독, 전진 총리를 역임했으며, 일체의 (알려진, 또는 발각난, 혹은 비밀스러운)스캔들도 없이 평생 사랑스런 아내와 금슬 좋은 사이를 유지하여, 순서대로 허버트(며느리 메이블), 캐리(사위 롤랜드), 찰스, 윌리엄(며느리 러비니어), 케이, 이디스, 여섯 남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손주, 증손주를 든 다복한 인간. 다복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 가운데 왕만 빼고 안 해본 것이 하나도 없는 행운아. 진실한 귀족. 평생 검약해 그러나 가진 재산이라고는 런던의 저택과 약간의 현금과 은행 금고 안의 얼마 되지 않는 보석, 당시 귀족들이라면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정도의 가공되지 않은 원석 수준의 보석이 전부였다.

  열여덟 살에 결혼해 여든여덟 살에 과부가 된 슬레인 백작부인이자 전 총독부인인 데러바 홀랜드는 남편과 전혀 달리 태생적으로 냉소와 거리가 멀었으나 백작과 70년을 살며 냉소의 얇은 막을 쓰는 법을 조금 배웠다. 여섯 자식이 보기에 부인은 자기 의견이라고는 없이 그저 남편이 이끄는대로 순종하며 남편의 지위, 세력에 따라 자신한테도 바쳐지는 자리에 지극히 어울리는 관례를 훌륭히 수행한 인물이다. 남편이 이제 죽었으니 부인이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만 자기 생활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실행까지 할 수 있을까, 이게 여섯 자식들의 공통된 의문이다. 68세의 장남 허버트, 66세 참견쟁이 딸 캐리, 65세 불만쟁이 전직 육군 장군 찰스, 64세 최강의 인색꾼 윌리엄은 혼자 남은 어머니의 앞날이라는 문제에 무겁게 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립적인 의지가 없는 어머니. 어떻게 할꼬?

  저택은 세금 문제 때문에 틀림없이 처분해야 할 터. 작은 집에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세상 사람들 보는 눈이 있어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이들은 자식들이 순서대로 한 3개월 정도씩 모시는 걸로 하고, 모시지 않는 형제자매들은 월 2파운드 35실링을 추렴하자고 뜻을 모았다. 다섯째, 독신이자 천체天體,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전문가인 케이는 전혀 모실 마음이 없고, 역시 독신인 60세 이디스는 이제서야 자신 소유의 작은 아파트에서 하녀 한 명을 두고 벽난로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 이디스의 눈에는 여기 모인 친남매들이 시커멓고 늙은 까마귀처럼 보인다. 죽음이 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쿠, 독후감이 늘어진다. 빨리 가자.


  하여간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에 남편 그리고 아버지인 헨리 홀랜드, 슬레인 백작을 묻고 저택으로 돌아온 가족들. 부인은 두 살 아래의 프랑스인 하녀 저누를 시켜 은행 금고에서 찾아온 보석을 가지고 오라 해놓고, 그걸 몽땅 2대 백작부인이 될 맏며느리 메이블에게 준다. 이걸 바라보는 맏딸 캐리하고 특별히 욕심이 많은 둘째 며느리 러비니어의 속이 어땠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부인은 얄짤없이 전부 다 맏며느리한테만 준다. 그게 가문의 전통이란다.

  이어서 2대 슬레인 백작이자 맏아들인 허버트가 앞으로 어렇게저렇게 어머니를 모시겠습니다, 하고 설명하니까, 세상에 자기 주관대로 일을 만들거나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부인이 뭐라 하느냐면:

  “오, 잠깐만. 너무 앞서 나가는구나. 허버트, 내가 동의한 건 아니야. 난 혼자 살 생각이다. 햄프스테드에서. 봐 둔 집이 있단다. 30년 전에.”

  자녀들이 걱정하는 건 사람들의 시선. 평판 같은 거. 그걸 걱정하는 게 웃긴 막내 이디스. 뭐 그렇다.


  이리하여 백작부인은 하녀 저누만 데리고 무척 먼 거리는 아니지만 런던에서 당시 교통수준으로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쉽지 않은 햄프스테드의 호젓한 작은 집으로 옮겨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평생 처음 여유로운 시간을 살게 된다. 그러면서 집주인 벅트라우트씨, 건축사 고셰런씨, 그리고 예술품 수집가 피츠조지씨, 이렇게 세 명의 늙은 남자들과 유쾌한 일상을 즐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1부와 3부.

  2부에서는 슬레인 백작부인이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화가가 되지 못한 이야기. 다분히 버니지아 울프의 저작 <자기만의 방>과 흡사한 주장을 펼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나타난 헨리 홀랜드가, 자신이 헨리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가 선택해 결혼을 하게 된 것 같고, 여섯 아이들도 낳고, 사실 ‘키웠다’라고 주장하기엔 좀 그렇긴 하지만, 하여간 지켜봤고, 남편을 따라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며 총독부인의 지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와중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상한 헨리도 아내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신혼 시절에 말한 바 있고, 정말 그랬다.

  이런 생각을 “감정이 지글지글 끓으며 주조 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절, 복잡하고 모순된 욕망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한 그런 (젊은)시절”이 아니라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단색의 풍경뿐이라 다 똑 같은 모양에 색채도 바래 흐려지고, 말 대신 동작만 남았을 뿐”(p.101)인 노년에 다시 생각해본들 뭣하리오.

  오히려 여든여덟, 그 나이를 먹도록 자신이 평생 남다른 은덕을 입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슬레인 백작부인이 거 참. 처음에는 헨리가 나타나 데버러 리, 이 촌 젠트리의 딸을 총독 부인으로, 정치 명망가의 부인으로 만들어주었으며, 노년에는 피츠조지가 등장해 금은보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물론 백작부인이 이런 걸 다 바라지는 않았다고 항변하건만, 유독 슬레인 백작부인에게만 이런 행운의 행성이 공전하는가 말이지.

  70년을 함께 산 절친한 하녀 저누의 삶도 부인은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난한 부모의 열두번째 아이로 태어나 헐벗은 농장에서 헛간에 짚을 깔고 자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일을 제대로 못하면 매를 맞고, 자라면서 형제자매를 만날 수도 없었던 아이. 열여섯 살이 되자 갑자기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 한 마디도 하지 못하면서 한 집안의 딸이 시집갈 때 몸종으로 따라가 평생을 모셔야 했던 여성.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슬레인 백작부인은 오직 자기 자신의 불만, 화가가 되지 못한 것만 한탄할 뿐, 자기 바로 옆에 있는 많고, 많고 엄청나게 많은 무산자들의 삶은 쳐다보지도 못한 생을 살았다. 부인이 어떻게 알아? 저누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예술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지? 런던 뒷골목에서 주머니칼을 쥐고 술 취한 자의 주머니를 터는 악동들 속에 마티스와 샤갈을 능가하는 예술혼을 가졌지만 자기들은 그런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있는지?

  비타 색빌웨스트가 노년을 바라보는 착 가라앉은 시각은 참 그럴 듯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자기만의 방? 그런 건 생각도 못해보는 당대의 다수, 21세기인 지금도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을 바라보는(심지어 내려다봐도 좋다!) 시각이 없는 건, 태생이 귀족 부르주아라서 그랬을 것이다. 슬레인 백작부인이 데버라 리였던 시절에,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뭐든지 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면, 그래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겠지. 있었겠지. 쉽지는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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