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우리나라에서는 동학농민전쟁에 이어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근대사가 한 번 크게 휘청거린 해에 태어난 미하일 조센코는, 한 마디로 해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작가이다. 날 때는 귀족 자제로 나와 혁명의 와중에도 혁명과 이후 내전을 지지한 풍운아. 소부르주아로 살며 동네 사람이나 대중목욕탕 단골 손님 같은 주변인한테 들은 이야기 중에서 좀 우습기는 한데 뭔가 당시 사회의 걸림돌 같은 걸 발견하면 그걸 아주 짧은 소설로 써서, 혁명 조국이 개선해야 할 점, 현 시대 사람들의 개혁해야 할 의식 같은 걸 많이 썼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주로 1920년대에 앞에서 말한 짧은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풍자와 해학을 조센코가 툭 튀어나와 쓰기 시작한 건 아닐 터이고, 누굴 닮았을까? 조금 고골하고 비슷한 것도 같고, 많이는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쓴 레스코프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내가 레스코프를 훔쳤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레스코프가 자리를 잡은 러시아식 손바닥 풍자소설 위에서 조센코가 즐겁게 폭스 트롯을 추었다는 것이지.
조센코의 폭스 트롯을 당시 권력을 확실하게 잡은 스탈린의 문학적 최측근인 고리키가 귀엽게 읽었다. 아, 이건 무지하게 중요한 이야기이다. 1920년대라고 해도 두 걸음만 더 걸으면 30년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곧 시작되는 시기. 어쨌거나 조센코는 고리키의 비호 아래 1937~38년의 대숙청 기간에도 무탈하게 작품, 희곡과 큰 산문을 썼으며, 공포의 시대에서도 낙관적인 풍자를 거침없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 이후 말년은 진짜 허기진 삶을 살다가 갔다. 그건 나중 일이니 여기서 언급은 하지 않을 것.
소설집 《남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아내: 이하 “남편의 죽음”》은 본문이 겨우 193쪽에서 끝나고 나머지는 역자 해설 비슷한 “조센코의 문학 세계”와 “1920~40년대 러시아의 모습”이란 제목의 사진 화보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큰 활자에 대단히 넓은 자간, 행간, 작품 사이의 공백을 두었으면서도 무려 26 작품을 실었다. 짧아도 너무 짧은 소설들.
1부는 정말로 조센코가 이웃과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 당시 소비에트 사람들의 생활상과 효율적이지 못한 공무원 편의주의 같은 것의 희극적 풍자로 되어 있고, 2부는 “렐랴와 민카”라를 부제로 아마도 렐랴는 민카, 즉 미하일 조센코의 누나로 보이는데, 이 남매의 어린 시절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소설로 썼다. 적은 분량에 또 이렇게 2부로 나누었으니 책 한 권 읽는데 얼마나 페이지가 활랑활랑 넘어가는지 탁, 아시겠지? 하여간 그렇다.
소설집 《남편의 죽음》의 제목을 하필이면 왜 이걸로 골랐을까? 무려 열페이지에 달하는 제일 긴 작품이라서였을까? 뭐 그럴지도. 레닌그라드의 페트로그라드 지역에서 사는 이반 이바노비치 부틸킨이라는 남자가 주인공 남편. 러시아에서 가장 평범한 남자의 이름을 아시나? 이반 이바노비치 이반스키. 이 주인공하고 성만 다르니 부틸킨도 그저 주변에 널린 흔한 부부의 흔한 남편으로 여기면 된다. 직업은 그림쟁이. 화가까지는 안 되고 그저 포스터, 광고판, 극장 간판 같은 걸 그리는데, 몸이 좀 부실해서 그렇지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조센코는 초를 친다. 부실한 몸이 요즘들어 더 부실해져 이제 이반 생각에 오늘 아니면 내일은 죽을 거 같다. 하여 아내 마트료나 바셀리브나, 목청만 크고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는 이 왈가닥 마트료나가 서둘러 의사를 불러와 맥을 잡게 하니, 장티푸스 아니면 폐렴이란다.
마트료나는 앓는 남편도 잡도리한다. 무엇이 두려운가 하면, 남편의 죽음? 그의 남성성은 지금도 있으나 마나, 차라리 자신의 남성성이 남편보다 훨씬 우월하니 하나도 아쉬운 거 없고, 오직 하나의 근심이 있을 뿐. 첫째로 혹시라도 남편이 죽거나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둘째는 설령 이혼을 해서 다른 놈을 만나더라도 그놈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부려먹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남편은 마트료나한테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 이상이 아니다.
근데 사실 많은 가정이 그렇지 않아? 늙어가면서 그러면서도 점점 남편 잡도리를 더 심하게 하는 것도? 마트료나 여사는 이의 전범을 이루어 죽어가는 남편을 들들 볶고, 지글지글 조리고, 엎고 뒤집으면서 구워 버린다. 나가서 극장 간판을 그려 돈을 벌어 오든, 죽음의 침상에 자빠져 있는 남편이건 그건 다음 문제. 밤에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하고, 낮에는 진이 빠져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누워 진땀을 흘리며 꿈을 꾸는 남편한테 마트료나는 야물딱지게 바가지를 긁어댄다.
“어머, 이 사람 좀 봐! 왜 누워 있어? 꾀병 부리는 거 아냐? 일부러 아픈 척하는 거 아니냐고? 일이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돈 벌 마음이 없어진 거냐고?”
그저 돈, 돈, 돈, 돈…. 그래 뭐 이제 남편의 사용용도는 돈벌이밖에 없으니까. 그게 남편의 팔잔 걸 뭐.
“왜, 이제 곧 죽을 거 같냐?”
남편이 대답한다.
“미안해, 나 이제 죽어. 더 이상 나를 잡지 마. 난 이제 당신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나는 당신 같은 사기꾼을 믿지 않아. 죽을지 안 죽을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내게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도 마!”
마트료나는 남편이 곱게 죽을 수 있게 해줄 추호의 마음이 없다.
“당신이 그렇게 부자야?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으냐고? 당신 같은 인간을 죽을 자격도 없어. 시체 씻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시체 넣을 관은 무슨 돈으로 사고, 관을 옮길 때 필요한 마차는 무슨 돈으로 빌려? 그리고 신부한테도 돈을 줘야 하는데 설마 지금 나더러 옷이라도 팔아 돈을 주라는 거야? 싫어. 절대 그렇게 못해. 너도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죽더라도 돈을 벌어놓고 죽어야지!”
이웃 할머니가 염은 돈 안 받고 해주겠다고 해도 눈알을 부라리며 관과 마차, 신부한테 줄 돈 같은 걸 열거하며 죽어가는 남편한테 드드드드득 바가지를 긁어대고 있는 마트료나. 여기다가 남편 죽은 다음에 새로 결혼하려면 두 달 정도 걸리니 적어도 두 달 먹고 살 수 있는 돈까지 벌어오고 죽으라는 거다. 여지없이 레스코프 작품 속 주인공 여자들하고 비슷하다.
그래서 남편 이반이 드러워서 죽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돈 벌러 나간다는 이야기.
이런 것들을 스물여섯 편 실은 책. 읽다가 피식, 웃음도 나고 재미도 나름대로 있고 그렇다. 그렇기는 한데 이미 한참 지난 1920년대 말의 소비에트, 주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시내에서 생긴 웃긴 촌편들이라서 실감은 별로 나지 않는다. 번역한 이가 예브게니 빠나미료프. 러시아 사람으로 2002년에 한국외대 한국어학 과정을 수료한 후에 우리나라 여성과 결혼해 15년 살았단다.
러시아 사람이라서 조센코의 풍자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더 실감을 해 번역까지 했겠지만, 거꾸로, 그러니까 우리 소설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것보다, 러시아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아마도 23배 정도 더 힘드는 거 아닌가 싶다. 빠나미료프가 진심으로 번역을 했음에도 약간 어색한 곳이 있는데, 이럴 경우(모국어→한국어) 출판사 편집부에서 더 공을 들여 교정, 교열에 힘써야 했을 터. 그랬겠지. 그럼에도 간혹 아쉬운 점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 뭐 어쩌겠어. 조센코의 작품을 쉽게 읽지 못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이 얼마나 안타까우면 러시아 사람이 직접 번역을 해 소개하겠느냐고. 책이 많이 팔린 것 같지는 않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