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쉐의 중편소설. 그동안 찬쉐의 단행본은 다섯 권을 읽었는데 이 가운데 <황니가>가 가장 읽기 어려웠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독자마저 우울하게 만든 <황니가>는 참 다양하게 독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순간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아마도 대부분 오해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여간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끝까지 읽기도 어려웠던 찬쉐의 데뷔작. 크. 데뷔작이 이랬다. <황니가>에 비하면 뒤에 출간할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시쳇말로 이도 나지 않은 수준일 정도로.
<오래된 뜬구름>이 <황니가>와 더불어 찬쉐의 초기 작품군으로 분류한단다. 이걸 알았으면 읽었을까? 그래도 읽기는 했겠지. 중편소설. 2백쪽도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순간도 지나가리니. 책을 읽으며 주문을 몇 번이나 외웠는지, 거 참.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자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更善无). 그가 꿈을 꾼다.
우리말 재미있다. 꿈은 꾸고, 잠은 자고, 봄은 보고, 먹음은 먹고, 그림은 그린다. 그냥 이런 생각이 불쑥 들어서 한 마디. 책하고 관계없는.
겅산우의 꿈속 닥나무의 새하얀 꽃. 근데 그게, 꽃이 말씀이지, “향기 속에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였다. 그리하여 작품의 시작이: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몹시 무거워졌다. 잠시 후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송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된다. 그저 나 같은 범부라면 새하얀 꽃은 보기도 좋고, 향기에도 취할 만해야 할 터인데, <오래된 뜬구름>의 새하얀 닥나무 꽃은 처음부터 밤새 빗물을 맞아 투둑, 마치 목이 잘리듯 떨어져 내리고 만다. 그러면 선운사 동백처럼 떨어진 모습이 처연하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겅선우의 닥나무 꽃은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여” 있고 이런 아침 광경을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는 여자들의 하나같이 가늘고 긴 “목이 커다란 독버섯 군락” 같다.
겅산우의 마누라 무란慕蘭도 이리저리 감추고 몸을 숨기며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주 비밀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닥나무 새하얀 꽃을 따 빻아 넣어 끓인 기괴한 국을 머시고는 밤중에 한 번 또 한 번 쉬지 않고 냄새가 고약한 방귀를 뀌어댄다. 이렇게 쉼 없이 비가 내리고 악취가 풍기는 풍경. 앞서 말한 <황니가>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다. 이 순간 독자는 끙, 신음소리를 낸다. 아이고, 또 시작이군, 하면서.
아침. 밤비를 맞아 꽃잎이 땅바닥 가득 떨어져 있다. 그러면 앞에 묘사한 것처럼 하수도 물을 연상하게 만드는 혼탁한 냄새가 나니까, 좀 시들시들해야 할 터이건만, 떨어진 닥나무 꽃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송이가 전부 똑바로” 서 있다. 어떻게 연상해야 할까? 꽃받침을 땅에 묻거나 꽃받침이 땅을 디디고 꽃잎과 꽃술이 하늘을 향한 도발적인 모습을 상상하면 될까? 근데 그게 혼탁한 냄새하고는 그리 가깝지 않을 거 같거든. 하여간 처음부터 쉽지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겅산우의 옆집에 사는 여자 쉬루화虛汝華. 이름 좋다. 근데 이름만 좋은 거고, 찬쉐의 초기작품 주인공답게 참 기구한 여자. 엄마가 하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죽 위를 덮은 때와 기름이 모근과 엉겨 있을 정도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러 도무지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니까 특별하게 날을 잡아 머리를 감았는데 이게 쉽게 감기나 어디. 물을 부으니까 땟덩이가 모근에 엉겨 그냥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다. 남편한테 머리에 물을 부어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바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러자 엄마가 벌떡 일어나 아빠한테 더러운 욕을 쏟아내더니 머리카락이 다 빠져 빨간 대머리가 된 채 차가운 물을 아빠 정수리에 쏟아 부어, 아빠는 열을 펄펄 내며 일주일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동안에 아빠도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으니 열이 하도 올라 염라대왕전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너무 무서워진 아빠는 그 길로 집을 나가 담배 파는 아줌마한테 몸을 의탁해버렸다.
시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라오쾅老況은 세상에 이런 게으름뱅이가 없을 만한 무능력자에 천생 마마보이. 라오쾅은 떨어진 낙나무 꽃냄새에 짜증을 내면서도 불면증을 다스리기 위해 누에콩 볶은 걸 열심히 오도독 씹어먹고 있다. 하여간 누에콩이 수면제 역할을 한다고 하니 그냥 민간요법이라 치자. 근데 그가 갑자기 선언한다.
“엄마 말이 완전히 다 맞아. 우리에겐 독립적인 생활을 할 능력이 너무 부족하잖아.”
그러더니 그 길로 좁은 집에다 아직 수태해보지 않은 아내 쉬루화 혼자 남겨두고 엄마 집에 들어가 산다. 그래도 아직 이혼하지 않아 호적상 분명히 아내라서 굶지 말라고 누에콩 한 자루씩 보내주면서.
근데 라오쾅이 엄마한테 털어놓은 실제적인 가출의 이유는 쉬루화가 원래, 그러니까 본 모습이 쥐였기 때문이다. 책 표지에 쥐가 등장하는 게 바로 이 이유.
아내가 갑자기 쥐가 되고, 즉 쥐로 변신한다고 굳이 카프카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찬쉐하면 꼭 들먹이는 작가가 카프카이고 보르헤스인 거. 난 좀 불만이다. 그보다는, 특히 <황니가>와 이 <오래된 뜬구름>의 경우엔 프랑스에서 꽃 핀 부조리 문학 같지 않나? 쥐로 변신했다고 꼭 카프카를 들먹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뭐 그건 감상자 마음이기는 하다.
하여간 작품은 이렇게 시작해서,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의 바로 옆집에 진짜 주인공 쉬루화가 사니까 언제 한 번은 불이 화르륵 붙어야겠지? 그렇다. 한 번 불이 붙는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같은 꿈을 꾸는 걸로 시작해서. 그리고 쉬루화의 불꽃은 사라지면서, 겅산우는 여전히 옆집에 마누라 무관 몰래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작품은 쉬루화의 가족 간, 남편 라오쾅과 시어머니로 옮겨간다.
낡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대머리 엄마는 참새를 귀신같이 잡아 잠깐 돌보다가 담벽에 못으로 박아 놓는데 꼭 눈에다 못을 친다. 아빠는 여전히 딸과 유대하며 살기는 하지만 근손실로 인해 허벅지가 빗자루 손잡이처럼 가늘어졌다.
온갖 은유와 부조리한 묘사와 초현실적 그림을 보는 듯한 헷갈림. 찬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작품을 썼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간 읽기는 읽었다. 읽은 건가, 아니면 읽어 낸 건가? 읽어 치웠다고? 좋아, 좋아. 아무려면 어떠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