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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 (무선)
  • 조반니 베르가
  • 12,600원 (10%700)
  • 2013-12-26
  •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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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베르가. 누군지 몰랐다. 이 책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2번을 달고 출간되었을 때, 이걸 사 읽을까 말까 잠깐 생각하다가 그만 뒀는데, 왜 그랬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표지 보니까 그림이 좋아 당시 살까 말까 했던 게 생각났다. 책을 빌려 앞날개를 좀 읽어보니 1840년생. 아휴. 오래 전 사람이네. 에밀 졸라, 표트르 차이콥스키, 클로드 모네와 동갑이다. 이외에도 오귀스트 로댕과 알퐁스 도데도 40년생이란다. 그렇군.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귀족의 후예이며 소부르주아. 스페인 동북부 아라곤의 베르가스 또는 바르가스 가문이 13세기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 시절에 이주해 왔다니까 무려 6백년이 넘게 시칠리아 귀족으로 살았다. 그럼 이주민이긴 해도 토박이인 거 맞지? 조반니 베르가는 폰타나비앙카의 남작이라는 칭호를 쓸 권리가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비밀조직 카르보나리의 일원이어서 그랬는지 자신의 성향이 좀 왼편이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이 보다 한 세대 후배이며 <표범: 민음사세계문학 456번>을 출간한 작가 주제페 토마시가 11대 람페두사 공작, 12대 팔마 공작을 칭한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마음에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당연히 전혀 몰랐던 건데, 익숙한 등장인물이 나오는 거였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로 주로 포도주를 운반하는 마부 알피오. 심지가 굳고 성실한 청년이다. 포도주가 가는 곳은 밀수꾼이나 포도주 생산업자로부터 (결혼하지 않은 신분이라는 의미로) 처녀가 운영하는 술집까지. 술집을 운영하면서 미장가(장가들지 않은) 청년과 홀아비, 간혹 유부남의 애간장을 녹이는 처녀 술집 주인 이름이 산투차. 무대는 시칠리아의 농촌. 좀 귀에 익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작곡한 <시골의 기사도>. 흔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고 불리는 오페라의 주인공들이다. 각주 21번에 설명하기를 ‘산투차’는 “성녀를 뜻하는 ‘산타’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긴 접미사를 붙인 별명”이란다.

  베르가는 1860년에 연극 초연한 희곡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썼고, 10년 후에 이걸 마스카니가 자신의 첫 오페라 작품으로 작곡해 공모전에서 1등 먹은 건 다 아시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베리즈모 오페라일 걸? 고 정여사도 무척 좋아하셨지. 편히 안식하시기를.

  그래서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까, 조반니 베르가가 문학을 하기로 작정을 할 당시에 아빠 뒤마의 영향을 받았고, 같은 나이의 프랑스 작가들처럼 자연스럽게 자연주의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그게 시칠리아의 거친 기질과 역사에 힘입어 벤데타 문화를 기반으로, 피바람부는 잔혹극인 베리즈모 장르를 만든 일단의 무리 가운데 한 명이란다. 이 모임 가운데 또 한 명 익숙한 이름이 있으니 작가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해서 <메피스토펠레>를 쓴 아리고 보이토. 아이고, 깜짝이야.

  이탈리아 판 위키피디아 보면 베르가 페이지가 무지하게 장황하건만 우리야 이 정도면 충분할 듯. 이것도 너무 길었나?


  제목이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이니까 말라볼리아 댁네들이다. 시칠리아 동부 카타니아에 속하는 작은 마을 트레차를 무대로 하는 작품이지만 잘 나가던 한 시절엔 꽤나 떠르르르 했던 집안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봤자 대대로 착하고 훌륭한 바닷가 사람들이란다. 이상하지?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떠르르르한 거 보셨어? 하여튼 작품의 막이 오르면 그래도 바닷가 어촌에서는 중상 정도의 괜찮은 집안이다. 본당 명부에는 ‘토스카노’라고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를 주도로 하는 토스카나에서 왔던 이들인가 보다. 물론 그냥 짐작이다

  이 가족은 가장 파드론 느토니와 아들/며느리인 바스티아노/롱가, 다섯 명의 손주들 느토니, 루카, 폴로메나, 알레시오, 로살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할아버지 파드론 느토니는 그냥 ‘파드론’이라고 하자. 맏손자 이름도 느토니라서.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는 넓고 튼튼한 집에서 살며 낡은 고기잡이배 프로비텐차 호를 가지고 있다. 대대로 어부니까 어업이 생업이고 때에 따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 아이가 다섯, 모두 여덟 식구의 대가족이 먹고 살려면 일을 가릴 수 없다. 모과나무 집은 며느리 마루차 애칭 롱가가 시집올 때 지참금 대신 가져온 거라서 아직도 실소유주는 마루차 이름으로 되어 있다.

  덩치가 크고 건장해 힘도 장사라서 동네사람들 한테 애칭 ‘바스티아나초’라고 불리는 아들 바스티아노는 아버지를 거역하는 법이 없는 우직한 성격이다. 며느리 롱가는 둘도 없는 훌륭한 주부. 근데 맏손자 느토니가 좀 문제다. 키 크고 덩치도 좋고 힘도 대단한데다가 어부 집안 맏이답게 배를 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지만 딱 한 가지, 스무 살이나 먹은 젊은 것이 게으르다. 게을러도 너무 게으르다. 둘째 손자 루카는 큰 아이하고 비하면 엄청나게 현명하고 사리도 밝고, 말도 잘 듣고, 언제나 좋은 의견을 내며 세상을 똑바로 살려고 애쓴다. 이런 아이들이 대개 명이 짧지? 이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셋째 팔로메나, 약칭 ‘메나’는 언제나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성실하고 착한 딸. 그래서 별명이 아가타 성녀이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연년생. 메나가 그래서 열여덟 살. 넷째 알레시오는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코흘리개. 할아버지를 닮았으니 당연히 일 잘하고, 성실하고, 잘 생기고 생활력 강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리아’라고 불리는 막내 로살리아는 아직 물고기인지 사람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 젖먹이지만 작품이 끝날 때는 한 미모 하는 바람에 불행을 피하지 못하는 캐릭터.


  조반니 베르가가 자연주의 또는 베리즈모 장르의 선구자니까 이 말라보리아 집안이 잘 될 수 없는 팔자를 타고 났다는 건 당연하다. 일단 불행이 찾아와야 실의와 일탈과 더 큰 상실이 잇따라 도래해 잔혹극이든, 막장 드라마든 생길 것이니까. 시간적 공간은 1860년대에 시작한다.

  가난한 시칠리아 섬에서도 작은 마을 트레차 주민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당연히 먹고 사는 일이다. 마을 주민 가운데 그나마 살기 괜찮은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교활한 면서기 돈 실베스트로, 약국 주인 돈 프랑코, 본당 주임신부 돈 잠마리아, 세관의 하급 관리 돈 미켈레, 그리고 농부는 농분데 주업이 농업인지 고리대금업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크로치피소. 이들과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첩반상은 차려먹는 절름발이 티노. 이름 앞에 ‘돈’자 붙으면 그래도 함부로 악역을 시키기 꺼림칙하니까 말라볼리아 집안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인물은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로 늘 그랬듯이 고리대금 하는 구두쇠, 수전노 악당 크로치피소.

  1863년에 파드로의 맏손자 느토니가 해군에 징집된 사이 크로치피소가 파드론 느토니에게 잠두를 판다. 잠두? 蠶豆. ‘잠’이 누에. 그러니까 누에콩이다. 크로치피소가 직접 농사일을 하는 건 아니고 누나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한테 통상적으로 주는 품삯의 절반도 안 되는 돈만 주고 일을 시키면서도 물 탄 포도주 한 모금도 안 먹이는 악당 가운데 악당이다. 이 해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누에콩 농사가 완전 망쳐버려 간신히 수확한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알고는 먹지 못할 형편없는 것이었다. 근데 가뭄이 시칠리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이탈리아가 다 마찬가지여서 파드로는 누에콩을 사 저 북동 이탈리아 지역인 트리에스테로 가져가 팔면 꽤 돈이 남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근데 종자돈이 있나? 하여 다달이 갚기로 하고 살마 당 2온차 1리라, 헛갈리지? 그냥 거금을 들여 샀다고 여기면 된다. 근데 고리대금업자를 겸하는 인간이 그냥 물건을 넘길 수는 없다. 그리하여 파드로가 며느리 롱가의 재산인 모과나무 집을 담보로 누에콩을 사 온다. 40온차. 집 한 채 값이다. 촌 집이긴 하지만. 그리하여 잘생기고 건장하고 힘 센 아들 바스티아노가 크로치피소의 큰조카 메니코와 함께 낡은 프로비덴차 호에 올라 바닷길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고 긴 항해를 떠난다. 어떻게 됐을까? 결론만 말해, 풍랑을 만나 좌초해 둘 다 죽었다. 이제 실제적인 가장을 잃은 말라볼리아 가족의 본격적인 비극이 막을 올린다.


  파드로가 크로치피소한테 가서 사정을 해 부활절까지 납기를 끌고, 어찌어찌 하고, 우여곡절 끝에 크로치피소는 또 한 명의 악당 오리다리라는 별명의 절름발이 티노에게 채권을 판 척해버린다. 자기 손에는 피 안 묻히겠다는 거지 뭐. 그래서 결국 집 뺏기고 작은 집으로 세 들어 나간다. 그나마 다행으로 맏손자가 제대해 돌아와 멸치를 잡아 돈을 만진다. 안 되는 집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법이라 잘 나가는 순간, 똑똑하고 성실한 둘째 아들 루카도 해군으로 나갔다가 프랑스와 전투 중에 전사해버리고 엄마마저 1866년이든가 콜레라 팬데믹 때 죽는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 게을렀던 맏손자 느토니도 할아버지가 쇠약해지자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해 일도 안 하고 어찌어찌 하다가 몇 년 동안 콩밥을 먹는 신세로 떨어지고 이 집구석은 날이 갈수록 태산만 앞에 나타나는데, 어떠셔? 좀 궁상맞겠지?

  하여튼 이런 건 말로 백 번 하는 것보다 한 번 직접 읽어보는 게 낫긴 한데, 아무래도 스타일이 좀 예스러워 읽어보시라고 적극 권하기도 뭐하고 그렇다. 이탈리아 문학사에서는 한 페이지를 장식할 듯한데 이게 대서양과 카이로 운하, 인도양,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까지 오면 뭐 꼭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베리즈모 오페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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