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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이건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우리나라에 장편 네 권, 소설집 한 권, 합해서 다섯 권의 단행본을 출간했고, 미국에선 2018년부터 펜아메리카, 그러니까 미국 펜클럽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는군. 1962년,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에 시카고에서 출생한 이건은 킴프턴 가문에서 태어난 거 같다. 뭐 내가 전화해본 거 아니니까 분명하지는 않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학사 후에 케임브리지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석사. 이렇게만 쓰여 있다. 진짜로 영국에 날아가 학위를 땄는지, 미국에서 대학간 교류로 학위를 인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도 웃기다. 제니퍼 이건이 대학 다닐 때 스티브 잡스와 연애를 했고, 잡스가 이건의 침실에 매킨토시를 설치해 주었단다. 설마 잡스가 이건의 침실에다 데스크탑을 설치만 해주고 끝나지는 않았겠지? 이런 건 뭐하러 올려 놓지? 이렇게 내밀한 사생활을? 웃겼어. 잡스가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었고, 잡스하고 연애를 했으니 제니퍼 역시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간 잘 나가는 작가라고. 이 책에 대한 책방의 독자 서평도 괜찮은 편이다. 2010년에 출간하고 2011년에 소설부문 퓰리처 상을 받은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에 39번째로 올라간 소설이 <깡패단의 방문>이라서 그냥 심심풀이로 한 번 검색해봤더니 도서관에 있다. 제목 속 “깡패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코믹 폭력물 아닌가 싶어서 읽을까 말까 좀 망설였다가 결국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서 읽었다. “뉴욕타임스 21세기 1백대 도서” 목록 안에 든 소설은 그리 믿음이 가지 않아 망설였다. 거의 영어소설이고 특히 미국작가들의 작품에 편중해 선정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아프리칸 미국인 또는 중남미 출신 미국인들의 노예시절이나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내 입장에서는 과하게 많다. <깡패단…>은 미국의 백인여성이 썼으니 좀 다르겠지, 해서 읽었는데, 다르다. 재미있고, 입심 좋고, 아이디어도 돋보이고, 그랬는데 유감스럽게 벌점 주면 만점은 못 주겠다.
열세 개의 에피소드, 또는 개별적인 단편소설로 읽을 수도 있고, 모두 합해 한 편의 장편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단, 장편소설로 읽을 경우에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서사는 포기해야 한다. 1장의 주인공은 사샤라는 이름의 서른다섯 살 뉴욕 거주 여성. 현재 직업이 레코드회사 대표의 비서. 다음 장은 사샤의 보스이자 레코드회사 사장이었다가 자기 회사 지분을 팔아 돈을 챙긴 다음 같은 회사의 고용 사장으로 있는 베니 살러자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아마도 북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이민 온 조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3장은 베니 살러자르가 젊은 시절 별 자질도 없이 밴드 “플레이밍 딜도스” 활동을 하던 시기에 함께 밴드를 하던 멤버들. 이런 식으로 시간의 수열적 배치 없이 인물끼리 얽히고 설킨 단편을 배열시킨다. 각 장마다 개별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어서 읽기 편하고 서로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시간의 비수열적 배치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과거와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에 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마도 제니퍼 이건이 보여주고 싶었을 시간의 폭력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구성이다.
이런 구성인 줄 모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괜찮은 독서법이었다.
1장의 주인공은 사샤. 35세의 뉴요커. 오하이오 출신으로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중산층 부모답게 어린시절 사샤의 아빠가 (아마도 남자)애인과 함께 야반도주를 해버려 집안이 쫑났다. 엄마는 현명하게도 마음이 넉넉하고 재산은 훨씬 더 넉넉한 괜찮은 남자를 골라 두번째 결혼을 했다. 사샤는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여자애들과 완전히 재미로 잡화점에서 무엇인가를 슬쩍 훔쳐내는 장난을 한 적이 있다. 소녀들은 경쟁적으로 자잘한 상품을 훔쳤는데 친구 누구도 몰랐다. 사샤는 이 일탈을 하면서 처음 느껴보는 지극한 간질거림, 공포와 긴장 속에서 몸 전체가 꼼질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이후 사샤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해 끊임없이 도벽을 향상시켜나갔으니, 글쎄 새아빠로 들어온 남자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황당한 꼴을 겪느냐는 말이지. 그럼에도 새아빠는 몇 번이나 경찰서에서 사샤를 찾아오고, 변상도 하고, 전문 상담사와의 비싼 상담도 진행하면서 온 정성을 다했다.
사샤가 점점 자라 17세가 되자,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갑자기 집을 나가 세상 방방곡곡을 헤매기 시작한다. 일본, 홍콩, 중국, 중동, 유럽 각지에서 시도 때도 없이 돈 좀 보내달라는 전화를 할 때마다 새아빠는 엄마와 함께 사샤를 찾으러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안 가본 곳이 없다. 이 정도면 정말 보살도 이런 보살이 없다. 이런 새아빠들이, 많은 작품 중에서, 사실 알고 보면 별 희한한 파렴치한 작자일 경우가 많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거 1도 없다. 그저 착한 새아빠.
사샤가 집을 나가 세계를 떠돈 지 3년이 흘러 이제 스무 살.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번에는 새아빠가 엄마와 함께 직접 날아갈 짬이 없어서 어릴 때 사샤를 돌보곤 했던 외삼촌을 대신 보냈다. 외삼촌은 3류 대학의 미술사 종신교수. 그는 나폴리에 도착해 사샤를 찾는 대신 미술관과 성당 등 훌륭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명소들만 순례하고 있다. 그러다 물론 사샤를 만나기는 하지. 사샤가 돈도 없이 어떻게 나폴리에서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나폴리에서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나폴리 주민만큼의 인구를 구성하는 미국과 유럽의 관광객. 사샤는 어린시절부터 단련해온 화려한 절도 및 소매치기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해 현지 안목 없는 소매치기가 눈여겨보지 않을 섬세한 품목을 훔쳐 스웨덴인 플루티스트에게 넘겨 돈을 만들었다. 때로는 장물 없이 자기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조금의 돈을 얻기도 하고.
위에서 한 사샤의 이야기는 1장에 나오지 않는다. 저 뒤에, 작품 후반부에 가면 사샤의 시절들이 등장한다. 위 장면은 20세까지, 훗날 1장보다 한 10여년 흘러, 도벽이 드러나 회사에서 아무리 사장이라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무릅쓴 채 사샤를 자를 수밖에 없었고, 이제 의사가 된 옛 대학시절 애인과 연락이 되어 다시 만나 결혼을 하고, 나이로 보아 인생에서 거의 마지막 가능성이 있을 때 아들과 딸을 낳아, 중서부 사막지대에 큰 집을 짓고 사는 이야기 중에 나온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해서 좋을 것 없지만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한 명에 불과하니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벌써 이런 작은 이야기들은 싹 잊었을 확률이 높아 말해버리는 거다.
1장에서의 사샤는 여전히 못 말리는 도벽을 갖고 있는 35세의 커리어 우먼. “소우 이어Sow Ear” 레코드 회사의 제너럴 매니저 베니 살러자르의 비서로 12년째 일하고 있다. 즉, 나폴리에서 돌아와 개과천선해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와 자리를 잡은 거다. 집에 돈이 좀 있다고 해서 아무나 사샤처럼 열일곱 살에 가출을 감행해 3년씩이나 전 세계를 유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과단성도 있고, 매사 결단력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뇌가 다른 이들과 비교해 쌩쌩 돌아가는 총명함도 구비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관리직 높은 자리를 꿰찰 수도 있건만 사샤 본인이 그냥 비서자리를 유지하기 원해서 그렇게 지내고 있을 뿐이다. 사장 베니도 이를 알고 있지만 당장 자신이 일하기에 사샤만한 인물이 없다.
소설의 막이 오르면 장소는 라시모 호텔 화장실. 소개팅에 나온 사샤가 거울을 보면서 아이섀도우를 다시 칠하고 있다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발견한다. 화장실 안에서 여자 오줌누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가방을 놓고 들어간 거 같다. 한눈에 척 보니까, 전문가이니만큼 딱 한 번의 눈길로 가방 가장자리 안쪽에 옅은 초록색 가죽 지갑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심리상담사한테 비싼 돈을 주며 도벽에 관한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 사샤는 절대 훔치려 하지 않았지만, 오줌 누고 있는 여자의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짜증이 났다. 그랬다고 믿기 시작했다. 사샤는 무엇인가로 이 여자한테 징벌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오줌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지갑을 자신의 백 속으로 집어넣고 유유히 화장실을 떠났다.
이 장면을 스토리만 잡아서 이야기하니까 별 감흥이 없지만, 제니퍼 이건의 화려한 입심으로 각 장면마다 심리상담사와의 대화를 연상하기도 하고, 절도 순간의 마음 같은 것의 묘사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크. 사실 별볼일 없던 소개팅 상대 알렉스가, 지갑을 훔쳐나온 이후엔 꽤 괜찮은 남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호텔 라운지에서 나온 이들은 사샤의 절도 콜렉션이 있는 사샤의 집에 함께 가고, 알렉스는 이야기 속에서만 읽어본 부엌 안에 욕조가 있는 집에는 처음으로,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으로 와본 경험이 되었는데, 둘이 별 애정도 없이 만나자마자 그 밤으로 한 번 한 다음에 정말로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사샤의 집에서 나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침이 될 뉴욕 거리를 걷는 알렉스의 뒷주머니에 더 이상 알렉스의 오래되어 헤진 지갑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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