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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보코프 책으로 여덟 권째 읽는 건데, 이렇게 말하는 게 유감스럽지만, 제일 별로였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일부 독자 사이에서 12세 소녀 돌로리스, 애칭 롤리타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험버트에 반대하여 어떤 나보코프도 더 이상 읽기를 거부한 일도 있었다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니까 나더러 자신들의 운동에 뜻을 보태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상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No more Nabukov,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롤리타> 때문에, 더하기 이 책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번다한 상업주의와 상투성 때문에 No more Nabukov를 주장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부코프는 뭐하러 이런 책을 썼을까? 뭐긴 뭐야, 돈 때문이지.
1899년에 러시아 귀족 집안의 자재로 태어나 10대 시절까지 손가락에 물 한 번 묻힐 필요 없이 살다가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유럽으로 날아가서 지나간 과거 시절에 비하면 죽을 똥을 지릴 정도로 아이고 내 팔자야, 고생하며 살았겠지. 근데 유럽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였다. 아마도, 정확한 게 아니라 내 짐작으로 말하자면, 극소수의 부르주아가 아니고 대부분의 유럽인에 비하면 그나마 먹고 살기가 그리 빡빡한 편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러다가 러시아 어로 소설을 쓰고 그게 또 잘 팔려 그나마 돈을 좀 벌었다 한들, 그게 만족스러웠겠느냐고. 1932년에 베를린에서 살던 나보코프는 러시아 이민자들이 러시아 이민자들을 위하여 만드는 잡지에 러시아어로 쓴 소설 한 편을 연재하고, 1936년에 원고를 팔아 영국에서도 원래 제목 <카메라 옵스큐라>로 출판한다. 이어서 1938년에는 미국에서도 출간하게 되는데, 이때 나보코프는 자기 작품을 스스로 번역한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자기 이름으로 낸다. 이때 나보코프가 딱 돈이 궁했던 시기였다고 역자 정영목은 말한다. 돈이 궁하니, 당시에도 소설보다는 영화의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큰 시절이어서, 나보코프가 작품의 제목이야 어떻게 됐든 간에 번역을 할 당시부터 애초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었다는데 그냥 김치국물만 벌컥벌컥 자신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책도 안 팔리고. 뭐 인생이 그렇지.
1938년의 유럽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940년에 미국에 도착한 나보코프는 본격적으로 영어로 소설을 쓰고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어둠 속의 웃음소리>가 영화화되어 크게 히트를 했다면, 아마도 나보코프는 이후의 명작 소설을 생산하는 대신 평생 그렇고 그런 영화 시나리오를 긁적이다, 돈이야 많이 벌었겠지만 문학사에 크게 이름을 올리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인생 살면서 다 좋은 건 없잖아.
근데, 여태까지 했던 이야기를 좀 뒤집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이 재미없는 건 아니다. 웃기지? 난데없이 이상한 말을 해서. 다시 보시면 나는 이 책이 여태 읽은 총 여덟 권의 나보코프 가운데 제일 ‘별로’라고 했지 재미가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인간들이 영화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스토리 라인이 미국적이지 않고 다분히 유럽적이라서 그랬단다. 정영목의 해설을 믿는다면. 어차피 그 양반도 미국사람이 영어로 한 말을 인용한 거겠지만.
곧바로 작품의 주인공 알베르트 알비누스를 소개하자. 미술평론가이자 그림 전문가. 일찌감치 숟가락 놓은 아버지가 제대로 된 자금관리와 다방면의 대박 치는 투자를 해 놓아 덕분에 무지무지한 예금계좌, 토지와 건물과 별장 같은 부동산, 그리고 르네상스 이전부터 뻑적지근하게 이름을 날린 화가들이 그린 다수의 진품과 다수의 가짜 명화들까지 뭐 하나 모자란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돈보다는 ‘뭔가 재미난 일’을 골라 하기 마련이어서, 명화를 이용한 영화 제작안을 짜 여러 영화사에 보내기도 했건만 그때마다 정중한 거절의 회신을 받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21세기가 아닌 1930년대의 이런 남자들의 특징. 차분하고 행실 좋은 쪽으로 잘 생겼다는 느낌을 주는 외모. 군살도 없지만 그렇다고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도 않은 몸. 따라서 크게 완력이 있지도 않은 그저 도련님. 점점 자라 대가리가 굵어지고 다른 것도 굵어지면서 세 번 연애를 했는데, 첫째가 나이든 칙칙한 부인과의 지루한 간통이었으며, 두번째가 라인강변에서 만난 교수부인이었고, 세번째가 결혼 직전 베를린의 못생긴 얼굴에 여위고 따분한 여자였다. 이후에 부유한 집안의 어여쁜 엘리자베트를 사랑해 결혼했지만 전형적인 규방규수인 아내는 그가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을 결코 남편한테 주지 못했다. 웃겼어.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이 뭐야? 그걸 가지고 있는 여자가 세상에 있어? 아니, 있겠지. 내가 하는 말은 1년 이상 갖고 있을 수 있는 여자 말이지. 하여간 나보코프는 그 염병할 전율을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상실감, 황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외따로 서 있는 나무, 교량 안쪽의 굽은 곳으로 퍼지는 빛의 파문,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보코프는 이후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을 15년 동안 찾아나섰다가 예상치도 못한 “님펫” 롤리타를 만나 평소 원대로 돈과 명성을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하루는 시내에 약속이 있어 외출을 했는데, 카페에 도착하니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온 거다.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들른 알비누스. 당시엔 영화 상영 중에도 표만 사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화면을 제외하고 딱 하나 켜져 있는 전등이라고는 비상구 안내등 밖에 없어서 대개 여성 직원이 손전등을 가지고 어둠 속에서 새로 입장한 손님을 좌석까지 안내해주었다. 영화 보다가도 담배를 뻑뻑 피우던 시절이니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근데 알비누스를 안내해준 안내원 소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창백하고 음침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나이는 열여덟쯤? 보는 것만 가지고도 아팠단다. 어디가 아팠을까? 그건 모르겠다. 책에 안 나온다. 한 눈에 홀딱 반한 알비누스는 사흘이 지나 다시 영화관에 갔고, 세번째 들렀을 때 소녀에게 웃어주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실제로는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형적인 찌질이 도련님. 너무 얌전하게 자란 티가 벅벅 난다. 한편으로는 “다 소용없어. 지금 행복한데 나한테 뭐가 더 필요해? 어둠 속에서 미끄러져 다니는 그것…. 그 아름다운 목을 눌러버리고 싶어. 뭐 어차피 죽어버린 거나 다름없지. 다시는 가지 않을 거니까.”라고 마음먹지만 안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녀의 이름은 마르고트 페터스. 중하층 또는 그 아래 계급 가족의 1남1녀 가운데 둘째. 부모는 마르고트가 얼른 자라 자기 먹을 걸 스스로 벌어 집에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열여섯 살 때 겨울날, 레반돕스키 부인 댁의 아파트에 딸린 작은 하녀방으로 옮겼는데, 하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내며 훗날 레반돕스키 부인을 포주로 섬기라는 뜻이었다. 결국 머지않아 밀러라는 이름의 남자한테 (결과적으로)순정을 바치고(어떤 순정인지는 안 알려드림), 밀러와 헤어진 다음엔 노인과 몇몇 남자를 거친 후에 영화관 안내원으로 잠깐 일했던 거였다.
그러니 지금 나이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상살이를 알만큼 알고, 겪을만큼 겪은, 닳고 닳은 팜 파탈이었던 것이지. 원래의 꿈은 화가들의 누드 모델을 거쳐 은막에 데뷔하여 스타가 되는 거였는데, 모델을 하면서 영화계 입문을 위해 조금이라도 영화를 알고 싶어서 들어간 거라고. 이 아가씨한테 우리의 알비누스가 걸려버렸던 거였다. 걸려도 아주 되게 걸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 독일 베를린에 알비누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부유하고, 품위 있고,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린 애인 때문에 아내를 버렸다. 그는 사랑했으나, 사랑받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삶은 참담하게 끝이 났다.”
이 한 문단만 읽으면 책은 사실 끝났다고 봐도 별 무리 없음, 쾅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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