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다. 4년 전에 읽은 시집. 심지어 사서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도서관에서 빌려 또 읽었다. 독후감도 또 썼다. 진짜 웃긴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긴 살면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을쏘냐. 4년 동안 시를 읽은 감상이 어떻게 변했을까?
다시 쓴 거 또 읽어보니까 진짜. 진짜, 진짜 웃기다. 본문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처음 읽은 박소란의 시집" 쇤네 미친 거 아님? 아니면 알츠하이머?
이번에 쓴 독후감은 이렇다. 별점 3
시인의 이름은 오래 전에 들어 귀에 익었다. 정작 읽어본 시가 없었지만. 이름이 재미있으니까. 소란. 웃는 난, 笑蘭. 소란騷亂스러운 소란. 뭐 대강 이런 이미지였다. 본명일까? 본명이면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1981년생이니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미소를 지으며 웃을 소笑자를 넣을 수 있었겠다. 이름에 쓰는 ‘소’자는 대개 흴素나 새둥지 소巢, 밝을 소昭 같은 걸 쓰는데 웃을 소는 이이가 처음이다. 그래서 이름자를 보자마자 단박에 기억하고 있었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라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9년에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한 시인. 간략해서 좋다. 요즘 동국대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가 핫하다. 이젠 문예창작과가 없는 대학이 별로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각 대학(원)별로 누가누가 시인 소설가를 많이 배출하느냐, 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듯한데 남산 기슭 동국대가 이름을 날리고 있는 듯. 근데 내가 뭐 알아? 어떻게 시인, 소설가 출신을 보면 동국대 문창과가 눈에 자주 들어온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은, 내 주제에 무슨 특별한 증거가 있거나, 증거를 갖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고 그냥 심정상 그렇다는 건데, 숱한 문예창작과들의 경쟁 도구가 당년도 데뷔 시인, 소설가를 몇 명이나 배출하느냐, 하는 데 몰려 있는 거 같아서. 어느 고등학교에서 서울대를 몇 명이나 보내느냐, 하는 것으로 고등학교의 질을 판단하려는 것 비슷하게 말이지. 뭐 그렇다는 거다. 그것 때문에 우리 시와 소설이 비슷해진다는 의견은 양심상도 그렇고 아는 것이 없어서도 주장하지 못하겠다. 그냥 내 짐작이 그럴 뿐이니, 아마도 오산 가운데 큰 오산일 것이다. 이런 헛소리가 마땅하지 않더라도 심한 질타는 참아 주시면 좋겠다.
처음 읽은 박소란의 시집. 도서관에 박의 시집이 몇 권 있다. 이 가운데 원래는 《심장에 가까운 말》을 읽으려 했다. 근데 소설책에는 훨씬 덜한 반면, 시집엔 왜 그리 밑줄을 많이 그어 놓는지. 밑줄 그어진 시는 생각보다 읽기가 어렵다. 내 시각으로 보아 전혀 중요하지 않은 대목에 그것도 삐뚤빼뚤, 정성이 한 개도 없는 줄이 그어져 있으면 시를 읽는 분위가 싹 잡쳐버리고 만다. 물론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10년 전에 출간한 《심장에 가까운 말》은 10년 동안 한두 명이 밑줄을 그어 놓은 게 아니어서 도무지 읽어줄 수 없어 대신 고른 시집이 《한 사람의 닫힌 문》. 동네 도서관 서가의 책에 밑줄이 하나도 안 그어져 이걸 선택했다.
그런데 시인의 이름하고 어울리지 않게 왜 이리 우울해? 시들이 주로 슬프고, 외롭고, 무섭고, 버림받고, 의지처를 잃고,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뭐 그렇다. 시집의 제일 앞에 내세운 시가 <벽제화원>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시립 승화원의 옛 이름이 벽제화장장. 이곳 초입에도 다른 화장장 들어가는 길목과 마찬가지로 꽃 파는 화원이 늘어서 있다. 시인이 승화원에 갈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나 갈 일이 있어 화장로 앞에서 눈물 한 번 짜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듯한 장소. 시인은 화원을 보면서 노래했다.
벽제화원
죽어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를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사람을 묻은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 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전문. p.10~11)
아무렴. 아무도 예쁘다 하지 못하지. 승화원에 화장장만 있는 게 아니거든. 공용 납골당도 있고, 개인 납골묘도 있고, 숱한 수목장에 안치된 골분함도 있고, 뼛가루 뿌리는 산골터도 있는 장소에, 누가 함부로 빨갛고 파랗고 샛노란 꽃을 들고 갈 수 있겠어? 그러니 벽제화원, 화장장 인근의 꽃집에 희거나 노란 주로 국화류의 꽃다발만 전혀 저렴하지 않게 팔겠지. 봄부터 소쩍새가 열라 울어주는 바람에 가을에 핀 국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꽃도 보기에 따라 아름답다거나 예쁠 수 있지만, 절대로 꽃으로 보고 예쁘다 할 수 없는 장소와 환경과 분위기 뭐 그런 거지. 그렇게 살다 가면 그걸로 끝인 게 인생이니 이리 유별을 떨 필요도 사실 없다. 하지만 유별 떨 필요가 없다고 유별날 짓을 하지 않으면 그게 시인이야?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실래?
비닐봉지
알 수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에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째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인가
쉽게 구멍이 나는
버리면 된다, 이런 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검게 읊조리는
자정이 지난 골목을 혼자 서성이는
까닭도 없이
달리는
내처 나는, 날아보는, 제 더러운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새처럼
어디로든
언제든
도무지 썩지 않는 (전문. p.18~19)
밤, 특히 겨울 밤에 아스팔트나 보도를 횡행해 날아다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보고 쓴 시가 한 둘이 아니다. 인상깊게 쓴 검은 비닐봉지 시를 읽은 적 있는데 가물가물, 아마 집에 있을 터인데 누가 지은 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근데 박소란의 비닐봉지가 검은 색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냥 비닐봉지. 아마도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 먹고, 잔치국수 한 그릇 후루룩 마시는 결에 함께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한 줄 먹고 입 주변에 깨소금이나 참기름을 묻혀 나오면서, 사장님 깁밥 한 줄 싸주세요, 해서 알루미늄 포일에 싼 김밥을 비닐 봉지에 넣어 받았겠지. 박소란. 밥을 먹으면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는데 늘 죽은 사람이거든. 그래 독자는 비닐봉지가 결국 검정 비닐봉지로 딱 연상하게 만든 다음, 이제 시는 삶의 방법으로의 먹음에서 자정이 지난 골목을 배회하며, 날아다니며, 세상의 불운과 죽음을 살포하는 불길한 검은 비닐봉지의 세상으로 만들어냈다. 그것 참. 저 앞에서 말했듯이 시 두 수가 슬프고, 외롭고, 무섭고, 버려지고, 무엇보다 우울하다.
시집을 읽는 내내 밝고 기뻐서 시인의 이름 소란笑蘭처럼 청아한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사랑과 연애마저 그러했다.
원룸
비의 꿈을 꾼다
윗방이 이사를 오고 난 후 줄곧
장대처럼 굵고 거센 오줌 소리를 듣는다
밥을 먹으며 듣는다
잠을 자며 듣는다
침대에 누워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보면 천장이 왈칵
쏟아져내릴 것 같다 꿈은
흥건히 젖어 막무가내로 불어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만 같다
지금쯤이면 그의 꿈도 흐르고 있겠지, 내가 오줌을 누면
우산도 없이 우리는 만나
꿈과 꿈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인사를 나누겠지
누렇게 얼룩진 아침은 황급히 뒷걸음쳐 숨겠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겠다
기어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그 사랑은 참 우습고 더러운 사랑
우리는 자주 거짓말을 하겠지 지그시 서로의 귀를 막으며 (전문. p.62~63)
원룸 윗방에 튼튼한 국가대표급 전립선 보유남성이 이사 왔나 보다. 그랬더니 아무 때나, 밥 먹을 때, 잠잘 때를 가리지 않고 콰르르르, 이과수폭포처럼 사나운 물총을 난사한다. 아, 씨. 부러워라. 침대에 누워서 오줌발 소리를 들으면 왈칵 천장이 무너져 영화 <지만지>의 폭우 장면처럼 휩쓸려갈 것 같단다. 여기서 의식이 확장된다. 시인이 오줌을 누면 정말 있는지,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꿈에서 그를 만나, 이 다음 연, “누렇게 얼룩진 아침” 그러니 젖은 꿈, 즉 몽정의 밤을 보낸다. ‘그’와 나는 이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이 사랑마저 우울하다. 우습고 더럽기 때문에. 지그시 서로 귀를 막으며 거짓말을 찍어대고 있을 터이니.
같은 주제로 얼마든지 유쾌한 시를 쓸 수도 있다. 이윤기(맞다 그 이윤기. 에코의 <장미의 이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한 이)가 한밤중에 윗집에 혼자 사는 스튜어디스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들으며 유쾌한 상상을 했듯. 소설집 <나비 넥타이>에 나온다. 윗층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난만하고 맹랑한 오줌 누는 소리. 그걸 들으며 그도 내가 누는 오줌 소리를 들으면 좀 야한 생각이 들까? 생각할 수도 있고, 꿈에서나마 만나 사랑할 수도 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문제는 역시 마지막 연. 구태여 박소란은 그 사랑을 더러운 사랑으로, 오직 오줌과 누렇게 얼룩진 사랑으로 몰고 간다.
이런 시집이 많다. 이래서 시집 읽기가 점점 어려워/어지러워진다. 물론 시를 읽는 스펙트럼이 짧아 이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마음에 드는 시집 골라 읽기가 갈수록 쉽지 않다. 세월 탓이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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