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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71년에 알바니아에서 알바니아어로 출간된 원본을, 1973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서 출간한 책을 이창실이 다시 번역, 즉 알바니아어-프랑스어-우리말 순서로 중역한 책이다. 서쪽으로 에게해를 면한 알바니아는 북으로는 몬테네그로, 북동에 코소보, 동쪽엔 북 마케도니아, 그리고 남쪽으로 오랜 세월 알바니아를 적극적으로 간섭한 역사를 지닌 그리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이다. 20세기 중후반 들어 그리스와 오랜 영토 다툼을 하다가 1987년에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고향이 그리스 접경도시인 지로카스트라. 산비탈이 진 곳에 수백년 동안 돌집을 하나 둘 지어 마을을 형성해 좁은 골목이 복잡하게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안 가봐서 모른다. 이이의 책 속에 등장하는 마을이 대개 그런 식이라 그러려니 할 뿐이다. 책 속의 주인공 소년이자 화자 ‘나’의 집도 이런 비탈에 지은 돌집이고 동네에서 제일 크고 넓은 집이라니 대대로 마을 유지 정도였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경사가 급한 비탈에 생긴 마을이라서 누가 술 한 잔 장히 자시고 골목길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낙상이라도 하면 남의 집 지붕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산악지형의 도시 아래 계곡엔 풍부하지 않지만 물이 흐르고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다. 전쟁통에 이런 다리는 대개 끊어질 운명에 처하지만 이 마을의 다리는 끝까지 꿋꿋하게 서 있다. 다리를 건너면 또다시 급한 경사의 산악지대가 나타나는 한편 왼쪽으로는 소 방목장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넓은 벌판이 자리잡고 있다. 이 벌판에 ‘나’의 외갓집이 있어서 집에 일이 있으면 부모가 ‘나’를 외갓집으로 며칠 보낸다. 외갓집에서 2백보 정도 떨어진 옆집에 수자나라는 여자 아이가 있어서 ‘나’가 도시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해주면 넋을 잃고 듣는데 그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외갓집에 가라면 무척 좋다.
카다레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산비탈의 도시, 산과 산을 잇는 다리와 계곡을 흐르는 강, 그리고 산지 사람들이 보기에 넓은 평야. 이 평야를 통해 튀르키예군, 그리스군 또는 독일군이 도시로 침공하며, 이탈리아군이 도시를 먼저 점령한 후 평야쪽으로 펼쳐 나간다. 역사상 거의 언제나 약소국이었던 알바니아 사람들은 이 침략군들이 눈에 보이면 다시 새로운 상황이 생긴 것으로 인정하고 창문이나 지붕에 흰색 커튼을 내다 걸어 이들을 들여보낸다. 또는 이국의 병사들에게 저항하다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패색이 짙어진 다음에 그을음이 묻은 흰 침대보를 창분 밖에 걸쳐 놓든지.
아쉽지만 그렇게 살아야 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이스마일 카다레가 1936년생. 병자년 쥐띠. 작품을 시작할 당시 계곡에서 불쑥 솟아나 힘겹게 산허리를 오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도시는 모든 것이 돌이고 노후화된 상태였다고 말한다. 도시는 12~13세기에 한 성주가 높은 산허리에 성탑을 세우면서 생기기 시작해 이어 다닥다닥 돌집이 붙기 시작했다. 15세기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당시 처음으로 도시가 텅 비워졌으며, 몇 백 년 후에는 튀르키예 군사들의 살육을 피하기 위해 거의 모든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었다. 이제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아비시니아를 점령한 이탈리아군이 아주 잠깐의 영광을 위하여 독일과 연맹을 이루어 알바니아를 차지한 후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영국과 협력하기로 한 그리스에 역전패를 당해 다시 그리스군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본격적인 세계대전으로 번진 전쟁 동안 스탈린그라드에서 쌍코피가 터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방면으로 철군을 하며 다시 한번 알바니아는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간다.
이 과정을 1936년생인 카다레가 다 기억하고 있을까? 분명히 기억 속에는 이탈리아군, 그리스군, 그리고 독일군의 점령과 당시 피난길을 떠난 기억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억만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이의 기억도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말처럼 “유년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이라기보다 당시에 들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여러 파편을 모아 서로 연결하고, 추리하고, 픽션이라는 툴을 이용해 가공해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돌’은 당연히 도시가 돌집으로 만들어졌으니 도시를 이룬 돌, 즉 도시의 연대기를 말할 터이고. 이 작품을 출간한 것이 1971년. 전쟁이 끝나고 26년 후. 한일월드컵이 2002년. 벌써 23년 반이 됐다. 이 행사를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니 사람이 죽어나가고, 총맞아 죽고, 찢어져 죽고, 펑 터져 죽는 충격이 월드컵 축구 시합보다 몇 십 배 더 컸을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여전히 선연한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의 재구성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 ‘나’는 아이. 열 살 미만으로 보이는 소년이다.
막이 올라가면 이 오랜 도시의 나이든 사람들이 ‘나’의 집 응접실에 모여 도시 사람들 이야기를 한다. 이 장소에서 거론되지 않는 도시의 일은 없을 정도. 늙은 할머니 제조가 소식 한 가지를 가져왔다. 체초 카일의 딸 한테 불길한 턱수염이 남자처럼 자라고 있단다. 체초 카일은 이걸 숨기기 위해 딸을 방에 가두고 밖에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동네에 마네 보초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이의 아들 이사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였다. 글쎄 안경을 쓴 거다. 불길한 유리를 눈 앞에 대면 세상이 찌그러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그걸 눈 바로 앞에 대야 제대로 보인다니, 정말 말세가 왔는가 보다. 몇 주 전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시내 복판에 자기나라 수녀들이 머물러 살라고 시멘트로 하얀 집을 지었다. 이걸 주민들은 종이집이라 부른다. 종이로 사람 사는 집을 짓다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니까 역시 세상은 말세다, 말세. 결혼식 때 신부화장을 전담하는 노파 피노 어멈은 늘 말세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산다.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어디서나 결혼은 하는 법이라 피난길에도 도시를 떠나지 않아 오해를 받아 책 뒤편에서 목매달아 죽는 형벌을 받아야 했던 여인.
비가 온다. 많이 온다. 도시는 경사가 급해 비가 오면 산 꼭대기에서 바위나 흙이 밀려 내려와 심할 때는 집 한두채가 한 번에 무너지기도 한다. 골목을 따라 급류가 생겨 물이 갑자기 아래 강으로 쓸려 내려가 식수 구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 큰집은 마당 아래 큰 물 저장고를 만들어 갈수기 때 동네 주민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준다. 근데 적당히 물을 저장해야지 탱크가 넘치게 물을 받으면 오히려 집이 중력에 의하여 아래쪽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올해 ‘나’의 집이 그랬다. ‘나’가 큰 저장고 아래로 고개를 디밀어 보니 엄청난 양의 물이 탱크를 채웠다. ‘나’는 궁금하다.
“사람과 물. 이 둘 중 누가 더 갇혀 있는 것을 괴로워할지 혼자 생각해보고 있었다.” (p.11)
전쟁 당시의 알바니아 국민, 카다레의 고향 지로카스트라, ‘나’의 집이 있는 산허리의 도시, 돌집, 이동이 힘든 산악지역의 도시 자체가 사람들을 갇힌 상태로 있게 만든다. 그래서 다 큰 여자의 턱에 수염이 돋는 일, 공부를 한 청년의 눈에 안경을 쓰는 일, 이탈리아 수녀들이 종이로 만든 집에 사는 일 같은 것은 검은 구름에서 푸른 말을 타고 세상을 멸하려 쏟아져내려오는 불의 천사들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스마일 카다레는 1989년부터 시작한 동유럽의 해방 시절에 유독 봄바람이 늦게 오는 알바니아를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해버릴 예정이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소년인 ‘나’는 이런 게 오히려 다 재미있다. 누나의 턱에 수염이 나는 것, 공부 많이 해 눈이 나빠진 옆집 사는 (아직 주민들은 모르지만) 젊은 공산주의자 이사형의 책꽂이에서 <맥베스>를 뽑아와 열 번도 넘게 읽으니 스코틀랜드의 왕 시해와 살인범의 상태가 이해되던 것도. 열일곱 살 먹은 명랑한 작은 이모는 시집가려고 식탁보 같은 곳에 열심히 수를 놓고 있다가 엉뚱하게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 혼자 몸으로 산에 올라 반 파시즘 공산 파르티잔이 되는 것도 혹시 독일군 총에 맞아 죽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재미있고 근사한 일이다. 우리 이모가 산에 갔어! 얼마나 광 나는 일이냐는 말이지.
죽마고우 옆집 친구 일리루의 형 야베르가 말한다. “너희는 노예로 자라서 자유로운 도시가 뭔지 몰라.”
아이의 눈을 통해 전쟁과 전시의 시민들을 보았다. 그러니 전쟁은 실제 전쟁만큼 심각하지 않다. 간혹 적들의 폭격기와 은근한 일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소년이니까. 전시라서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고 적나라한 인성이 그래도 나타나는 일도 많다. 흔히 아이들이 아프면서 배운다는 데, 전쟁이야말로 다른 어느 것보다 아픈 기억일 터이니 빨리, 많이 배운다.
막 결혼했지만 사내 구실을 못한다고 소문이 난 막수트.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혼인을 해서 그런지 소문이 나자 두문불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사라졌다.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모멸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그랬을까? 숱한 이웃을 이탈리아 군에 고발하는 첩자짓을 서슴지 않았고, 이런 비밀은 절대 끝까지 가지도 않는 일이라 이탈리아군이 물러나고 독일군이 재점령할 잠깐의 사이에 산사람들이 내려와 포고령에 의하여 총살에 처해버린다.
영국 공군에 의한 폭격, 독일 탱크의 진군. 산골의 한 돌집 도시가 힘겹게 한 시절을 견디는 광경을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힘들지만 결코 절망적인 시선도 아니다. 지지고 볶고, 죽고 죽이고, 굶어 피죽도 못 얻어먹어도 사람은 살아간다. 사는 게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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