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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지니아 울프와 친하지 못하다. 전형적인 영국 상위 중산층 또는 하위 부르주아 계급인 울프. 이 집단 안에서 이탈하지 않고 정착해 사는 동류들의 의식. 그것이 흐르거나 말거나. 이이의 작품을 읽고 이이의 소설에 동감하고 감동도 하면서 울프를 찬양하는 독자를 나는 부러워한다. 간혹 이이의 내면 묘사가 썩 인상깊기는 한데 여차하면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려운 글쓰기를 양보하지 않는 작가. <올랜도>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페미니즘적 성취와 표현 방식은 놀라웠지만 <등대로>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등대로>를 더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근데 양보하고 싶지 않은 건, 나하고 안 맞는 작품을 좋다고 말하기 싫다는 거. 이런 의미에서 한껏 기대하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은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은 좋지 않다.
무려 스물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본문이 표지를 포함해 250쪽에서 끝나니까 한 작품당 대강 열 페이지 정도 분량이다. 앞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하고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안 읽지는 않는다. 그런 책 가운데서도 배울 게 있고, 배울 게 있으면 배운다. 놀랄 만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놀라고, 감탄할 만하면 감탄한다. 근데 이 책에서는 배울 것도, 놀랄 만한 것도, 감탄할 것도 없더군.
그나마 덜 어렵게 읽어서 마음 편했던 <델러웨이 부인>.
작가가 장편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에 일필휘지로 쓰는 건 아닐 터. 숱한 에피소드와 장면과 등장인물을 설정하거나, 작품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질 터인데, 먼저 초안이 나오고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들어내고, 첨가하면서 소설을 완성시키겠지. 근데 특정 에피소드나 장면, 등장인물 같은 것들 이 마치 닭의 갈비뼈 같아서, 버리자니 무지하게 아깝고, 넣자니 마음에 걸리는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집 속에 “델러웨이 부인 댁의 파티”를 위한 단편이 네 편 정도 들어 있다. 이것들이 혹시 이런 닭갈비뼈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왜 자꾸 들지?
당연히 출판사 책 소개글에는 “<델러웨이 부인>의 단초가 되는” 단편들, 즉 델러웨이 가의 파티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소설 몇 편을 몇 개 썼고, 이것들을 쓰다보니 장편도 하나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장편 <델러웨이 부인>을 쓰게 됐다고 읽히게 표현했는데, 장편을 쓰게 되는 단초인지, 아니면 닭 갈비뼈인지, 만 원은 모르겠고, 오천 원 내기라면 닭갈비뼈에 걸겠다. 오천 원이면 얼마야, 꽉 찬 로또가 한 장이다.
천성이 상것인 내 눈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위하여 새 드레스를 맞춰 입고, 파티에 누가 참석하고, 초대를 받았느니 받지 못했느니, 제공한 에피타이저와 정찬과 디저트와 리큐어와 와인과 상파뉴,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 도무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거다. 원래 델러웨이 부인과 측근들이 부르주아, 귀족 계급일지는 몰라도 속물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물 아닌 인간 있으면 세 명만 데려와 보라, 하는 심정으로, 그래도 썩 잘 쓴 소설 같아서, 읽기는 읽었는데, 또다시 비슷한 게 자꾸 나타나니까, 멀미나 읽느라 고생했다.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버지니아 울프 읽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이이의 단편소설이 그리 좋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지, 위에서 말한 <등대로>를 빼놓고 사실은 모두 그럴 듯하게 읽었다. 그중에서 <파도>를 아직까지 읽은 울프 가운데 제일 멋있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다. 그래도 울프 한테 여전히 선뜻 손이 가지는 않는다. 바로 이 책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 같은 경우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속으로 나는 이렇게 지껄였다는 거 아냐.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을 포함해서 가끔 어려운 책도 읽어야 하겠지. 만날 쉽고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다. 굳이 찾아서 고통을 당할 필요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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