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필립과 다른 사람들
  • 세스 노터봄
  • 9,000원 (10%500)
  • 2008-11-28
  • : 367

.

  노터봄은 7, 8년 전에 <의식>을 읽고는, 이 책 <필립과 다른 사람들 : 이하 “필립”이라 표기>도 읽은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읽은 책, 이렇게 판단하고 그냥 넘어갔다. 안 읽은 줄 알았다면 벌써 해치웠을 터인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개가실 서가에서 책을 뽑아 훌훌 넘기다 보니 생판 처음 만나는 스토리다. 아이쿠, 이 책 안 읽었구나. 얼른 빌려서 다음날 하루만에 다 읽었다. 2백쪽 정도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읽는 재미를 기대하면 읽기 힘들 걸?


  <필립>을 읽기 전에 세스 노터봄의 바이오를 조금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 1933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노터봄. 호적상 이름은 코르넬리스 요한네스 야고부스 마리아 노터봄. 이런 건 안 중요하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부터 진짜. 노터봄이 점점 자라 열 살이 되던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당시, 철없는 아빠께서 노터봄을 돌본 젊은 유모와 눈이 맞아 새삼스레,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는 줄 알고 헤이그 시내에 방을 얻어 집을 나가버린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십계명을 어긴 아빠를 심판하고자 바로 다음 해에 영국 공군의 폭격기를 헤이그 하늘 위로 보내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게 하고, 이 와중에 노터봄의 아빠는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던 엄마도 1948년에 가톨릭 신자와 재혼해 버렸다. 의붓아버지는 뭐 서로 보기 어색해서 그랬겠지만 노터봄을 가톨릭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집어넣었고, 입학할 당시엔 그러지 않았지만 곧 밀어닥친 사춘기를 맞아 제대로 된 전투적 일탈 청소년의 전범이 된다. 사춘기가 되면 몸과 일탈 충동만 거세지는 게 아니라 자아도 그만큼 커지는데, 노터봄은 이때부터, 남자 작가들 거의 다 대개 이때 부터이기는 하지만, 독서, 작문, 시작 등을 모색했다고.

  만날 기숙학교에서 탈출하고 그랬으니 당연히 퇴학을 당했겠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터봄은 어찌어찌 위트레흐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병역 면제를 받고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때려치운 후 2년 동안 유럽 각지를 아마도 당시 말로 “무전여행” 요새 말로 배낭여행을 한 후, 이때까지의 기억과 경험을 모아 처음으로 책을 내니 그게 바로 <필립>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시간적 배경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필립 엠마누엘 반데를레이의 (노터봄의 아빠가 유모하고 손잡고 집을 나간) ①열 살 시절 잠깐, ②열여섯 부터 열여덟 살까지 잠깐, ③열여덟 살부터 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작품의 앞부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회 부적응적이면서 상당한 돈과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삼촌 안토닌 알렉산더. 네덜란드 중부의 소도시 호이에서 “몰골스럽고 섬뜩할 만큼 덩치가 큼지막한 집”에서 혼자 사는 독신남이다. 필립이 안토닌 삼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열 살. 당시 삼촌은 칠순 정도라고 기억한다. 삼촌이 필립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삼촌 집에 오면서 선물도 없이 맨손으로 왔느냐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필립은 얼른 집밖으로 나가 옆집 정원에서 철쭉꽃을 꺾어와 선물한다. 그제야 만족한 삼존은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필립은 그것이 자신의 십년 생애 난생처음이자 유일무이한 진짜 파티로 기억하게 된다.

  삼촌과 필립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로스드레흐트로 가, 다시 걸어 플라스 호수로 갔다. 시간이 흘러 달빛이 호수 표면의 윤슬에 부서질 때 삼촌을 보니, 낮게 울고 있었다. 필립이 왜 혼자 사느냐고 물었다. 삼촌은 “나는 나 스스로 결혼한 셈”이라며 “원래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오비디우스의 변신 개념으로) 나로 변신해버린 추억하고” 결혼한 셈이란다. 중요한 메타포. 후에 필립은 “나로 변신한 추억”으로의 한 여성, 중국인 얼굴을 한 여성을 찾기 위하여 전 유럽을 떠돌게 된다.

  다시 버스를 두 번 타고 집에 돌아온 삼촌은 야심한 밤에 쳄발로를 연주해준다. 바흐의 파르티타. 아리아, 사라방드, 미뉴에트, (아마도)지크, 구랑트, 알라망드 등등. 필립이 태어났을 때, 바흐의 아들 가운데 엠마누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립의 가운데 이름에 ‘엠마누엘’을 넣으라고 강권한 사람이 안토닌 알렉산더 삼촌이었다고. 연주를 끝내고 가상의 J.S. 바흐와 인사를 나누게 하고서야 삼촌은 필립을 재운다. 방에 들어온 필립은 구석에서 축음기를 발견하고, 축음기 통에 들어 있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판을 올려 구동하니, 옛 시절 축음기라 음량 조절 장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테너가 노래하는 ‘성배 이야기’가 크게 쏟아져 나왔다. 늙은 삼촌이 들이닥쳐 화를 내는 바람에 필립이 서둘러 금속 바늘을 제거하는 동안 바늘로 음반을 거칠게 긁어 깊게 홈이 파이고 말았다.


  6년 후의 두번째. 열여섯 살 필립은 삼촌을 만나기 전에 옆집 마당에서 철쭉꽃 한 다발을 꺾어와 선물했다. 흡족한 삼촌은 똑 같은 과정으로 호수에서 파티를 하고, 집에 돌아와 쳄발로 연주를 해준다. 바흐 파르티타. 연주가 끝나고 이번에는 바흐를 비롯해서 안토니오 비발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제미니아니, 본포르티, 코렐리 등등을 소개하고 인사하라고 권한다. 물론 실물이 없는 허상. 6년 전에 묵었던 방에서 다시 찾아낸 축음기. 필립은 또 <로엔그린>을 올리고, 또다시 서둘러 들어온 삼촌은 이번에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엔그린>을 못 틀게 하는 이유. 그런 줄 알았지만 삼촌은 책꽂이에 있는 사진틀 속 인도네시아 혼혈 소년 폴 스웨일로 이야기만 하고 만다.

  삼촌이 끝내 해주지 않은 이야기. 왜 <로엔그린>을 틀지 못하게 하는지, 그 속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바그너의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 참. 너무 긴 이야기라서 소개하려 마음먹었다가 머리통만 벅벅 긁고 있는 중이다. 우짤까?


  북쪽 유럽에 있는 그랄이라는 동네는 로엔그린의 아빠이자 성스러운 바보인 파르지팔이 이끄는 기사들이 성배를 수호하는 곳인데, 로엔그린이 나이가 들어 부랄이 굵어지자 파르지팔이 막둥이 장가들라고 백조가 모는 배를 태워 지금은 네덜란드 땅인 브라반트로 보낸다. 여기에 엘자라는 죽은 영주의 딸이 곤경에 처해 있었다. 로엔그린은 선한 엘자의 대변인으로 엘자의 악당 삼촌이며 왕위를 노리는 프리드리히 폰 델라문트와 맞짱 대결을 펼쳐 이기고, 엘자의 남편이자 공국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예정이다. 로엔그린은 엘자에게 결혼 조건으로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라고 하고, 엘자도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뭐 신들의 장난이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강제하는 것이 신이 제일 자주 하는 짓궂은 장난 아냐?

  삼촌의 아내, 그러니까 엘자의 숙모이며 마녀이기도 한 오르트루트가 결혼 전날 엘자를 심하게 꼬드겨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어떻게 남편이라고 하느냐고, 이름을 물어보라고 딴지를 건다. 순진한 엘자는 숙모한테 꿈벅 넘어가 오후에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 신방에 들어, 고쟁이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로엔그린의 이름을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다. 흑흑, 말씀을 안 해주시는군요. 소첩을 사랑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겁니다.

  로엔그린도 눈물을 머금고 만조백관을 그 새벽시간에 출두시켜 모든 이가 보는 광장에서 엘자에게 자기 신분, 이름, 고향을 말한 뒤, 일찍이 자기 이름을 물어보면 모든 계약이 무효임을 상기하여, 다시 백조가 모는 보트에 올라 브라반트를 떠난다. 사랑하는 엘자를 만나, 첫날밤도 치루지 못하고 떠나고 마는 로엔그린. 왜 삼촌은 이 음악을 듣지 못하게 했을까?


  이거, 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고 <필립>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하여 소개했다. 고맙지?

  2년 동안 삼촌과 살다가 18세, 법적 성인이 된 필립이 중국인 얼굴을 한 아가씨를 찾아 전 유럽을 떠돌아, 결국 만나기는 만나는데, 그 다음에 로엔그린처럼 어찌 될까봐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해석은 당신이 하시라.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