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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바츠먼의 변호인
  • 탕푸루이
  • 16,200원 (10%900)
  • 2024-06-24
  • : 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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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 탕푸루이가 타이완에서 엔지니어 아버지, 공무원 엄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1982년 9월에 나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연무읍 육군 제2훈련소에서 박박 기고 있었으니 거 참. 아, 미리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e마트에서 파는 넙치회 안주로 쐬주 한 병 까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은 취중 독후감을 써야겠다. 웬만하면 안 쓰고 그냥 자빠져 자려고 했는데, 자꾸 독후감 쓰는 걸 미루면 나중에 코피 나는 걸 잘 알아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쓸 수밖에. 이까짓 것이 뭐라고 책 읽었으면 그만이지 죽어라 독후감을 쓰고 염병을 하는지 나도 참 팔자소관인 거 안다, 알아. 그러니 뭐라 하지 마시라.

  탕푸루이는 국립 중칭中正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푸젠輔仁대학 재정경제법학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2010년에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법학과는 관계없이 학부 2학년 때 영상창작에 뜻을 두어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 지원했지만 장렬하게 물을 먹고, 자신으로서는 제2 지망이랄 수 있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이니 적어도 소부르주아 집안의 자제였던 것 같다. 완전히 짐작이다. 보통 집안 아이들은 쉽게 선택하기 힘든 과정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 것뿐이다.

  5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다가 (갑자기 미쳤는지, 갑자기는 아니겠지만) 타이완 정부 장학금으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들어가 영화연출로 석사를 받고,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 독후감을 쓰는 <바츠먼의 변호인>을 발표해 타이완의 문학상을 쓸어 담았다. 그러니 타이완 예술계의 기린아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바츠먼의 변호인>은 크게 봐서 ①타이완 사회에서의 약자 계급 차별과 ②사형제도 폐지/유지에 관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1911년에 중화민국을 수립한 장개석 정권은 40년대 완전히 폭망해 그때까지 자기들이 수집한 중국의 온갖 문화재를 배에 싣고 타이완으로 후퇴했다. 이때 본토에서 섬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족漢族이었다. 이들은 타이완의 선주민들을 변두리로 쫓아내고 섬에 정착한다. 이 과정에, 타이완을 하나의 독립한 국가로 본다면, 이주해 온 한족과 나라 안 다수를 차지하는 상대적 소수인 선주민 사이에 갑과 을, 우량과 불량 비슷한 계급의 차별이 발생하는데, 한족의 정착 초기에 다수의 선주민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족들이 그렇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었고, 선주민들의 앙가슴에는 못이 박혀도 보통 깊게 박힌 게 아니었겠지? 그런데 이런 게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조금씩이라도 해소가 되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아예 사용하는 언어까지 달랐던 이민족을, 한족은 자신들도 본토에서 쫓겨온 주제에, 타이완 경제의 3D 산업을 담당할 천민 취급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위 환기. 그렇다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보니까 그러지 않았나 싶은 거다.)


  타이완의 제일 북쪽 꼭대기에 있는 지룽基隆시. 나 대학 졸업하고 초년 봉급쟁이 할 때 수입import구매 담당이었는데 당시 타이완의 무역항 가운데 하나가 지룽시였다. 물론 가오슝이 제일 큰 무역항이었지만 우리나라로 오는 배는 지룽, 키룽Keelung이라 했었고, 이곳이 더 유리해 잘 기억하고 있는 동네다. 아이고, 당시에 이과 출신이 무역한다고 신용장, 적하보험, 선하증권 이딴 거 열라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네. 공부 잘한다고 사수한테 귀염 좀 받았건만 다 옛 이야기다.

  이 지룽시가 1960년대 이전부터 근해어업, 원양어업 할 것 없이 타이완의 어업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나, 60년대 들어 세계 3위권의 수산업으로 명성을 떨칠 즈음해서 갑자기 닥친 문제가 선원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거였다. 그리하여 타이완 정부는 주로 북부지역인 화둥華東 지역의 선주민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했던 아미족族 사람들을 데려와 어선의 어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시간 노동에 낮은 임금이었겠지. 안전에 관한 의식이 없던 때이니까 작업중 사고는 선주 측에서 나 몰라라 했을 것이고. 당시 3세계의 크지 않은 기업체 생각하면 아주 딱일 듯하다.

  이 가운데 1971년에 화롄현 위라진鎭에서 아들 하나 들쳐 업은 아내와 함께 지룽에 도착한 젊은 가장이 있었으니 이름이 ‘퉁서우중’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때부터 11년이 흐른 1982년 9월 18일. 퉁서우중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피 묻은 칼을 옆구리에 차고 늦은 밤에, 폐선박의 목재를 써서 지은 21평 건물에 열네 명이 사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얼마 전에 어부 일을 하다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은 사촌동생의 뒷일을 논의하다가 열을 받아 술을 과하게 마셨고, 도무지 화를 다스리지 못하여 수박 써는 칼을 품고 선박회사에 갔다가, 때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는 회계부장의 가슴과 목을 무지막지한 칼로 썩, 베어 버렸다. 선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회계부장의 뒤를 쫓아 나오던 다른 한 사람도 퉁서우중의 눈에 띄자 마자 역시 가슴과 목을 스윽, 그어버렸던 거였다. 목과 가슴을 베었으니 피가 보통 튀었겠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저승야차의 모습을 하고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오지는 않고 벽에 철퍼덕 기대 앉았는데, 이때 아들 퉁바오쥐는 난생 처음 피냄새를 원 없이 맡을 수 있었으며, 아이의 인생에서 범죄란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되지만, 퉁바오쥐는 소외당하고 핍박 받으며 온갖 사고에 노출되었으면서도 전혀 보상도 받지 못하는 아미족의 일원으로써 아버지 퉁서우중을 한 명의 영웅 비슷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는데, 이건 아들 퉁바오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시 바츠먼 부락에 살던 아미족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여겼던 모양이다.

  퉁서우중이 날 선 수박 써는 칼을 휘둘렀음에도 칼에 베인 선박회사 회계부장과 다른 한 명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보전해 퉁선생은 살인이 아니고 살인미수 죄를 적용받아 최종 10년 징역형을 받고 출소했다. 당시 판사는 술에 취하여 심신미약 상태였고, 산지부락 출신 선주민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야만스러운데 거기다가 친족의 사고로 충격을 받아 저지른 사고여서 형량을 줄였다고 판결했다. 즉 산골 출신 선주민, 쉽게 말해 인디언이라서 천성이 무식하고 험해 그 거친 기질을 감안해 좀 봐줬다는 얘기다.

  퉁서우중의 형기 중, 이제 살림을 꾸려야 하는 아내 마제는 애초에 건강하지 않은 체질이었음에도 먹어야 사니까 새우가공공장에 들어가 새우 껍데기 까는 일을 했다. 1982년 혹은 83년임에도 타이완에서는 붉은 고무장갑이 없었는지 직원들이 맨손으로 껍데기를 깠는데, 건강 체질이 아닌, 즉 체내 저항력이 부족한 마제는 조직염과 패혈증에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삶을 접고 만다. 이제 식구 중에 하나 남은 건 아들 퉁바오쥐.


  삶이 자신을 버리는 거 같으면 오히려 독해진다. 퉁바오쥐는 스스로 동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미족 커뮤니티의 보살핌 속에 어떻게 생활을 해가면서도 시간만 나면 동네 성당 창고에 몰래 들어가 공부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게 이 지긋지긋한 바츠먼 부락을 뜰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아는 바에야. 반드시 이곳을 뜨고 말 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근데 그게 쉽게 되는 거야? 웃기지? 하지만 퉁바오쥐는 정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퉁바오쥐가 아무리 열라 공부했다 하지만 타이완 부모 역시 자식 교육에 관한 한 우리나라 부모한테 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1도 없는 족속이라 쉽게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최고의 대학은 아니고 서열 10위 정도 하는 학교의 법학과에 “원주민 특별 전형”으로 입학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놀라운 순발력과 법학 지식으로 타이완 법대생 가운데 이름을 떨쳤는데, 이때 알게 된 사람이 천칭쉐. 명성 드높은 고관 집안의 딸이자 훗날 타이완에서의 사형 철폐를 끝까지 주장하는 법무부 장관이 될 인물이었다. 퉁바오쥐는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페이 법원의 법정 변호사로 일하면서 다시 천칭쉐를 만나게 된다.

  두 명의 청춘이 20년이 흘러 40대가 되어 법정변호사-법무부장관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타이완의 산골 부락민 아미족이 아니라, 아미족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어부일을 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에서 해외취업을 온 젊은 청년 압둘아들이 자기가 일한 배의 선장이자 퉁바오쥐의 어릴 적 친구 정펑췬의 집에 찾아가 정펑췬과 그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두 살도 되지 않은 딸까지 욕실에서 물에 빠뜨려 질식시켜 죽인 사건 때문이었다.

  뭔가 말이 되지? 40년 전 아미족 선원 퉁서우중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압둘아들의 살인사건. 퉁서우중은 살인미수라 10년형을 받았지만 압둘아들은 1심에서 이제 두 살박이 유아를 포함한 세 명을 살인한 죄과로 사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법정 변호인 퉁바오쥔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사형만은 집행하지 않고 싶어하는 사형폐지론자 법무부 장관이자, 젊은 시절 퉁바오쥔의 맞수 천칭쉐. 지금은 사형 폐지 또는 감형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게 된. 그럴 듯하지?

  작품을 쓴 탕푸루이를 높게 평가하는 건, 결국은 악당 그 자체인 천칭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 말할 수는 없겠지? 결국 다 그렇게 사는 거다, 하고 끝맺는 탕푸루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아쉬운 건 (할리우드 식으로)꼭 유머 코드를 삽입해야 한다는 강박이 좀 있는 것 같았다는 거. 그렇다고 작가한테 이메일까지 보낼 정성은 없고 말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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