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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진은 1980년에 나서 인하대 수학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수학 말고도 여러 관련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졸업한 후에는 IT 소설 편집, 프로그래밍 등의 일을 했고, 현재 본업은 공무원이라는데 주민센터에서 대민지원을 하는 공무원 말고 IT 관련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뒤져 나온 것이니 해당 정보를 쓴 시기에 그랬다는 거고, 아직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는 순서대로 만화가, 작가라고 했고, 중요한 작품으로 <월하의 동사무소>를 들었다. <월하의 공동묘지> 말고 <월하의 동사무소>.
나는 전혜진이라는 이름이 입에 딱 붙어서, 전에 제법 읽은 작가인 줄 알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에 아무리 지난 독후감을 찾아보고, 메모장까지 뒤져봐도 전혜진이라는 이름이 없다. 즉, 이 책이 처음 읽는 전혜진이라는 얘긴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꼬, 구글 검색을 하자마자 단박에 알아냈다. 아하, 내가 아는 전혜진은 작가 전혜진이 아니라 연기자 전혜진이었구나.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는 여러 번 얘기했듯이 절대 내돈내산 안 하고, 대신 도서관에서 눈에 띄면, 굳이 이 시리즈를 독파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눈에 띄면, 단숨에 읽기 수월하다는 이유로 얼른 주워드는 시리즈이다. 당연히 좋은 작품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서 소위 복불복이다. 예전엔 ‘복불복’을 ‘복골복’이라 했었는데 아마 강호동, 이승기 나오는 TV 오락프로 <1박2일> 이후 ‘복불복’으로 고정된 거 같다. 그럼 이 책은 복일까, 불복일까? 내 취향엔 불복.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가정. “가장 불행한”이란 말이 적당하지는 않지만, 가장 불행한 가정 가운데 한 가정이라고 하면 비슷한 수준의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아직 살아 있는 딸이 주인공이다.
지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복종적인 어머니 사이의 딸 신은정. 41세. 크지 않은 회사의 총무업무를 총괄하는 차장 직급의 회사원. 그러나 어려서부터 폭력적이고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긴 아버지 덕분에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하면서도 어머니가 별의 별 일을 다 해 돈을 가져오면 그걸 홀딱 가져다 써버리는 것도 모자라, 손버릇이 지극히 나빠 은정이한테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안 그랬는데 자기 아내는 하구 한 날 복날 개 패듯이 두드려 패던 인간. 수없이 말했듯 우리나라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아버지하고 어쩌면 같아도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꼬?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엄마가 돈을 꿍쳐, 아버지가 벌어온 돈을 따로 모아놓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번 돈의 일부를 조금씩 모아 웬만큼 되었을 때, 집에 두었다가 아버지 눈에 띄었다면 그날로 없어질 것이 뻔하니, 부산 사는 듬직한 오라버니한테 맡겨, 은정이 대학 갈 때 학비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엄마는 드런 세상 떠서 갈 길 갔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은정이한테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얘, 배고프다. 얼른 밥 차려라.”
이랬던 인간이다. 그리고 몇 년 흘러, 은정이가 대구 살았던 거 같은데, 아버지 꼴이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죽자사자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 합격증을 보여주니까, 웃기고 있네, 해버렸다. 그리하여 은정이는 그동안 숨기고 있던 자기 대학 학비를 외삼촌이 가지고 있다니까, 아버지는 갑자기 눈알을 굴리면서 광채를 뿔뿔 날리더니 네 에미 그 도둑년이 내 돈 훔쳐서 친정집에 보낸 거라고, 얼른 가서 가져와야겠다고 기가 나 악을 써댔단다. 그래서 거의 처음으로 은정이가 바득바득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우기니까, 부엌에 가서 칼을 가져오더니, 설마 자기 진짜 딸한테 겁이나 주려고 그랬겠지, 은정은 이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버지 새끼는 부엌칼을 두 번 휘둘렀고, 처음 그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눈을 피해 광대 쪽의 살점을 써억, 베어 버렸다. 곧이은 칼부림은 휘둘러 생긴 열상이 아니라 칼에 찔려 생긴 창상/자상이었는데, 은정의 몸 어딘고 하니,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책에 나오지만 벌써 잊어서 유감으로, 가슴 한 복판을 나름대로 푹, 찔렀으나 심장과 폐와 기타 중요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리 잡은 갈비뼈에 탁 걸려 그리 넓지 않게 피부만 쪽 찢어지는 수준이었다.
한 순간에 눈이 돌아 친딸을 죽여버리려고 그런 거다. 부엌칼로 갈비뼈도 부러뜨리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완력만 소유한 비리비리한 남자, 아빠 새끼한테 도망쳐 마음 좋은 외삼촌한테 의지해 서울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건만, 이 아빠 새끼는 기숙사에 가서 난동 비슷하게 부리려다 사감과 경비한테 쫓겨나고, 과 사무실에 가서 난리 치다가 역시 관계자와 경비한테 쫓겨났다. 그래도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은정의 삶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학교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사글세 주인집에 가서 벌써 죽은 은정이 엄마가 오늘낼 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아야 하니 보증금의 반만 빼달라고 구라를 쳐 받아가는 등, 막강, 최강의 악마를 닮은 아버지였다.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듯 소설에서는 선하고 아량 넓고 기타 등등 그럴듯한 아버지 보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들다니까. 그런 아버지는 소설 말고 시에서나 가끔 꼬라지가 보이긴 한다.
근데 전혜진의 단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면>에서는 나이든 남자가 하나 더 등장한다. 은정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새롭게 낙하산 타고 떨어진 상무새끼. 온갖 꼰대질을 해, 41세를 먹은 현재까지 비혼을 유지하고 있는 은정에게 자기 친구의 돌싱 조카하고 소개팅을 하라고 아우성치는 갑질 마왕.
전혜진의 특징은, 이 와중에 놀랍게도 악역을 맡은 아줌마도 한 명 등장한다는 거. 은정이 503호 사는데, 502호에는 레즈비언 커플이 산다. 두 집 여자들이 다 지극히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터라 그저 눈으로만 인사 정도 하고 지나던 사이였다가, 회식날 늦게 귀가하는데 502호 현관을 한 아줌마가 발로 차고, 문 열라고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고, 두드리고, 별 난리를 죽여서 현관문이 다 우그러져 아예 교체를 해야 할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힘도 좋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는 집주인 지수 말고 동거인 혜나의 엄마가 쳐들어와 지수더러 네가 내 딸을 꼬드겨 신세 망쳐 놓았다고 바락바락 떠드는 장면.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딸을 데려가려면 키운 값 4억원을 달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전혜진의 적enemy은 나이든 모든 남자와 나이든 약간의 여자다. 엄마쪽 사람들은 다 선한 인간이고 아빠쪽 인간들은 악당들만 모여 있어서 다 빵에 가 있는지 아빠 말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상무로 대표하는 나이든 상사 새끼들은 뭐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등, 어려운 말로 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나이든 남자 새끼들 모두, 나이든 여자 년들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려 하고 선한 젊은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착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한다.
그것 참. 나이 처먹은 나쁜 새끼들하고 나이든 나쁜 년들이 그렇게 많았구나!
이 독후감을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 10월 들어 첫날 업로드 할 것 같은데, 첫 리뷰부터 우울한 이야기를 올리게 되어 무진장 유감이다. 새끼들이 삼십, 사십대가 되도록 끝없이 삶에 참견하며, 강요하고, 부모의 권리에 악착 같은 늙은 인간들에 대한 한 바탕 욕설. 이게 이 작품의 주제로 읽힌다.
그럼 다음 번엔, 삼십, 사십대가 되어도 드러운 부모로부터, 죽어 마땅한 개 같은 부모한테 독립하지 못하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좁은 공간에서 스스로 이탈하려 하지 않는 한국형 히키코모리와 그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일탈, 범죄, 부모를 향한 폭력 같은 것을 탐구해보는 것이 어떨까? 일본 젊은 작가들은 이런 현상에 관해 탐구를 꽤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어째 보기 드문 거 같아 제안해 보는 거다. 물론 아주아주 소수, 지극히 적은 소수의 젊은이겠지. 그래도 개 같은 아빠 새끼들, 개 같은 엄마 년들 보다 많을까, 적을까? 누가누가 더 많을까? 그거 은근히 궁금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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