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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 6,300원 (10%350)
  • 2006-12-04
  • :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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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근(馬根)



  말의 남근?

  법명의 내력이야 알 수 없어도

  스님의 민머리를 뵐 때마다

  참으로 불경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부도를 바라보며

  남근을 떠올렸던

  천진한 노(老)시인의 푸른 눈빛이 생각나네


  장엄하나 벙어리인 책들이

  성처럼 쌓여 있는

  오후의 도서관


  용마(龍馬)도 천마(天馬)도 있다지만

  그들의 높은 날개보다

  오늘은

  본 적 없는

  말의 뿌리를 잡아 보고 싶은 거네

  그 거대한 근

  온몸으로 받아들여

  반쪽 아닌 온통으로

  개안(開眼)하고 싶은 거네

  하나 되고 싶은 거네   (전문. p.13~14)



  하, 이제 큰일났다. 강기원, 이 57년 닭띠 여사님 때문에 큰일났다. 시를 읽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읽었으니 앞으로 산에 들어 내가 좋아하는 서산 개심사나 안성 청룡사에 갈 때마다 혹시 박박 깎은 중대가리 보면, 여태까지는 그럴 때마다 저 대가리에 포마드 바를 일이 혹시 있을까,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젠 강기원의 이 시 때문에, 거참, 중대가리 볼 때마다 마근, 말자지가 생각나지 않겠느냐 하는 거. 가뜩이나 말, 하면 생각나는 나랏말씀이 ‘말궁뎅이’ 아니면 ‘말자지’라서 이제 중대가리 볼 때마다 수말의 생식기, 그게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가정하에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인데, 생식기 가운데서도 껍데기 없는 대가리, 절 근처에 세운 부도의 뚜껑하고 영락없이 닮은 그 대가리를 떠올리지 않기도 힘들게 생겼다. 혹시 강기원은 수컷 인간의 생식기 대가리를 일컫는 말, ‘거북이 대가리’ 귀두龜頭를 앞으로 ‘중 대가리’ 승두僧頭라고 부르자 주장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근데 시인은 “거대한 근”, 이이가 마침맞게 받은 김수영 문학상에 이름을 빌려준 김수영 시인의 시집 문패처럼 “거대한 뿌리”를 본 적은 없지만 잡아보고 싶다는 거다. 근데 정말로 콱 잡았다. 김수영 문학상 받았으면 그걸로 됐다. 이제 시인이라면 다 받고 싶어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으니 온통으로 개안한 셈 치면 안 될까? 그게, 말의 생식기 뿌리가 워낙 굵직해서 한 손으로 움켜 쥘 수는 없을 터, 두 손으로 꽉 잡아야 놓치지 않을 거야. 하여간 이 시를 안 읽었으면 모를까, 읽었으니 앞으로 우짜냐?


  《바다로 가득 찬 책》이 두번째 시집으로 알고 있다. 전에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을 읽었는데, 그때 처음 읽은 강기원의 에로티시즘이 딱 내 수준에 맞았다. 그래서 꼭 다시 읽어볼 시인으로 꼽고 있었다가 언제나 말썽인 게으름 때문에 차일피일하다 결국 고른 책이 《보고 싶은 오빠》 진주 출신 시인의 시집이었다. 이거 참. 그이 시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던데 말씀이야.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지. 그래 이번에는 도서관 개가실 딱 들어가는 순간부터 오늘은 얄짤없이 강기원의 시집을 고르는 거야, 마음먹고 곧바로 시집 서가로 직진해 집어 들고 나온 거였다.

  강기원은, 아닐지 모르는데 전적으로 《바다로 가득 찬 책》에 실린 시를 읽고 추리해보면 첫번째 시집과 이 시집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궁적출을 해 시인 왈 돌계집, 그러니까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석녀石女가 되었다. 개인사는 그냥 넘어가자. 세상에 개인사 없는 개인은 하나도 없으니. 그래서 이이의 에로티시즘에 관해 말을 조금 더 보태, 앞의 시 <마근(馬根)> 바로 앞에 실린 시를 인용한다.



  위대한 암컷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


  살아 있는 침묵

  하늘을 낳고 별을 낳고 금을 낳는

  신화였으므로

  범람하는 강이며 넘치지 않는 바다

  빛 없이도 당당한 다산성이었으므로

  바람의 발원지

  바람을 재우는 골짜기

  제왕도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무자비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요람이며 무덤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으므로

  만물을 삼키고 뱉어 내는 소용돌이의 블랙홀

  곡신(谷神), 위대한 암컷이여


  여전히 그녀는 명소다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으나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은밀한 문   (전문. p.12)



  이게 시집의 앞에서 두번째 실린 시다. 그래서 처음에 읽을 때는 이 시 역시 강기원 표 에로티시즘 비슷하게 읽었다가, 저 뒤로 가서 누군가의, 아마 시인 본인의 경험인 듯한 자궁적출과 ‘돌계집’의 장면을 읽고 난 다음에, 혹시 이 시도 그것과 연결하여 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연히 오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시라. 그녀는 신화’였고’ 다산성’이었으며’ 무자비한 아름다움, 요람이며 무덤, 치유의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었다.’ 즉 지금은 아니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 가서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명소”임과 동시에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 은밀한 문”임을 주장한다. 지금은 아니고 비록 과거에 그랬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어도 밝혀내지 못한 “은밀한 문”으로 존재하는 “위대한 암컷” 여성이다.

  어떠셔? 재밌지? 이게 시 읽는 재미다. 시인이 어떤 것을 주장하기 위해 시를 썼건, 하여간 꿈보다 해몽이라고 시를 해석하는 독자가 대빵인 거. 따라서 <위대한 암컷>을 읽은 내 소감이 정답이라고 조금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시라.

  아무리 그래도 강기원은 역시 에로틱한 시가 최고다. 예를 들어보라고? 좋다.


  복숭아


  사랑은…… 그러니까 과일 같은 것 사과 멜론 수박 배 감…… 다 아니고 예민한 복숭아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하나가 되었을 땐 뇌수마저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 가는 것 사랑한다 속삭이며 서로의 살점 뭉텅뭉텅 베어 먹는 것 골즙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 그래,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 가는 것…… 썩어갈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전문. p.15)


사소한 유감은 마지막 말,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족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건데, 뭐 독자가 그렇게 읽었다는 거고, 이렇게 쓰는 거야 엄연히 시인의 권리이니 불만은 없다. 그렇다는 것이지 뭐. 사소한 유감에도 불구하고 이 시 정말 괜찮다. 이은상의 시조 <사랑>하고 비슷한 거 같지 않나?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마소 /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부분)


  이런 예스런 느낌의 현대적, 강기원식 발언. 아오, 말한 것처럼 저 사족 비슷한 느낌만 없었어도 이거 콱 외워버리고 말았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말한 에로틱한 시만 있는 것도 아니다. 1980년대 중앙일보던가 마구 헷갈리는데, 신춘문예에 <멸치>라는 시가 당선된 적이 있다. 정초에 <멸치>를 읽으면서 하여간 시인이란 참 특별한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다중적인 필터로 보는 능력. 강기원도 주변의 아무렇지도 않은 사물을 보고 이런 노래를 지었다.



  고무장갑



  너는

  파충류의 영(靈)을 가졌다

  탈피 후에도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네 속을 드나든다

  불륜은 용감한 법

  너와 만날 때

  나는 가장 뻔뻔해져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욕실이든 주방이든

  이목구비 지워진 얼굴처럼

  지문 없는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가면의 시간들


  백주에도

  붉디붉은 손이다, 욕망이다

  너는   (전문.  p.65)



  이쯤 되면 이 분홍색, 아니면 붉은색 고무장갑이 주방용, 욕실용인지, 분홍색 아니면 붉은색 콘돔인지 헛갈릴 정도지만 그냥 주방용, 욕실용 일반 고무장갑으로 생각하고, 이걸 하루에도 수십번씩 착용하는 시인, 주부, 아내, 누군가의 딸, (2006년에 만 49세니까)어쩌면 할머니 또는 외할머니, 특히 강기원이면 아주 합당한 시.

  나는 가면 갈수록 이 시인이 좋아진다.

  아까, 이 독후감 쓰는 중간에 잠깐 검색해서 이제는 문학동네에서 다시 찍은 이이의 첫번째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를 희망도서 신청했다. 대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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