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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 브루노 야시엔스키
  • 18,900원 (10%1,050)
  • 2025-05-26
  •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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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미래주의 문학의 기수.”

  이 말 한 마디 딱 듣고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1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유대계 작가.

  1885년생 스타니슬라프 비트키예비치. 1892년생 브루노 슐츠, 그리고 1904년생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 세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 작가를 읽으면서 1920년대와 30년대에 폴란드 문학판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냐고 말한 적 있다. 이 절묘한 유대인 트라이앵글 사이에 1901년생 브루노 야시엔스키라는 작가가 소위 “미래주의 문학의 기수”라는 기치를 들고 나타났으니 어떻게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내게 비트키예비치를 읽는 즐거운 고통을 선물해준 역자 정보라가 “옮긴이의 말” 첫 마디에 “브루노 야시엔스키(1901~1938?)는 진정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역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야시엔스키의 문학을 우리나라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역사적, 아니, 오버하지 말고, 문학적 소명을 갖고 번역에 임했다, 이렇게 오해해도 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브루노 야시엔스키는 1901년 폴란드 클리몬투프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계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가족이 러시아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전쟁은 더 치열한 국면으로 번졌다가 자동화기, 즉 기관총의 발달로 “전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 대신 지루한 참호전 양상을 띄자, 삼국동맹측은 소위 봉인 열차에 블라디미르 레닌을 태워 스위스 취리히에서 독일을 관통해 북해를 건넌 다음 다시 스웨덴과 핀란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낸다. 삼국협상 측의 하나인 러시아로 하여금 전쟁에서 발을 빼게 만들려 했던 것이고 어쨌든 책략은 성공했다.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 그야말로 어린애 팔목 비트는 격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거덜내고 혁명을 완수해 소비에트 연방을 구축하니, 이걸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본 16세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소년 브루노는 성장해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글쓰기를 실천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 그리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후 1918년에 다시 폴란드로 돌아갔고, 1929년에 소련 레닌그라드로 망명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스탈린 체제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야시엔스키는 1938년에 소비에트 권력에 의하여 “면회 없는 10년 수용소 형” 즉 사형 판결을 받고 모스크바 부티르카 교도소에서 처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시신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미 할 말은 다 한 기분.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주인공은 피에르.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였으며, 노동자’였다’는 말은 지금은 불경기 여파로 공장에서 해고당했다는 뜻이고, 자신에게 지급된 측미기, 즉 마이크로미터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측정기 값 40프랑을 제한 나머지 임금 또한 이미 가불해 썼기 때문에 완전한 거렁뱅이 신세로 처박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머니에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3수. 15상팀. 15/100프랑.

  피에르에게도 애인은 있었다. 자네트. 상점 점원이다. 모레가 성 카트린 축일인데, 이 상점에서는 점원들의 사기고양을 위해 매년 성 카트린 축일 날 밤마다 제법 큰 규모로 댄스 파티를 열어준다. 그래서 자네트는 며칠 전부터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며, 신발이며, 비단 스타킹 등속을 준비하느라 얼이 빠져 있었다. 미리 확 까놓고 얘기하자면, 자네트가 가을에 입을 옷 한 벌을 사주기 위해서 피에르의 월세 3개월치를 몽땅 가져다 바칠 만큼 피에르는 자네트한테 몰빵하고 있었던 반면, 자네트 입장에서 피에르는 자신한테 선물을 가져다 바치는 여러 남자 가운데 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인다.

  해고당했고,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는 자네트와 저녁식사, 영화 그리고 러브호텔 순례를 도느라 모든 현금자산이 15상팀밖에 남지 않은 피에르는 연인으로 오해하고 있는 여자의 집으로 향하지만 애초 가난한 피에르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자네트의 엄마는, 자네트가 며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현관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아버린다. 피에르는 벌써 3일을 굶었다. 그런데도 남의 집 담장을 넘지 않을 걸로 보아 착한 남자인 건 맞는 모양이다, 그렇지? 천만의 말씀.

  이어서 피에르가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몇 십 페이지 분량의 묘사가 이어진다. 문제는, 크누트 함순 선생의 <굶주림>에 필적할 노숙인 피에르의 험한 세상살이를, 브루노 야시엔스키 선생은 어이없게도 다분히 미래주의적인 화법으로 설명한다. 이런 식이다.


  “어둠이 내렸다. 불이 켜진 가로등은 밤의 먹물 같은 표면 위에 굵은 무채색 불꽃이 되어 그 밤 속에 녹아들지도 못하고 밤을 밝히지도 못한 채 구불구불한 거리에 폭포 같은 그림자만 드리우며 바닥 없는 깊은 어둠 속에 둥둥 뜬 환상적인 동물군이 되었다.” (p.18)


  파리 시내에 밤이 내리고 가로등 아래를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은 꺼칠한 얼굴과 차림의 피에르가 지나가는 걸 이렇게 그리고 있는데 이 정도면 치장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다. 은유와 직유 같은 수사법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이 문장이 또 이렇게 이어진다.


  “가파른 물가는 인광燐光을 내는 마법의 동굴 같은 보석가게 진열장으로 가득했고 벨벳 바위 어딘가에 조개에서 파낸 콩알만큼 커다람 처녀 진주가 잠들어 있었고―수직의 벽이 헛되이 어둠의 수면을 찾아 위로 위로 길게 솟아올랐다.” (p.18)


  이 장면만 그런 게 아니다. 1부가 끝날 때까지 전체적이고 총괄적으로 궁상스러운 가난의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풍성한 수사법을 총동원하여 화려하게 꾸미느라 여념이 없다. 짜증나게시리.

  하여간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이 피에르라는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말씀입니다, 비렁뱅이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프랑스, 하면 무지하게 유명한 연구기관이 하나 있으니 바로 파스퇴르 세균연구소, 여기서 잡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잡부 한 명이 필요해 피에르를 그 자리에 꽂아 넣어주는 선행을 베풀었건만, 가난과 불평등과 실연과 소외와 기타 등등 사회적 불만에 가득 했던 피에르가 겉으로 보기에는 매사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을 잘 하는 것 같았지만, 하루는 연구소에서 원래 있던 독성보다 월등하게 막강한 전염력을 갖게 배양한 특별 페스트 균이 담긴 시험관을 훔쳐, 파리의 상수도 원에다 살포해버렸던 거다. 나 혼자 죽기 서러우니 다들 한 번 죽어봐라, 하는 심정이었겠지.

  여기까지가 1부이고, 2부 들어가면 인류 역사상 구경해보지 못한 강력한 페스트 균이 전 파리 시내에 창궐해 숱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가고, 피에르의 싸가지없는 연인이었던 자네트 역시 길거리에 자빠져 죽음을 맞이하는데, 피에르가 달려들어 2부 초장에 꺼멓게 타버린 자네트의 입술에 미친듯이 입을 맞추면서 파리 시민들을 향해, 자신이 페스트 균을 퍼뜨렸노라고 웅변을 토함으로써 메인 스트리트의 만장하신 신사 숙녀의 발뒤꿈치에 짓이겨져 붉은 고깃덩이로 변하고 만다.

  프랑스 정부는 곧바로 긴급조치를 발령해 파리를 완전 봉쇄해 이제 무정부 상태에 접어든 파리에는 인종, 사상 등으로 갈린 작은 독립적 단위로 갈라지지만 궁극적으로, 다, 죽는다.


  인구 증발 사태? 걱정하지 마시라. 그동안 격리구역에서도 완벽하게 격리된 계층이 있었으니 그들은 벽을 부수고 나와 아무도 살지 않는 파리를 파리 역사상 제2의 코뮌,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다. 당연하잖아. 작가가 공산주의자 브루노 야시엔스키니까. 흠. 너무 자세하게 가르쳐드린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굳이 권할 만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라서. 야시엔스키가 침을 튀면서 설정한 유토피아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다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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