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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경세통언 1
  • 풍몽룡
  • 18,000원 (10%1,000)
  • 2024-10-31
  • :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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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명대 말기의 문사. 1574년에 큰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셋이 다 공부 좀 했는데, 둘째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었으면 해서 시험을 치루었으니, 지방 말단 공무원을 뽑는 시험에 합격, 생원이 된 때가 스물한 살. 생원은 붓 좀 만진다 하면 거의 다 되는 시험이었던 만큼 기껏해야 현 정도에서 말단으로 꼬물댈 수준이라, 합격하면 적어도 거인擧人이라 불리는 향시에 급제를 해야 했다. 풍몽룡이 살던 강소성 소주에서 향시를 보려면 남경, 옛시절 금릉이라 불렀고, 오나라 손권이 자리를 틀어쥐고 꿈쩍도 하지 않은 건업이라고도 했던 난징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몽룡이 청년기에 접어들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세가 갑자기 기울더니 당장 한 끼니 때우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고. 이런 시국이었으니 국영수 과외를 받기는커녕 난징까지 거마비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야 할 터인데 과거는 무슨. 그래도 1618년 그의 나이 마흔넷이나 되어서야 거인 한 번 해볼까 싶어 난징까지 가 향시를 쳤고, 어쩌면 당연하게, 미역국 사발을 들이켰다. 마흔넷이 될 동안 전설 속 강태공처럼 집안 기둥이 부러져나가는지도 모르쇠, 책만 읽은 건 아니고, 동네 꼬마들 주워 모아 월사금 제대로 받고 서당을 열어 가르치기도 하고, 책을 만들어 팔기도 해서 돈푼을 좀 모은 모양이다. 그것을 또 종자돈 삼아 1624년, 1627년, 즉 쉰 살, 쉰세 살에 또 굳이 소주에서 난징까지 가 미역국을 들이켰으니 미역국 세 그릇 거 참 비싸게 주고 먹었네. 밥이나 말아 자셨을꼬?

  이이가 향시에 붙었는지 여부를 내 검색 솜씨로는 찾을 수 없었다. 하여간 쉰일곱 살이던 1630년에 드디어 공생貢生이 되고, 다음해 고향 소주 서북쪽에 있는 단도현의 훈도 자리를 얻고 또 4년 후엔 수녕현의 부현령으로 승진해, 1638년 예순다섯 살에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한다. 그렇게 믿자. 그래야 속이 편하니.

  이이가 과거 준비를 하는 오랜 세월 동안 호구지책을 위하여 훈장을 업으로 하면서, 특히 이러저러한 책을 편집하면서 주로 잘 팔린 책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모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리하여 민간에 인기가 있을 민담, 야사, 남녀상열지사 등을 특히 신경 써서 수집하지 않았겠느냐 싶다. 풍몽룡이 그래도 수십년 간 과거를 준비한 문재가 있는 인물이다. 이이가 민담, 야담을 그냥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설, 그것도 정상급의 소설에서 보이는 것처럼 글 속에 적절한 사, 부, 절구 같은 시 또는 곤곡崑曲 비슷한 가락을 실어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만들었으니, 놀라지 마시라, 지금 읽어도 낯설거나 ‘매우 낡았다’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작품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풍몽룡의 흔히 《삼언》이라 칭하는 단편소설집은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 이렇게 각 마흔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3부작으로 엮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 아모르문디에서 각 부를 다시 세 권 세트로 만들어 출판했는데, 일단 어떤 류의 책인지 맛을 보기 위하여 《경세통언 1》 한 권만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 읽었다. 우선 《경세통언》을 세 권 다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읽은 《경세통언 1》이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주장하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그저 평범한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엮은 가벼운 대중 취향의 모음집이라고 폄훼할 이유도 없다. 그냥 이야기. 외팔이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속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깊은 문학적 함의가 있었나? 혹시 말이지, 세기에 세기를 걸쳐 생명을 이어오면서 그걸 읽은 독자들이 ‘자기들의 감상평을 스스로 절차탁마해’ 이슬방울이 모여 한강수가 되듯이 어느 시점부터 이 작품들 속에 “처음엔 있지도 않았던 갖가지 메타포”가 스르륵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워낙 위대한 작품들이니까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혹시, 혹시다 혹시.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경세통언》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프랑수아 라블뢰의 선지적 작품 <가르강튀아>는? 불문학 공부한 사람들은 시방 이 글을 읽으면서 《삼언》이 무엇이관대 감히 <가르강튀아>를 입끝에 올리고 있는 거디냐! 라고 침을 튈 수도 있겠다. 반면에 중문학 공부한 사람들은 그저 싱긋 웃으면서 나더러, 잘 하고 있어.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하고 있군. 독후감 다 쓰고 양장피 잡채에 공부가주나 한잔하자고 할 수도 있다. 뭐 세상 일이 다 그런 것이다.


  《경세열전》에서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것이 귀명창 이야기. 중국 민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가 유백아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 사람인데 벼슬은 초나라에서 위로 쪽 올라가면 나오는 기름진 평야지대에 자리한 진晉나라에서 했다. 당시에는 사람이 재주가 뛰어나기만 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서로 인재를 스카우트해서 나라 살림과 국방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다. 백아는 거문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사를 다스리는 이치 또한 막힌 곳이 없어 상대부의 벼슬까지 올랐다. 하루는 왕의 명을 받아 사신의 입장으로 초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왕 초나라에 가는 김에 오랜만에 고향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반가운 고향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푸니 어째 날자는 그렇게 휙휙 날아가는지. 그렇게 한 판 잘 때려먹고 이제 진나라로 돌아가려 배에 올랐다가, 하루는 뭍에 배를 대고 거문고를 튕겼겠다? 근데 멀리서 거문고 소리를 듣고 곡과 내용과 음율을 전부 아는 나무꾼을 만났으니 이이의 이름이 종자기.

  백아와 종자기. 거문고 명인 백아와 연주의 진미를 알아들을 줄 아는 귀명창 종자기. 이 커플의 이야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전에서 숱하게 나와 더 말을 보태야 괜히 허기질 뿐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7번 위옌커 저 《중국신화전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78번 관한경 외 《원잡극선》, 그리고 심지어 사마천의 <사기 서>에 부록으로 붙은 저 유명한 문文 <보경소임서>에서도 백아와 종자기의 예를 들었다. 우리나라 고전에서도 백아와 종자기의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대개 금string과 관객의 관계라면 우리나라는 주로 소리꾼과 귀명창의 관계인 것이 색다르다. 주로 조선말 판소리 명창과 명창의 진가를 알아듣는 소수의 음감 소지자. 소리 한 마당에 땅뙈기 한 마지기를 덥썩 안겨준 그리 크지 않은 지주. 뭐 그런 거. 아마도 신재효 선생도 이 부류가 아니었는지 싶기도 하고.

  나는 이 책에서 제일 앞, 1번으로 백아와 종자기 이야기 나오는 걸 보고, 중국어 발음은 사성으로 되어 있어 음악을 문장으로 쓰는 데 세상에서 가장 최적화된 언어가 아닐까 싶어, 과연 거문고 소리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무지하게 궁금했는데, 역시 음악을 문자로 표현하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백아의 절륜한 거문고 연주를 듣는 종자기의 감상/소감은 이렇다.

  “아름답도다, 빼어나도다! 나리의 뜻이 높은 산봉우리에 있군요.”

  또는

  “아름답도다, 호호탕탕하도다! 나리의 뜻이 흐르는 강물에 있군요.”

  역시 음악을 문자로 표현하는 건 지난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거문고 연주가 왜 빼어나고 호호탕탕한지 당대의 이야기꾼 풍몽룡도 설명해줄 수 없었던 거다. 이후 천년이 지나도 그걸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쓴 글을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당연히 중국의 최고 음악가와 귀명창 커플은 백아와 종자기이지만 이에 버금가는 연주가와 귀명창이 아직 진나라가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루기 바로 전에 연나라에 있었으니 고점리高漸離와 형가荊軻. 고점리는 거문고가 아니라 거문고보다 조금 작은 금인 축을 연주하는 악사였고, 형가는 고점리 연주의 진가를 알아주는 당대의 건달이었다. 세월이 험해지자 연나라 태자 단이 진晉의 왕실 인질 동기동창이자 훗날 진秦나라 시황이 될 영정을 죽여달라고 형가에게 부탁을 했고, 형가는

  風蕭蕭兮易水寒   바람 소소하고 역수는 찬데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노래 한 방 때리고 진나라로 가 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해 자기가 죽고 만다.

  귀명창이 사라지니 축의 거장이 살아남아 연주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리오. 때마침 진의 조정에서 고점리 축 연주의 명성을 들어 그를 초청했으니, 고점리마저 그의 벗이자 귀명창이자 정의의 암살범인 형가의 뒤를 따라 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형가를 좇아 사지가 결딴나 세상 하직하고 만다.

  이 이야기 역시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자객열전>에 쓰여 있다. 글쎄, 사마천의 <사기> 읽어두시라니까. 두고두고 할 말이 많아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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