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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설야雪夜. 정말 이 한자가 맞다. 눈 내리는 밤. 누가 이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나도 비슷한 이름의 여성을 한 명 안다. 안지야芝夜. 일제 시대에 한 부르주아의 혼외자로 태어나 한국전쟁 직후 수도 서울에서 고급 바의 여사장 ‘마담 빠타플라이’로 이름을 떨친 여성. 이장李章의 이복동생이자 연인. 실제 인물은 아니고 내 인생책 가운데 하나인 <원형의 전설: 圓形의 傳說> 여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인생책. 그러니 이 시집을 낸 시인 이설야가 어떤 시를 썼는 지 1도 몰랐어도 이름 하나만 가지고 내 관심을 팍, 끈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니, 너무 충분했다.
1968년 인천 동구 화평동 140번지에서 출생. 어려웠던 시절 중에서도 좀 더 어려웠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이웃들처럼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그 시절 이야기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것이 참. 초년 팔자에 겪었던 맵고 신 맛이 시적 경험이자 자산이 될 줄이야. 학력사항은 노출이 되어 있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대학의 문예창작과를 다니는 것이 꿈이었다고. 이때 지역 청년회 가운데 문예창작을 할 수 있는 단체에 가입해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나 훗날 시인의 소위 “민중시”에 영향을 주었다고 “오 마이 뉴스”와 10년 전에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후 풍물패와 인연을 맺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공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하여 방송통신대학과 인하대학 대학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수료했단다. 시를 쓰는데 그깟 가방끈이 뭐가 중요할까? 얼핏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따박따박 대학과정까지 마친 사람의 생각이고, 지상 최고 수준의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그렇지 못했던 사람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으니 조금도 까탈 잡지 말라. 그건 오직 그 사람의 선택에 달린 것이니.
이설야의 기억에 강렬하게 자리한 것이 지금은 없어진 인천 화평동의 수문통 시장. 그리고 시장 앞을 흐르던 개천. “똥바다”라고 불리던 곳. 시장과 주변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 그들이 만든 분뇨를 거의 그대로 이 개천에 내버려 “똥바다”라고 했으며, 여름에 장마가 지기라도 하면 진짜 똥무더기가 둥둥 떠 개천을 면한 집의 마당은 물론이고 마루와 방에까지 들어차기도 했던 곳. 가물 때면 높은 습도로 인해 지독한 냄새가 도무지 가실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간혹 똥 대신 탯줄이나 신생아가 시멘트 포장지에 둘둘 싸여 흘러 황해 바닷가로 흘러가던 똥바다.
하지만 이설야가 정말로 민중시를 쓰고자 했으면 좀 더 빨리 등단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가 첫번째 단독 시집 같은데 초판이 2016년이다. 이설야의 기억 속에 있는 1970년대 인천의 도시빈민촌은 이제 그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40년 전 겪은 가난과 소외가 이제는 더 이상 저항과 운동의 동력이 되지 않는 시절이 됐다. 당연히 시인도 이를 알아서 이설야는 그 시절 삶의 신산을 추동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을 노래하기만.
못, 자국
검버섯 같은 하늘이 점점 내려오는 저녁
한 여자가 꽃잎을 여기저기 붙이고 돌아다녔다
개흙이 훤한 똥바다에 삿대질하다가
수문동시장 다락방들을 지날 때면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다가
만화로다방 앞에 와서는 옷을 다 벗어버렸다
돈 벌러 중동 나간 남편이 죽었다 하기도 하고,
아이가 열병으로 죽었다 하기도 하고,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서야
여자의 마맛자국이 보였다
못 자국 같은 생(生)의 숨구멍들이 보였다
지금은 솔빛마을이 들어서고
도로 밑에 개흙, 죽은 물고기들,
수문통 다락방 젖은 나무들,
모두 묻혀버렸지만,
비석 같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마맛자국처럼 하늘에 구멍을 낸
달이 떠서 또
바다로 흘러가고 있지만, (전문. P.12~13)
이 시에서 보다시피 1970년대 인천 화평동 수문동 시장 근처, 시인의 시적 원형原形의 장소를 기억해 노래할 뿐 “오 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등장한 “민중시”다운 투쟁이나 저항의 근원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이설야의 시를 민중시 계열로 넣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시 서정시로 읽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설야에게 아버지라는 존재. 겨우 시집 한 권을 읽고 뭐라 하기 어렵지만 다양한 감회를 가진 모양이다. 저번에도 말한 적 있다. 소설,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 속 아버지는 주로 가정 폭력의 대마왕으로 주폭도 모자라 고기 안 먹겠다는 딸 입 속으로 억지로 탕수육 쑤셔 넣는 등의 상상불가의 기상천외한 개썅노무새끼들이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두꺼비가 한 마리 올라온 것처럼 울룩불룩하게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갖고 있다. 이설야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시인은 자기 아버지를 동인천 시장의 건달이었다고 한다. 건달이라서 집에 올 때마다 마치 사나운 말굽이 방 안을 휩쓸고 간 것 같기는 하더라도 그래도 길고 질겨 끊어내지 못하는 연이 있는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시인은 어떻게 아버지를 그렸을까? 이런 시만 읽어보자.
백마라사(白馬羅紗)
백마처럼 하얀 양복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가 손목에다 칭칭 감고 하던,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터지던 곳간.
거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화평동 집. (전문. p.40)
어려운 집안 사정을 나 몰라라 하면서 흰 양복을 입고 다닌 한량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구두도 백구두를 신고 다녔겠지? 그렇게 얌전하지도 않고, 가사에 보탬도 되지 않았던 아버지라서 엄마가 바느질 비슷한 일을 해 입에 풀칠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집에 오면 집엔 늘 밤 고양이 소리가 났다니 금슬은 좋았던개비여?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유난한 상실의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한탄이나 불만은 이이의 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오, 철없는 한량 아버지라니.
은하카바레
은하카바레 뒷문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나는 여인숙 난간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는 슬픔을 달래느라
카바레에다 밤을 억지로 구겨넣었던 것
거미줄로 목을 감은 전봇대 불빛을
모으느라 눈이 캄캄해지는 밤
아버지는 불빛을 여기저기 붙이고 있었다
그 불빛에 찔려 오랫동안 아무것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백구두 소리가 부엌문을 열면
내 몸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려 쏟아질 것만 같아
나는 해바라기 씨앗처럼 불어나는
새까만 음악 속으로 자꾸만 숨어 들어갔다
그 속에는 슬픔을 북북 찢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계단 한계단 내려가면 깊은 연못이
연못 속에는 나와 얼굴이 같은 소녀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전문. P.70)
거봐, 내가 틀림없이 백구두도 신고 다닐 거라 그랬지? 아버지가 잘 생겼던 모양이다. 카바레 출입을 했다니. 아, 오해하지 말자. 카바레 다닌다고 다 제비는 아닐 터. 춤이 좋고, 음악이 좋고, 어울림이 좋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도 지극히 정상이니까. 그런데 만날 카바레 같은 데만 다니느라 집에 들어올 때마다 면목이 없었던지 대문 또는 현관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엌문을 연다니 벌써 방안에서 말발굽 소리 내던 기백은 슬그머니 사라진 모양이다. 그려. 그저 수컷이라는 건 벌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부엌문이라도 감지덕지 슬그머니 스며들어야지 별거 있나 뭐. 그렇게 세월이 가고 늙는 것이지.
자꾸 아버지 타령만 하니까 별로 재미없다. 하나만 더 읽고 끝내자.
세월 가면 아버지도 간다. 가도 멀리 간다. 아주 간다. 하필이면
분홍 코끼리와 검은 나비들
철거를 기다리는 신혼집 다락방
검정 가방 안에 아버지 이름이 찍힌 내 청첩장
그 위에 아버지 조의금 봉투들 포개져 있다
조문하듯 엎드려 있는 봉투들
밤이 되면 나비가 되어
내 꿈속을 들락거린다
분홍 코끼리 어깨 위를 날아다닌다
분가루 날리는 새벽녘이면
아버지, 나비들과 함께 검정 가방 속으로 들어간다
잘못 꾼 꿈을 따라 코끼리 발자국이 이불 위를 지나간다
만신들의 몸인 집이 흔들린다
집인 몸들이 봉투 속으로 하나둘 들어간다
오래된 시간을 염하듯
내가 다락방을 봉하고 온 조문하던 지문들
매일 밤 검은 나비가 되어
이사 간 집 문고리에 앉아 열쇠를 만지작거린다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위를 날아다닌다 (전문. P.80~81)
이렇게 아버지도 가고, 시인의 화평동 시대도 가고, 이제 남은 건 오직 기억, 기억뿐. 시인은 옛 시절의 가난을 회상하고 노래한다. 가난과 궁핍과 핍진乏盡의 노래라 해서 민중시로 단정하지 말자. 그건 누군가의 가슴 아픈 추억일 수 있고, 유년의 마당일 수도 있으며, 어느 시인의 시적 재산일 수도 있음이라. 시인은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시로 쓸 때마다 왼쪽 가슴 한 쪽이 뭉텅 떨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라서.
(어느 시인인지 작가가 에세이에서 핍진이라는 말을 사용한 후, 글 폼나게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핍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乏盡과 逼眞은 뜻이 매우 다르다. 아주 조심해서 써야할 말이 요새 남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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