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치료탑 행성
  • 오에 겐자부로
  • 15,300원 (10%850)
  • 2018-05-21
  • : 180

.

  오에 겐자부로가 쓴 유일한 과학 픽션. 그러나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이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반핵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던 실천적 지식인. 아직까지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의한 피폭 경험을 가진 일본인의 후예로 핵과 방사능에 예민하고 강한 저항의식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이이의 미래관, 세계관도 핵과 방사능에 의한 비관적 시각으로 일관한다.

  <치료탑 행성>은 미래소설. 시간적 공간은 2040년 이후의 21세기. 애초 오에 겐자부로는 <치료탑>이라는 제목으로 약 3백쪽 분량의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곧이어 2부격인 <치료탑 행성>을 발표하여 전편 이야기를 결말 짓는다. 이후 <치료탑>을 1부, <치료탑 행성>을 2부로 두 권을 묶어 한 편의 장편소설로 합본, 1991년에 <치료탑 행성>이란 제목으로 출간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이 해 크리스마스 12월 25일에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핵무기 발사 권한 등 모든 권력을 양도함으로써 74년간 세계를 양분했던 한 축 소비에트는 거대한 막을 내린다. 동시에 냉전시대 역시 공식적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물론 당연히 이런 조짐은 몇 해 전부터 충분히 전망할 수 있었다. 이 책의 1부 <치료탑>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핵전쟁 위기상황은 사실상 사라졌다. 대신 1990년대 초 오에의 시각으로, 핵을 보유하지 않았던 북한이 아니라, 공식적인 핵보유국도 아니고 단 한 번도 실제 핵실험도 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란 등 중동 국가와, 비공식적인 핵보유국인 이스라엘 사이에 세계대전 수준은 아닐지언정 국지적으로 심각한 핵전쟁이 일어나고, 동시에 아프리카 등 거대국가가 아닌 중소 국가 사이에서도 작은 규모의 핵전쟁이 발발했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약 5년 전인 1986년에 당시 소련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발생했고, 20년 후인 2011년에 후쿠시마 원전에서 또다시 발생했듯이 세계 각국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사고가 발생,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능이 전세계를 오염시켜 지구는 극적인 식량고갈과 자원고갈의 기로에 서게 됐다. 체르노빌-후쿠시마 이렇게 25년 터울의 사고가 아니라 한 번에 폭발사고가 난 것으로 보아, 책에서는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 않지만 독자는 이런 다발성 폭발이 우연한 사고라기보다 국제적 테러 집단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범죄로 인식할 수도 있다. 설마 일본계 독일 작가 다와다 요코가 자기 책 <헌등사>에 쓴 것처럼 하필이면 고단위 폭탄을 잔뜩 싣고 날아가던 세계 각국의 전투기가 갑자기 오작동을 해 정확하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에 추락했다고 믿는 순진한 독자는 없거나, 거의 없거나, 있어도 별로 없겠지? 전 지구가 방사능 낙진의 두꺼운 침강에 의하여 거의 모든 것이 오염됐고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여태껏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암종이 발생하는 등 방사능 피폭에 의한 다양한 이색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체념, 방관의 기조가 덮쳐 후천성 면역결핍 신드롬, 에이즈가 무서운 기세로 팽창했다. 21세기 말 디스토피아의 도래.

  모든 인류는 절망했다. 못살아, 못살아, 더 이상은 못살아. 근데 못 살면 어쩔건데? 이제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과, 인간이 여태 만들어온 문화, 문명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공감했다. 그리하여 지구가 아닌 곳에 새로운 지구를 건설하기로 세계적 합의를 이루었으며, 당연히 새 지구에 전 지구인들을 다 싣고 갈 수는 없는 일이라 이 가운데 탁월한 자원을 선발해 태양계 외 항성계에 있는, 인간이 살기에 그나마 적합한 행성으로 떠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0년경 세계인구가 약 60억 정도로 아는데, 각지에서 터진 핵전쟁과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으로 10억 정도가 죽고 50억가량이 남았다. 이 가운데 딱 백만명을 선발, 지구가 가지고 있는, 이라기보다 지구에 남아 있는 거의 모든 자원을 투자해 대규모 탈출, 이른바 대탈출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떠났다. 하지만 10년 후, 이들은 그 먼 항성계의 행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하게 되었으니, 서기력 약 2040년 앞뒤, 이제야 소설은 그 막이 올라간다.


  이제 이 책의 1부 <치료탑>을 쓰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의 세계를 기억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의 자금과 군사력을 장악해서 세계경찰을 자임했던 미국. 이런 미국을 향해 일본의 거대 기업 소니Sony 주식회사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의 중의원이자 환경청 장관을 역임한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공전의 베스트셀러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출간했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극점에 달했던 시기. 6~7년 후에 우리나라가 그러했듯이 일본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니면 터뜨리면 안 될 샴페인 뚜껑을 비튼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세상에서 달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바로 옆 분단국가의 남쪽,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로부터 존중받던 일본의 작가라서 가능했겠지만, 백만명을 태우고 새로운 지구로 이주하는 범세계적 “스타십 공사公社”의 일본 지부가 프로젝트 비용의 약 1/3을 부담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당시 세계인구가 50억이라면, 백만명이라 해봤자 5천명 가운데 한 명을 골라 외계로 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5천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명을 선발하는 일일뿐인데, 세상의 다른 곳은 모르겠고, 일본인구가 1억이라면 2만명의 ‘선택받은 자’가 9,998만 명의 ‘잔류자’의 것인 자원과 향유해야 할 문명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좋다, 사회적 합의가 되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하나 더. 내가 5천명 가운데 4,999명 중의 한명이라고 해서, 누가 나한테 그리고 4,999명한테 “잔류자”를 넘어서 “낙오자”라고 칭하면 그걸 내버려 둬야 하나? 그리고, 5천명 중에서 탁월하고 탁월한 한 명이 사라진 사회가, 핵심 한 명이 빠진 빈 자리를 메꾸지 못한다고? 누가 그래? 만일 정말로 메꾸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다.

  이런 생각, 5천명 가운데 한명으로 뽑히지 못한 4,999명을 낙오자라고 칭하는 것도 모자라, 10년 만에 새로운 지구로의 이주에 실패하고 돌아온 탁월한 자들한테 다시 세상의 헤게모니를 고스란히, 그리고 기꺼이 떠넘기는, 혹은 두 손에 들고 가져다 바친다는 발상은 일본인 아니면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일본의 소설가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상황.

  일본은 우리나라 고려 시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거의 비슷한 무신정권을 세워, 고려의 무신정권이 약 백 년 가량 유지한 반면 일본의 막부는 19세기까지 유지한다. 이 바람에 보통의 일본인은 쇼군과 사무라이 계급 등 상위 계급에 거의 무조건적 충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사 여탈이 그들 손에 있었으니까. 일본인들이 유난히 친절한 것이, 진심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여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데 무려 5천명 가운데 제일 뛰어난 한명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인간들이 다시 돌아왔으니 속으로는 언짢았을지언정 그들이 다시 세상의 거의 모든 권력을 쥐는 것에는 저절로, 유전자적으로 동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 물론 너무 일반화했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오에의 <치료탑> 비슷하게 썼으면 아마 초장에 거덜이 났을 걸? 당신도 나하고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하게는 생각하리라 믿는다. 나도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오에 겐자부로가 지구에 잔류한 49억 9,900만 명의 인류한테 “낙오자” 운운할 때마다 열통이 터지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씨. 아직 스토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독후감 분량이 벌써 마감해야 할 지경까지 와버렸다.

  주인공 키다 리쓰코. 1인칭 소설이지만 독후감은 3인칭으로 쓰겠다.

  리쓰코의 큰 아버지 키다 시게 씨도 방사능 오염 때문인지 아닌지 나오지 않지만 작품을 시작하는 해, 스타십 공사의 우주선이 새로운 지구에서 다시 돌아온 해 봄의 끝무렵에 폐와 뇌로 전이된 암으로 사망했다. 과학자였으며 우주항해를 위해 스타십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일본 공사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가 “새로운 지구로”라는 슬로건으로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자 자신의 손으로 키운 스타십 공사에서 스스로 물러나와 “대출발” 이후 혼란기에 남은 인류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시스템을 고안하고 그것을 꾸준하게 현실에서 실행해온 인물이다. 그의 빈자리를 친동생 다카시가 물려받아 세계의 백만명 가운데 선정된 일본인 모두를 이끌고 스타십에 태워 새로운 지구로 떠났다. 정당한 선발인지 공사 사장의 입김인지 외아들 사쿠도 데리고. (‘사쿠’는 오에 겐자부로의 이과를 전공한 둘째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가장 현명하고 정의로운 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 시게 백부일 터. 그가 살아 생전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의식을 지닌 생물이 출현한 것은 실수였다.”

  이 대사를 읽고 나는 웃었다. 실수는 뭐. 인간이 지구를 망치기 시작한 건 기껏해야 6백년 정도의 시간밖에 안 된다. 앞으로 존속할 기간도 길어봤자, 아주 길어봤자 한 천년? 여태까지의 잘못을 심각하게 반성해서 지구 복원을 힘쓰더라도 원상복구한 지구에서도 끽 해봐야 3만년이다. 지구 나이가 40억살인데 그깟 3만6백년. 인간이 원자폭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수소폭탄 같은 생 난리를 친다 해도, 인간이 천년 후에 멸종한 다음에 원상복귀에 얼마나 걸릴 거 같은가? 아주 길어봤자 천만년? 지질학적, 우주공학적으로 천만년은 시간도 아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 그저 빨리 멸종만 하면 된다.


  스토리는 전부 생략해야겠다. 너무 길어진다. 그러니까 리쓰코가 주인공이고, 새로운 지구에서 헌 지구로 귀환하는 사람 가운데 공사 사장 다카시 백부의 아들, 즉 리쓰코의 사촌오빠 사쿠가 남자 주인공이라서 둘은 당연히 사랑을 하고, 사촌끼리 징그럽게 벌거벗고 잠도 자고, 리쓰코가 에이즈 검사를 한 후에 임신도 하고, 임신한 김에 결혼도 한다. 그러나 귀환자와 잔류자 사이의 결혼이 금지되어 리쓰고-사쿠 커플은 일종의 코뮌 형태의 농장에 숨어들어가고, 웃기게도 그곳에는 정신지체이지만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도 제법 낸 작곡가 오에 히카리가 또다시 등장하는데, 히카리 나이가 벌써 여든이니, 겐자부로의 맏아들이자 작곡가이며,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소설마다 등장하는 히카리가 1963년생. 이게 내가 연도를 2040년 이후라고 판단한 근거가 된다.

  사쿠는 다시 스타십 공사에 복귀해 우주로 나가,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의 교신을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 오에 겐자부로는 스스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영향을 받았다고 암시하고, 내가 읽기로는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작품 <노변의 피크닉>에서도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재미있다. 천생 문과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는 SF를 써도 여전히 악마같이 거만한 먹물의식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그래서 좋다.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서 읽으려면 헌책을 사거나 도서관에 가야 할 듯. 오에의 작품 가운데 인기가 별로 없는지 2018년 초판 1쇄 책임에도 도서관 책 치고 상태가 괜찮다. 재미있는 스토리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아쉽지만, 가끔은 아쉬운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