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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아돌프의 사랑
  • 뱅자맹 콩스탕
  • 9,900원 (10%550)
  • 2022-11-11
  • :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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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뱅자맹 콩스탕 드 레베크.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위스로 도망한 위그노 교도 드 레베크de Rebecque 가문의 자제. 당연히 귀족이며 엄마 배에서 나올 때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나왔다. 1767년생이니까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던 1789년에 생일이 아직 안 지나 스물한살. 열여섯 살 때 독일의 개신교대학에 다닐 때 유부녀와 불륜을 저질러 에든버러로 유학한 전력이 있으며 이때 버릇은 나이 들어 연장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쉼 없었다. 다시는 콩스탕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으니 이이의 바람기에 대해서 더 알려고 하지 마시라. 평생 딱 한 편의 소설을 썼다. 그게 바로 <아돌프의 사랑>이며 주로 에세이를 많이 쓴 정치가. 1794년 로베스피에르 사후 (비겁하게) 공포정치가 종식된 다음부터 정치판에 뛰어들어 나폴레옹하고 의견이 갈릴 시기도 있었지만 나중에 보나파르트가 워털루 전투에서 쌍코피 흘릴 때까지 지속한 백일천하 당시 하필이면 나폴레옹과 죽이 맞았던 인물. 이때도 콩스탕의 변신은 눈부셨다. 나폴레옹이 엘베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를 탄핵하는 글을 발표하더니 파리로 잠입해 정권을 다시 잡는 순식간에 안면을 바꿔 전심전력을 다해 나폴레옹을 보위하기로 약속했단다. 근데 (내 생각에) 웃기는 건 1815년에 부오나파르테가 패전하자마자 콩스탕이 런던으로 도피를 한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전히 부르봉 왕가의 루이18세(마리 앙트와네트의 시동생)이 왕좌를 깔고 앉은 왕정복고 시기인 1817년에 파리로 돌아와서 하원의원을 해먹었다는 거. 하긴 뭐 위정자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 이후 자유주의자를 자처해 루이18세의 뒤를 이은 샤를10세하고는 또 척을 졌지만, 대신 노동자, 학생 등한테 인기를 얻어 죽은 다음에 국장까지 해 잡쉈다지 뭐야? 대중은 그리 현명하지 못하거든. 어쨌거나 자기 한 평생은 기깔나게 살았다.


  작품은 뭐 그냥 사랑 타령이다. 아니, 사랑도 아니다. 1806년에 초고를 쓰고 1816년에 완성해 출간한 책. 작품의 주인공 아돌프가 이자벨 드 샤리에르 노부인이 죽은 1805년에 열일곱 살이었으니 스물여섯 살이면 1814년. 그러니까 1810년 경부터 14년까지가 시간적 배경이다. 장소는 주로 독일의 소도시 D와, 아돌프의 아버지가 선제후 궁정의 장관으로 근무하는 선제후국에서 잠깐, 보헤미아의 지방도시에서도 잠깐,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 저택. 딱 봐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당시 세계에서 제일 막강하던 프랑스 군을 이끌고 마당쇠가 싸리비로 빗질하듯 독일과 러시아를 짓쳐나갔다가 애먼 병사들만 수만 명 얼려 죽인 전쟁 앞뒤 몇 년이다. 근데 그딴 거 아무 신경 쓸 필요 없다. 등장인물 가운데 전쟁과 국민의 고통에 관심있는 인간은 한 놈도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없는 것들, 천한 것들만 죽어 나가는 법이다. 있는 분들, 높은 양반들은 전쟁과 관계없이 사랑타령만 해도 시간은 능률능률 흘러간다.

  아돌프. 좋은 이름인데 1930년대부터 이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아돌프 말고 이 책의 주인공 아돌프는 22세에 괴팅겐 대학을 졸업하고, 선제후 궁정의 장관인 아버지의 권유로 유럽 여행을 즐기면서 식견을 넓히기도 했다. 아버지가 외동아들인 아돌프를 얼마나 아꼈는지 언제나 어떤 요구도 들어주고, 문제가 생기면 부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그렇다고 부자 사이가 그리 원만했던 건 아니다. 아돌프가 보기에 아버지는 처음엔 공감의 웃음을 보이다가 얼마 안 가 결국 대화마저 끊어버리는 냉철하고 신랄한 관찰자였다. 이런 부자 사이는 대부분 아버지의 잘못이기는 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예 눈꺼풀 안에 넣고 다니며 키울 생각이었는지 세상에 모자란 거, 아쉬운 거, 하고 싶은 데 못하는 거 하나 없이 사는 게 습관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요량에 한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삐지는 외골수 내성적 성격으로 고착된 것처럼 읽힌다. 에잇 씨앙. 나한테도 그런 아버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공평한 게 어디 있니?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대학을 졸업한 아돌프는 집안 친척인 P백작이 초청을 해 괴팅겐을 떠나 잠시 작은 도시 D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P백작은 D시에서 폴란드 태생의 첩 엘레노르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살았다. 아마 본처도 살아 있을 거 같다. 죽어도 이혼해주지 않으면서.

  엘레노르가 어떤 여자인가 하면, 폴란드의 상당한 귀족 가문에서 무남독녀 따님으로 태어나 지적 소양은 평범한 수준이더라도 교양과 몸가짐, 고상한 기품과 자존심 같은 덕성을 넘치게 갖추었는데, 폴란드에서 내란이 생겨 부친은 추방당하고, 어머니와 엘레노르만 프랑스로 피난을 했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19세기 초 파리에서 여자 혼자 살 수 없어서 P백작의 첩으로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조금 후에 알게 되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첩실로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P백작이 파산을 하고 법적으로도 구속 위협에 처했을 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엘레노르는 헌신적으로 P백작의 곤경과 가난을 함께 하면서 용기와 이성으로 적극적으로 도와 백작의 재산을 일부나마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재산 소송 건으로 D시에서 2년간 체류 예정이다. 만일 승소하면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을 확신하며, 조금 지나면 정말로 승소해 백작은 자기 재산을 온전하게 다시 찾는다.


  아돌프는 작은 도시에서 딱한 수준의 촌스런 사교계 사람들과 어울리려니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눈에 띄는 젊은이가 한 명 있어서 말을 트고 지냈는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사교계에서 그나마 괜찮은 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오랜 노력 끝에 부인의 코르셋 끈을 푸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성공담은 물론이고 그간의 속사정과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조차 얼마나 호기심을 부추기던지. 아돌프는 여태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지난 세월이 갑자기 후회스러웠다. 그때까지 이성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소위 모태솔로라는 말인지, 단지 연애 경험만 없다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아돌프 앞에도 새로운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허영이 깃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거 같았다니까.

  그럼 이제 다 나왔다. 괜찮은 부인과의 불륜. 그리고 P백작의 첩실인 엘레노르에 대한 원고지 분량. 거기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만이 진지한 남녀 관계이라서, 결혼 문제가 뒤따르지 않는 한 여자란 손에 넣었다가 때가 되면 떨쳐버려도 아무 불편이 없는 존재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19세기 초 귀족 집안의 연애관이란 게 이랬던 모양이다. 불륜이건 그냥 하룻밤 연애건 간에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대충 즐기다가 관계를 정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

  근데 사실 이건 유부녀 마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혼인상태이니까 상대가 미혼의 젊은 남자가 됐건, 유부남 부르주아 귀족이 됐건, 아니면 다른 건 몰라도 정력 하나는 끝내주건 간에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기다가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안면몰수하고 그냥 걷어 차면 되는 거니까. 참 재주들 좋았어, 그지? 애라도 덜컥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 모양들이었는지 말이야. 유전자 검사도 하다못해 혈액형 판별법도 없던 시절에. 하긴 그래서 더 편했을 지도 몰라.

  이렇게 아돌프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보다 열 살 연상의 엘레노르 여사한테 대시하기 시작한다. 아이 둘 있는 엘레노르가 척 보니까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애송이 새끼가 감히 자기 비단 스타킹을 벗기려드는 꼴이 가당치도 않아서 이리 빼고 저리 뺀다. 그럴수록 아돌프는 점점 몸이 달아가고, 급기야 이게 진짜 사랑인 것으로 오해해서 이젠 엘레노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프고, 잠을 안 자도 졸립지 않은 반 마취상태로 접어든다. 젊은 남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죽자사자 덤벼드니 엘레노르 역시 아돌프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 착각해서 이젠 자기 역시 아돌프를 사랑하는, 사랑해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싶을 정도로 푹 빠져 버린다.

  어떻게 될 거 같은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뻔한 결말이지. 당연히 비극.

  이제 할 거 다 하고, 날짜도 벌컥벌컥 지나니까 젊은 만큼 변덕스럽기도 한 아돌프는 어느새 슬그머니 엘레노르한테 물리기 시작하는 반면, 엘레노르는 날이 갈수록 아돌프에게 목매달기 시작한다. 이렇게 둘은 사랑에서 엘레노르의 집착과 아돌프의 질림으로 변질되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부터 우유부단하기에 세상 둘째가 아쉽던 아돌프가 말끔하게 정리할 주변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엘레노르는 아돌프를 위하여 남자 버리고, 두 아이까지 몽땅 버리고, 백작이 되찾은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자발적인 제안도 물리치며 아돌프, 오직 아돌프를 향해 강한 편집 증상을 보이고 있는 비극적 판국에, 독자는 읽기가 가면 갈수록 지긋지긋해진다.

  사랑? 그거 잘못하면 갈수록 비극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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