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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환승
  • 레이첼 커스크
  • 14,730원 (5%460)
  • 2021-04-30
  • :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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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이 세 번째 읽는 커스크로 읽은 책마다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소개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읽기로는 그냥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굳이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요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광고를 하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던 것이 기억난다. <환승>도 비슷하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낳은 여성이 이혼하고 아들들과 함께 살다가 사정이 생겨 사실상 거주가 가능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지역자치회 소유 부동산을 구입해, 두세 주 동안 내부수리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아들들은 아빠한테 보내고, 특히 아랫집에 사는 고약한 늙은 부부를 위시하여 몇몇 사람을 만나고 몇몇 문제도 생기는데 그런 몇몇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이다. 특정 사건 또는 인물, ‘특정’이라고 해도 살면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유별나지 않은 사건 또는 인물 이야기에서 따른 사건 또는 인물로, 이 사건 또는 인물에서 또다른 사건 또는 인물로 옮기는 것을 레이첼 커스크는 “환승transit”라고 썼다.

  내 경우엔 이 책이 레이첼 커스크의 “환승 3부작” 가운데 첫번째 책인 줄 알고 골라 읽었다. 근데 다 읽고 독후감을 쓰려 책 소개 같은 걸 훑어보니 이런, “윤곽 3부작” 가운데 두번째 책이란다. 맞다. 뉴욕 타임즈가 “21세기 최고의 책 100” 가운데 열네 번 째로 꼽은 것이 <환승>이 아니라 <윤곽Outline>이었네 그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다음에 읽을 레이첼은 <윤곽>으로 하면 되지 뭐.


  제일 먼저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주인공이자 화자 ‘나’에게 점성술사가 보낸 메일 이야기이다. 흠. 점성술사, 즉 점쟁이의 예언이라고? 소설작법 7장 2절에 보면 “점쟁이와 노파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특히 불운이나 불행에 관한 예언은 더욱 그러하다.”라고 쓰여 있는 건 몇 번 이야기했다. 그러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이거 뭐 시작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겠군, 긴장하게 만든다.

  점성술사가 보낸 메일은 말한다. ‘나’와 관련한 천궁에 아주 중요한 뭔가가 곧 통과할 예정인데, 그것이 ‘나’의 앞날에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지금 ‘나’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고 지금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다가올 일에도 희망을 가질 수 없어 힘들어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단다. 아울러 보태기를, ‘나’가 고통스러워하며 몇몇 질문을 떠올렸지만 아마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을 거라니, 이게 얼마나 맞는 말인지.

  이 과정을 무난하게 헤쳐 나가려면 방법이 있는데 그건 아래 칸을 클릭하면 가르쳐 주겠다, 다만 소정의 요금을 내야 한다, 해서 화자 ‘나’는 기꺼이 많지 않은 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단다. 당연히 메일이 주장하는 바는 화자 ‘나’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거의 모든 도시 인류가 겪는 공통의 현상이고, 아마도 이 메일을 받은 영어권의 무수한 영어 사용자들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며 따라서 똑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걸 알면서도 ‘나’는 돈을 지불한다. 당장 집 사는 일을 결정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렵고 정신 사나운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런던은 서울만큼 그럴까, 그랬을까 싶기는 하지만 부동산 열풍에 휩싸여 있어서 런던과 이웃한 위성 도시에 적당한 집을 구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때였던 모양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다. 부동산 중개인이 조언한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허름한 집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불안한 동네의 좋은 집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맞는 말이다. 특히 런던과 위성도시 같이 다양한 인종이 살고 치안이 불안정한 곳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을 키우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고른 집이 위에서 말한 형편없는 상태의 지역자치회가 소유한 집. 전에 살던 사람은 가나 출신의 아프리칸 영국인으로 딸과 아들을 의사와 변호사로 키워 이제 자기들 책임을 벗어나 아름다운 가나로 돌아가 여생을 마칠 계획이다. 아랫집 노부부는 40여 년 전에 입주한 터줏대감으로 자치회와 직접 계약한 유일한 세대이기도 하다. 집 수리를 위하여 방문한 건축업자가 내부를 둘러보더니 말한다. 고생을 자초했다고. 집안에 벌레가 가득할 거란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변 다른 집과 똑같이 보이는 회색 벽돌로 지은 아담한 빅토리아식 3층집이건만 내부는 거의 폐허 상태로 차마 독후감에 옮기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게다가 사사건건 기고만장해 악담과 욕설을 쏟아내는 아랫집 고약한 늙은이들까지. 이래서 만나는 사람이 건축업자, 아마 인테리어 업자일 텐데 역자 김현우는 건축업자라고 옮기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아랫집 부부.


  길을 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 제러드를 발견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15년 전, 아파트 꼭대기 층 그의 집에서 1년 남짓 동거했던 남자. 이날 지나치고 며칠 후에 초등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 여자애와 손잡고 있을 때 다시 만난다. 그의 여덟 살 먹은 딸 클라라. 길가에 빅토리아풍 집들이 모인,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거주지역에서. 제러드는 몇 년째 클라라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부모 역할을 수행한다. 이제는 엄마들과 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처음에 아기 엄마들 모임에서 여자들이 자기에게 적대적이라 놀랐다고 한다. 캐나다 사람인 아내 다이앤은 일이 많은 사람이라 엄마 역할에 무관심하고, 엄마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낸다.

  이제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다이앤은 남편인 한 남자로 하여금 ①다른 사람을 돌보는 법, ②책임감을 가지는 법, 그리고 ③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제러드가 육아를 전담하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비평가들이 레이첼 커스크에게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타이틀을 줄 수 있게 하는 다분히 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돌봄, 책임감과 관계를 말한다. ‘남성’은 돌봄, 책임감, 관계가 결여된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뜻? 설마 아니겠지. 남자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체득하기를 바라는 여성적 돌봄, 책임감, 관계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다른 의미에서 돌봄, 책임감, 관계의 형성과 유지 방법이 있다. 커스크의 이 책은 이런 남성성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뭐 좋다. 그럴 수 있다. 의견 차이이고 커스크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다만 남성이 여성의 이런 성향을 익히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여성이 남성의 돌봄, 책임감, 관계를 익히는 것도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화자 ‘나’는 사람들을 만난다. 다음에는 염색하러 간 미용실의 주인 남자 데일과 수습 미용사, 그리고 10대 초반의 소년 고객과 아이의 어머니. 그러면 점성술사의 예언은 어떻게 된 거냐고? 소설작법 7장 2절? 놀랍게도 이 책 속에서 7장 2절은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저 뒤쪽으로 가면 ‘나’가 점성술사의 메일을 한 번 더 거론하기는 해도.

  내가 그간 읽은 커스크의 작품과 사실 그리 특별하게 구별되는 작품은 아니다.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생활>에서는 말 그대로 도시 아가씨가 아닌, 아직 이혼수속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도시 유부녀’가 갑자기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시골 마을로 내려가 오페어로 입주해 가정부가 되는 이야기이며, <브레드쇼 가족 변주곡>은 아내가 대학 학과장이 되자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고 남는 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또는 몰두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환승> 중에서 제러드 이야기는 이미 전에 한 번 써먹은 적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커스크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독자에게 즐거움까지 줄 수준이다. 아쉬운 건 이런 옴니버스 식 모음은 읽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휘발되는 수가 많다는 것. 이 책은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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