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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 스타니스와프 렘
  • 16,920원 (10%940)
  • 2025-04-25
  • : 7,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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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쓰기 전에 뭔가 좀 먹어야겠다. 당 떨어졌나 왜 후들거려? 하긴 뭐 스타니스와프 렘의 지극히 철학적 농담집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니 잔뜩 기가 죽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 나는 정보라한테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같은 스타니스와프지만 렘 말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를 번역해 읽을 수 있게 해준 역자가 정보라라서. 정작 그의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 부커-인터내셔널 상 최종심사에 오른 소설이 엽기토끼인지, 저주토끼인지 막 헷갈리는 수준이긴 한데, 하여간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 35번으로 나온 정보라 역 <탐욕>을, 정보라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못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비트키예비치 한 줄도 읽지도 못하고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지. 정말 진지하고 인상깊게 잘 읽었다. 그럼에도 독자서평에 별 다섯이 아니라 하나 빼고 넷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으면서 가비얍게 만점으로 올리는 작은 일도 양심상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근데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다른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 기분이다. 마음 같으면 당연히 별 다섯 만점을 클릭하고 싶건만 도무지 내가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고 즐겼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양심상 하나 빼야 마땅하다. 하여간 폴란드 사람들 스타니스와프들은 너무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먹고 오자. 이왕이면 달걀 하나 동동 띄워서.

  정말로 라면 끓여먹고 왔다. 밥 두 큰 숟가락, 수프 3분의 1 봉지, 굴소스 반 티스푼, 콩나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 파, 달걀 하나 톡 깨 잠깐 더 끓인 다음에 고추가루 반 스푼과 참기름 살짝 두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쐬주를 한 병 까? 말아? 고민했다. 쐬주는 독후감 쓴 다음에 하자.


  이 책은 1971년에 출간한 《절대 진공》과 1973년 작품 《상상된 위대함》을 번역해 한 권에 묶은 착한 책이다. 출판사 현대문학이 이런 일을 많이 해서 좋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같은 구상은 현대문학만 할 수 있을 듯. 아무쪼록 출판사 ‘현대문학’, 흑자 많이 내서 계속 번창하기 바란다.

  저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철학적 농담집”이라고 했다. 농담은 농담이되 이게 철학적이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철학이니 다분히 철학philosophy이면서 동시에 금속공학metallurgy 적이기도 하다. 농담은 농담이지만 잘 교육받은 소수의 전문가들만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곳에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농담’할 때의 농弄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고단수 적인 우스개, 흔히 이야기하기를,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유머코드이겠다. 그래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를 위시한 숱한 독자는 지금 작가가 농담 코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 눈치 채겠는데 이게 왜 웃어야 하는 지 모르거나, 농담을 하고 있는 지 자체도 모르거나, 심지어 농담을 하고 있지도 않은데 지레짐작으로 독자 혼자 낄낄거릴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읽으면서 간혹 웃기도 했건만 정작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 그래서 개운하지 않다. 안 웃긴 장면에서 웃었을까봐. 웃긴 장면에서 안 웃는 건 뭐 그럴 수 있어도, 안 웃긴 장면에서 웃으면 되게 쪽팔리거나 무안하잖아? 이거 참. 그렇다고 다시 읽어 보기도 뭐하고 말이지. 사실 앞에서 라면 먹으면서 쐬주 안 마셨다고 고백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 낮술에 취해 그만 써야겠다고 토껴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거든.

  《절대 진공》은 서평을 모은 책이고 《상상된 위대함》은 렘이 써준 서문 모음집이다. 문제는 서평이건 서문이건, 애초 존재하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이고 존재하지 않은 책의 서문이라는 것.

  바르샤바의 치텔니크 출판사에서 출간한 <절대 진공>의 서평에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문을 쓴다는 발상은 렘이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런 시도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개념은 더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심지어 라블레조차 이것을 처음 활용한 작가가 아니었다.”(p.9)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지극히 취약한 보르헤스를 예로 들어서 첫 페이지부터 꼬리를 말고 시작했다. 라블레도? “고매한 술꾼과 고귀한 매독환자 여러분”한테 기념비적인 <가르강튀아>를 헌정한 작가 말이지? 나 스스로 거의 일주일에 네다섯 개의 찌질한 독후감을 남발하고 있으며, 소위 “서평가”라는 직업을 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하지 못한 인기 딜레탕트 정도로 치부하는 교만을 떨어왔으니 《절대 진공》 속의 서평 역시 이런 비루한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읽어보니, 이거 원. 뭐 아는 게 있어야 장단을 맞추지! 뭐라고? 맞다. 조금 엄살이 섞이긴 했다.


  말이 서평이다. 렘이 쓴 서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상 작품의 내용이다. 즉 스타니스와프 렘은 서평을 빙자해 가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논했다는 뜻. 그러니까 독자는 하나의 서평이 아니라 장편소설 한 편을 위한 드로잉 북을 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나는 여태 딱 세 권의 렘을 읽었을 뿐이다. 장편 둘, 단편집 하나.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외계 생명체와 생명체로 진화한 기계 이야기이고 단편집 《사이버리아드》는 주인공 자체가 로봇, 로봇은 로봇이지만 거의 신적인 능력을 갖는 최고 수준의 AI 기계이다. 이 세 권을 읽으면서 스타니스와프 렘이라는 작가가 애초에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유기체의 결합 보다는 기계와 컴퓨터의 발전, 발전을 거듭해 기계 자체적으로 진화하는 단계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드라이한 존재. 사실 이런 논리는 렘의 독자적인 발상은 아니다. 1952년에 동성애자라는 범죄가 밝혀져 화학적 거세를 당한 후 54년에 시안화칼륨을 들이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이자 암호해독가였던 앨런 튜링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 개념을 발표한 것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9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튜링 생전에 렘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튜링의 개념에 렘의 아이디어가 합쳐지고, 물론 가정이지만 튜링이 자살에 성공하지 못해 계속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를 연구했다면 지금쯤 AI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벌써 멸망을 했거나, AI 로봇의 봉사 덕분에 노동하지 않는 유토피아 근처까지 왔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살고 있거나 기타 등등이겠지.

  나는 렘의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무無, 없음인 것을 안다. 《사이버리아드》에서 N으로 시작하는 건 무엇이든 만드는 기계를 발명하고 절친을 불렀더니 절친이 기계한테 무Nothing을 만들어보라고 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 없음, 무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절대 진공”이다. 이 절대 진공의 단위를 분모로 하면, 절대 진공의 반대이자 다른 측면인 무한대가 된다. 전 우주적으로 무한대는 대체 얼마가량일까? 렘은 10의 600제곱 정도란다. 즉 1 뒤에 0이 600개 정도 붙는 수. 그 정도면 전 우주를 덮을 수 있다고. 인간 존재는 이 확률을 뚫고 세상에 등장한다. 처음 1/10은 쉽게 예를 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 또는 나의 절반이 될 난자가 배란되는 날 아빠와 사랑을 나눌 확률 정도로 보면, 이 다음 1/10은 엄마 아빠가 성인이 되어 나를 낳기 전까지 살 수 있을 확률. 뭐 이런 식으로 죽 나가면 10의 600제곱 경우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존경하는 다임러 벤츠 선생이 메탄올로 움직이는 털털이 반마력짜리 엔진을 단 마차가 점점 늘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막히는 연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이 이동수단을 어디다 세워 두느냐가 대도시의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되고, 불꽃놀이와 발차기 원리 덕분에 사람들이 곧 달에서 산책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들이 달에서 걷는 모습을 지구에 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일이 가능하고, 인공 천체를 만들어 우주공간에서 벌판이나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게 가능하다고(p.236~7 요약) 백년 전, 우주 나이도 아니고 지구 시간으로도 눈 깜짝 할 새보다 짧은 세월인 백년 전에 누구 하나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기계는 진화한다. 그런데도 아직 덜 진화한 상태이다. 진짜는 일찍이 앨런 튜링이(스타니스와프 렘 이전에) 말한 바대로 기계 스스로 알아서 진화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그제서야 시작이다.


  그러면 기계도 아름다움을 느낄까? 0과 1의 세계로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컴퓨터 인격체계를 페르소노이드라고 하자. 인간은 인간의 눈과 귀, 요즘엔 코와 입을 통하여 색채, 음악적인 소리, 사물의 아름다움, 맛, 향기를 감지하는데, 페르소노이드는 자신의 환경을 둘러보면서 경험적 특성들을 ‘스스로’ 추가하는데, 예컨대 우리가 눈으로 바라본 풍경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경험의 주관적인 속성”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p.251 요약). 사람도 많이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은 시대를 달리해 변하는 것이니까.

  앞 문단에서는 기계와 기계의 두뇌를 이루는 AI의 발전을 발했다면, 이번 챕터 (아서 도브, 『논 세르비암』)에서는 기계의 정서 발전을 다루고 있다. 즉 인식 체계가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각과 같지 않다는 말. 나는 수학적 아름다움을 ‘건식형 아름다움’이라 하고 싶은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계가 진화를 하려면 유기체처럼 생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종을 불문하고 유기체에게 최고의 관심 대상인 생식은 그러나 금속과 수학의 세계인 기계 또는 로봇에서는 말 그대로 변형된 생산을 의미한다. 스타니스와프는 페르소노이드의 전제가 인격적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심리와의 유사성을 만들기 위하여 정보적 기층부에 “모순”을 도입해야 하며 이것으로 인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쉽게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행위로 호문클루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신화가 실현된다고(p.261 요약) 한다. 정자 또는 염색체를 담은 생명 인자 속 작은 인간을 뜻하는 호문클루스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통합하면서 동시에 “분열”하는 의미가 더욱 헷갈렸는 지도 모르겠다.

  재미도 있고, 가끔 심각하기도 하고, 스타니스와프 렘 특유의 유머도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 과학 픽션을 쓴 렘이라 해서 인문학적 깊이를 간과하지 마시라. 그의 지적 함의 역시 깊고 깊어서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적 기초 지식은 물론이고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괜히 읽고 자만심 상했다. 웃자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책 역시 읽어봐야 한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 줄 알기 위하여. 10의 600제곱 가운데 오직 하나 있는 미물. 그게 당신이고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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