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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네 권째 나탈리 사로트를 읽는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탈리 사로트가 정말 천재라서 그가 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①애초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평균 이상, 전 인류의 상위 1~2퍼센트 안에 드는 고급 두뇌를 지니고 ② 무지하게 좋은 커리큘럼을 가진 교육과정을 거친 인간들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썼는지, 아니면 어떻게 하다 보니 굳어진 스타일을 동 시대의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이 마구 띄워주는 바람에 천정 높을 줄 모르고 이름값을 날렸는지, 둔한 내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다고. 네 권까지 달린 것이 아까워, 최근에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467번 <향성>은 읽어봐야겠다 싶었다가, 그래도 내돈내산하기 겁이 나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다.
그나마 사로트의 희곡은 소설에 비해서 그나마 접수가 되는 편이다. 도무지 적응하기 쉽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면 일단 읽고 보는 거, 이것도 병이지? 나도 미친다, 미쳤다.
본문이 77페이지에서 끝나는 짧은 희곡. 짧다고 우습게 봤다가는 쌍코피 터진다. 원래 사로트가 그렇다. 어느 작품 하나 빼지 않고 다 짤막하다. 근데 뇌세포가 도무지 적응하기를 꺼려한다. 대단한 공통점이다. 소설의 경우엔 소위 신소설, 누보 로망, 찬쉐가 쓴 <오향거리>의 주인공 X여사처럼 사물을 보긴 보되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만 보다가 보살급의 남편이 현미경을 사주자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사로트 표 누보 로망도 로브그리예처럼 사물과 사람을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는 것 같이 미시적 묘사로 일관하는 바람에 독자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치닫게 만든다. 거기에 비하면 희곡은 얼마나 친절한가 말이지. 내가 지금 이렇게 쓴다고 해서, 희곡은 그러면 읽으면 딱 감이 잡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귀족의 후예답게 사로트의 희곡은 프랑스의 유구한 부조리 연극의 바탕 위에 놓여 있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자면 그렇다. 그냥 쉽게 말하면, 배우가 말하는 대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거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남1, 남2, 남3, 그리고 여. 대개 남자들과 여자가 나오면 남자들은 헛소리만 하고 여자는 진리의 말씀을 시전하다 결국 남자들에 의해 망가지는 드라마가 보통인데, 이건 거의 전적으로 대개의 (극)작가가 이런 구도로 (극)작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독자가 갖게 되는 선입견이다.
등장인물은 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팀원들인 것으로 보이고, 방금 업무상 회의를 마친 듯하다. 회의를 하다가 여자는 무슨 의견을 말하려 하다가 할듯 말듯, 결국 아무 의견 없이 회의를 끝낸다. 이제 해산해 밖으로 나온 남1과 남2는 왜 여자가 의견을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인공인 남2가 여자에 대하여 말한다.
“아, 알아요… 명석한 두뇌는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건 누구나… 훌륭한 지식인이 아니어도… 그녀는 판단할 수 있어요, 그렇죠,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니 여기, 그녀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 여기… 이곳에…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갖다 댄다.) 여기에 그녀의 작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왜 ‘작은’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안심하고 싶은 걸까요… 그녀는 그녀 안에 자기 생각이 있어요, 생각이 여기 있죠, 감춰진 채. (하략)” (p.10)
제목 <여기 있잖아요>에서 “여기”란 여자의 머리. 뇌 속, 생각하는 장치가 있는 위치를 말한다. 또는 여자 자신이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나는 위 대사를 읽고, 이 대사가 남2의 긴 대사 가운데 거의 처음에 나오는 것이라서 그랬는지, 나탈리 사로트가 페미니즘에 관하여 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남2가 분명히, “여자도 생각할 줄 안다. 비록 작은 생각이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근데 사로트가 적극적인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페미니즘 작품도 쓴 거 같지 않은데…. (더 읽어보자.)
남1이 퇴장하고 남3이 등장한다. 잠시 후 객석에서 누군가 종이를 구겨서 뭉친 걸 무대로 던진다. 희곡에서는 남3이 그걸 한 손으로 멋지게 잡아 펼쳐 읽은 후에 남2에게 보여준다. 종이에는 “불관용”이라 적혀 있다. 불관용不寬容. 관용을 베풀지 말아라? 관용을 베푸는 것이 불가능하다? 뭐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붙어 있는 해설에 불관용에 관하여 나와 있어 그걸 읽어보았는데도 그렇다. 어제 혈액검사 하느라고 하루 쫄쫄 굶고 빈속에 소주와 막걸리를 부어 꽐라가 된 후유증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사실 어제 염하고 시체 비슷한 수준까지 갔다가 오늘 하루 벌벌 기었지 뭐야, 분명 중요한 메시지 같은데도 모르겠고, 모르겠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좀 봐주시라. 술이 웬수다.
하여간 주인공 남2는 회의 때 여자가 의견을 내지 않은 데 대하여 화를 낸 걸 사과한다. 다음에 여자가 대사를 한다. 여자의 대사를 보면 남2가 이들의 조직에 조금 더 우월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같다.
“하, 제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결코? 제가 거위처럼 목에 밀어 넣기만 한다? 당신… 당신은, 당신만 ‘생각하신다?’… 당신은, 당신은 ‘아신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의 ‘진실’을 ‘목구멍에 밀어 넣지’ 않아요, 그냥 밀려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받는 거예요’. 게다가 저는 그렇게 했어요… 저는 불평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말이 되는 소리예요?” (p.17)
그럼 이건 뭘까? 남2를 비롯해 여자에 비해 조직에서 조금 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1과 남3은 여자의 의견을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의견을 받아 그것을 자신(남2)의 의견에 동의한 것처럼 만들어서, 세계사적 의미로 과장해 말씀드리자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극)작가는 결코 확실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렇게도 읽힌다. 사로트 자신이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소비에트 정권을 피해 파리로 망명을 했으니 스스로 느끼고 있는 의식의 범위가 세계사적 의미로 확장할 수도 있을 터이니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불관용의 딜레마가 한 번 더 내 머리 속에서 터져버리는데, 불관용의 법칙을 어디에 적용하느냐, 이게 문제다. 제목에 밝힌 것처럼 “여기”에 불관용의 딱지를 붙여? 불관용이란 말 자체가 문제라면, 불관용의 반대말인 관용이란 단어도 문제다. 관용이 있으니 불관용이 있을 것. 관용과 불관용은 각종 소통의 부재로 야기되는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불관용하느냐, 이것은, 어떤 문제까지 관용하느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고, 사로트가 겪은 20세기 전체에 걸쳐 이 관용과 불관용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커다란 비극을 만들었으니.
그럼 관용과 불관용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로트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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