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 그라치아 델레다
  • 15,300원 (10%850)
  • 2023-08-31
  • : 75

.

  하긴 이탈리아 어느 지역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그라치아 델레다가 1876년에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던 샤르데냐 섬사람들의 외지인에 대한 텃세는 여간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주민들은 대단한 결속력으로 결집되어 있었을 것이다. 뭐 당연히 서로 이익의 충돌이 되지 않는 선에서이기는 했겠지만. 그리하여 외지 사람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괜찮은 집안 사람과 혼인하고, 이후 성실하게 처가의 업을 이어 성공을 할 정도라면 당연히 한 작품의 주인공 또는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훼방하는 갑급 조연 정도를 맡는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조금 무게가 나갈 엑스트라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반면에 섬 구성원의 한 명이, 그것도 귀족 집안의 따님께서 야반도주에 성공해 밤배를 타고 바다 건너 장화를 닮은 반도에 나가, 한 평민과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다가 아쉽게도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이 아들이 나중에 머리통이 커지자 어머니의 고향에서 살고 싶다며 귀향했을 경우에는 어떨까? 나도 궁금했다. 뭐 놀랍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는 동네가 쌍수를 들고 귀족도 아닌 청년을 환영한다. 음, 그렇군.

  그라티아 델레다는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여성 작가. 전에 <악의 길>을 읽은 기억이 나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악의 길> 역시 샤르데냐 섬의 주도 누오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베리즈모 오페라였다. 그걸 읽으면서 재미는 있지만 암만해도 이젠 구식이 된 이야기라서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여기에다 그 동네 사람들의 핏줄에 밴 가톨릭 종교 의식儀式과 의식意識을 완전히 도배하는 바람에, 엎어치고 메쳐도 골수 유물론자인 나는 3미터 파고 속에 통통배 탄 것처럼 멀미가 나 견디기 쉽지 않았다. 작품도 이미 옛날 옛적 스타일이라서 내가 혹시 80~90년 전 유럽사람이라면 모를까 21세기도 웬만큼 달려온 이 시점에 굳이 참아가면서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라고 쓰면 틀림없이 과장, 작품에 대한 혹독하고 무책임한 비평일 터이니 읽는 분께서 좀 디스카운트해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샤르데냐 섬의 갈테 마을에 악마처럼 혈색이 붉고 폭력적인 귀족 돈 차메 선생이 살았다. 이이는 성녀같이 아름답고 차분한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님과의 사이에 위로 아들 둘, 아래로 딸 넷을 두었으니, 생떼 같은 두 아들은 전쟁에 나가서 죽었는지 염병을 앓다가 죽었는지 하여간 작품 시작도 하기 전에 세상 하직했고, 나이 든 순서대로 루트, 에스테르, 리아, 노에미 이렇게 네 따님이 있었다. 돈 차메가 처음부터 성질 더럽고 폭력적인 건 아니었다. 심지어 두 아들을 잃었을 때까지도 안 그랬다. 천사 같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님이 세상을 접으면서 돈 차메는 조상들이었던 남작들의 난폭한 성질이 발현된 것처럼 딸들에게 엄격하고 못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네 딸을 집안에 고립시켜놓고 젊은 남자가 집 밖에 세 번만 지나가면 사실여하를 불문하고 딸들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사람을 꼬였길래 남자가 집 앞에서 어정거리게 했느냐고 닦달을 할 정도였다. 딸들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주민들과도 온갖 소송과 불평, 불화를 만들었고, 하루 종일 이웃집 처마 아래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욕설이나 험한 시비를 붙자고 해 사람들이 아예 길을 돌아다녔으니 오죽했겠을까.

  이 핀토르 가문의 따님들 가운데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이 셋째 따님 리아 아가씨가 가뜩이나 좁은 섬에서도 지루한 일상만 해야 하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귀족 딸들을 노예처럼 일을 부리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해, 못살아, 못살아, 나는 못살아, 유행가 가락처럼 입에 달고 살더니 달도 없는 새까만 밤에 깨끔발을 하고 그대로 내빼 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이 집의 충직한 하인 에픽스가 리아 아가씨를 연모하여, 연모가 뭐야, 사랑도 그런 사랑이 없어서, 리아 아가씨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아가씨의 행복을 성취시켜주기 위해 기꺼이 함께 동네 바깥 다리까지 동행을 해주었고, 거기서 지나가는 마차에 태워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는데, 야밤에 무슨 마차, 아마도 뭔가 수를 써주었겠지. 하여간 부두에 도착해 날이 밝자마자 연락선을 타고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간 리아는 언니들과 동생한테 편지를 부쳐 말하기를, 자기는 가축 파는 상인과 결혼해 차비타베키아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다고. 얼마 후에 다시 편지를 보내 알리기를 아들을 낳았다고. 자매들은 편지를 받고 결코 리아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평민, 그것도 가축상인과 결혼을 했으니 이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꼴이라 그랬다는데, 정말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세 자매는 결혼은커녕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팍팍하게 살고 있건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은 리아한테 질투가 나서 그랬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리아가 낳은 아들이 자기들의 조카인 건 확실해서, 리아한테는 엽서 한 통을 보내지 않았어도 조카 자친토 앞으로 출생 선물 같은 걸 보냈고, 리아가 젊은 나이에 숟가락 놓은 다음부터, 자친토는 매년 부활절과 성탄절마다 이모들한테 열심히 안부편지를 부쳤던 모양이다.

  악마처럼 혈색이 붉은 돈 차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어느 날 마을 밖 다리, 하인 에픽스가 리아를 배웅했던 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시신에서 외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심장발작 때문에 죽었거니, 당시엔 과학수사나 부검 같은 말이 없어서 그렇게 결론을 내고 그냥 파묻었다. 한 때 언덕에 올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땅이 자기 소유였던 것이 아내 죽은 다음부터 소송이니, 술값으로 다 날려서 이제 투박한 농장과 저택만 남은 상태로, 집에 남은 딸들은 앞에 남은 구만리 같은 세월에 시집 가기는 애초에 텄고, 귀족한테 허용이 되지 않았던 농장의 과수원에서 딴 과일 등속을 몰래몰래 팔아 생계를 이었다니 거 참,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근데 알고 보면, 하인 에픽스가 한 일, 자기 딸 도망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동네 밖의 다리까지 배웅해준 것을 돈 차메가 알아내 잔뜩 열이 올라 에픽스를 때려 죽이려 했고, 맞대응할 생각도 못한 하인 에픽스는 삐질삐질 뒷걸음질 치다가 정말로 맞아 죽을 거 같아서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돌을 하나 들어 휙 던졌더니 그게 하필이면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렸단다. 돌을 맞은 돈 차메가 허청걸음으로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20~30미터 이상을 비틀거리면서 기어이 비운의 다리 위까지 도착해 거기서 자빠져 죽어버렸다.

  이때 벌써 10년 동안 핀토르 가문의 하인으로 일했던 부처님 가운데 토막 에픽스는 이후 자기가 주인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남은 생을 남은 세 따님을 위해 바치기로 작심을 해서, 세상의 어떤 하인보다 더 지극하게 루트, 에스테르, 노에미 아가씨를 보살피고, 먹여 살리고, 보초 서고, 나름대로 아가씨들 결혼시키려 눈알을 굴리며 늙어갔다. 가뜩이나 충실한 사람이 가톨릭에 입각한 희생까지 뒤집어썼으니 딱 결론이 나지? 이 작품은 에픽스가 죽어야 끝나겠구나, 하고.


  돈 차메가 죽고 20년이 흘렀다. 그러니까 착한 에픽스는 30년 동안 품삯 한 푼 안 받고 하인 노릇을 한 건데, 딸들도 이를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귀족 신분의 고귀한 인간이 하찮은 하인에게 미안하다거나, 언제 주겠다고 허튼 약속을 하거나, 기타등등 아쉬운 얘기를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뭉개기만 했다. 딱 이럴 때 이탈리아 반도에서 편지가 와 말하기를, 조카 자친토가 세관에 다니다가 도무지 비전이 없는 직장이라 세르데냐의 이모댁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거다. 하나만 알려드리지. 자치토가 세관에서 일한 건 맞는데, 전직 선장이었던 신사가 큰 돈을 납부하기 위해 세관에 들고 와 세관장이 발행한 영수증을 받으려 했는데, 이때 사무실에 혼자 있던 자치토가 세관장이 외출을 해 없으니 돈을 자기한테 맡기고 내일 와서 세관장이 서명한 영수증을 받으라 했다. 거액의 현금이 어쨌거나 수중에 들어온 자치토는 퇴근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튀어나가 도박장에서 거액을 몽땅 잃고 만다. 다음날 선장이 와서 영수증을 요구하니까 자치토 하는 말이, 선생께서 내게 돈을 언제 주셨는데요? 나는 받은 적이 없나이다. 이렇게 세관에서 해고당했다. 선장이 이를 불쌍히 여겨 자치토를 자기 집에 불러 밥도 먹이고, 옷도 사 입히고, 좋은 말로 젊은 사람의 실수를 덮으면서 앞으로 열심히 살라고 충고를 했건만, 이를 잔소리로 여긴 자치토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여 샤르데냐 이모들한테 가겠다고 한 거다. 이를 들은 선장 부부는 기꺼이 뱃삯과 자전거를 한 대 사주고 앞날의 성공을 기원했단다.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듯. 당신이 옳다. 자친토는 샤르데냐 섬 갈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에픽스의 오두막 옆집에 사는 포로이 할머니의 손자 잔안토니오에게 아코디언을 사주고, 동네 사람들 전부한테도 포도주를 사주는 활수한 씀씀이를 자랑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훤하게 다 안다. 자친토가 써 제끼는 돈을 알고 보면 동네의 고리대금업자 칼리나 여사한테 고리로 얻은 돈이며, 이것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아가씨들의 재산이 거덜날 것임을. 이 와중에 핀토르 가문의 딸을 위하여 에픽스가 영웅적인 하인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하는 건데, 뒤로 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점점 더 가톨릭적 은혜와 구원, 고행으로 회전, 지극한 상투성을 띈다. 그러니까 독자가 생각한 것 보다 남은 이야기가 훨 더 많으며, 그게 읽기에 지겹다는 말이다. 아 씨, 잘 나가다가 말이지. 그래도 이런 점 때문에 이야기는 베리즈모에 머물지 않지만. 근데 베리즈모는 재미라도 있잖아?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