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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현 기타마쓰우라에서 1962년에 태어난 마쓰다 마사타카는 나가사키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로 가서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철학哲學. 금속공학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철학을 했든, 금속공학을 했든 자기 전공과 상관없이 극장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에 극단 “스페이스 앤드 타임 씨어터”를 창단해 7년간 운영하며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극작가가 직접 극단을 만들어 자기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건 우리한테도 낯설지 않다. <속살>을 쓰고 연출도 한 이은준 역시 스승 박근형과 함께 극단 “골목길”을 창단했고, 12년 후에는 스스로 독립해 극단 “파수꾼”을 만들어 자신의 대표작인 <속살>을 직접 연출했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객원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릿교立敎대학 현대심리학부 영상신체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영상신체학映像身體學이 무엇을 가르치는 공부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릿교대학에 전화해볼 생각까지 나지는 않는다. 설마 카메라(영상) 앞에서 신체를 어떻게 노출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건 아니겠지?
<바다와 양산>은 1994년에 기시다 구니시 연극상과 오사카 가스gas 주식회사가 후원하는 OMS 연극(대상이 아니라) 특별상을 받은 작품으로 1년 전 OMS 대상을 받은 <비탈 위에 있는 집>과 더불어 마쓰다 영상신체학과 교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미리 내 감상을 말하자면, 딱 내 취향이다. 괜히 잡다한 대사와 과장된 연기 같은 거 없이 속으로는 쌓인 거 많아도 겉으로 특별하게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 다분히 그리고 특히 일본인에 많은 감정 숨기기와 조금 다른,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속 삭힘’ 같은 연극. 그리하여 공연을 직접 보면 혹시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짜냐, 내 취향에 맞을 거 같은 걸.
역자 송선호의 작품 해설을 보면 마쓰다는 주요 작품의 무대로 일본식 거실인 “차노마”를 선택했다고 한다. <바다와 양산> 역시 마당이 보이는 차노마를 무대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 “평범한 부부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지만 인물들의 심리와 내적 갈등을 정교하고 깊이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작품”이라 말한다. 내가 읽은 감상과 상당히 가까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규슈 지방의 작은 도시에 고등학교 교사이자 소설가인 요지洋次와 불치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야 하는 아내 나오코直子가 세들어 살고 있다. 무대는 관객석 가까이 차노마가 있고 그 너머에 마당을 배치했다. 막이 오르면 요지가 마당쪽을 보며, 그러니까 객석을 등지고 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주인집 여자 세토야마 시게. 시게는 사실 요지에게 밀린 월세를 독촉하려고 온 것이지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못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겠지. 고등학교 교사이고 소설가라면 수입이 웬만할 터인데, 극중에 시게의 작품을 받으러 출판사 직원이 와서 원고료도 주고, 지붕 수리하는 것을 도와줄 정도이니 그럴 것 같은데, 병든 아내의 진료비와 약값으로 많이 써서 그런지 사는 건 궁색하다. 세토 아주머니가 퇴장하고 나오코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병세가 조금 호전이 되어 시장에 다녀왔고, 오늘 길에 조금 지쳐 공원에서 잠깐 쉬다 오는 길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공원 벤치에 양산을 두고 온 거다. 그래 잠깐 부부끼리 서로 자신이 가서 양산을 가져오겠다고 하다 남편이 공원에 간 사이에 주인집 남자 세토야마 다케후미 씨가 와서 운동회에 사람이 모자라 요지가 장애물 경주에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한다. 시게 다시 등장. 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간 나오코는 그곳에서 기절해버리고 만다.
의사 등장. 그리고 앞으로 3개월을 살 수 있다는 시한부 선언. 요지는 차마 나오코에게 의사의 판정을 이야기할 수 없다. 게다가 요지는 학교에서 잘렸다. 왜 잘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여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말한다. 출판사 직원이 요시오카가 야간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한 다음에야. 요시오카가 집에 와 지붕 물받이 수리를 도와주었고, 요시오카를 보고 있던 나오코는 전에 요지의 원고를 받으러 왔던 다다를 떠올린다. 그 여자 이름이 다다였어. 요지와 깊은 사이였던 것이 분명해. 사실이다. 그러나 극이 끝날 때까지 요지는 죽어가는 나오코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오코 역시 자신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도쿄 본사로 발령받아 전근 인사차 마지막으로 원고를 받으러 온 다다를 다시 직접 보고, 차까지 끓여 대접을 하면서도. 나오코 마음까지 평안한 건 아니겠지. 나오코는 다다의 찻잔을 엎지른다. 갑작스러운 침묵. 요지가 다탁을 닦으려 하고, 나오코는 그런 요지의 팔을 급하게 나꿔채 자신의 무릎 위에 돌려 놓는다. 이제 세 명 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다다는 더 이상 자리에서 버틸 수 없어 서둘러 퇴장해버리고 만다. 요지가 뒤따라 나갔다가 돌아와 아내와 마주친다. 나오코는 요지에게 부탁한다. 나를 잊지 마. 이날 부부는 바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다 때문에 버스를 놓쳐 이들은 바다에 갈 수 없다. 이런 묘사가 참 좋다. 대사가 아니라 행동, 그것도 간단한 그러나 치명적인 행위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호소를 하는 장면. 이런 것이 한 번 더 나온다.
다음해 1월. 나오코가 죽었다. 요지가 나오코의 유골을 들고 집에 온다. 우리나라하고 장례의식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죽어 분골을 아파트에 들고 들어온 걸 알면 아파트 주민들 난리난다. 반면에 일본은 집구석마다 다 귀신이 있어서 분골을 집에 모셔놓고 밥도 차려주고, 절도 하고 향도 지핀다. 우리나라하고 같은 점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 그래서 요지는 상을 펴고, 코끼리 밥솥에서 밥을 퍼 올려놓고 먹다가 마당을 보니 눈이 내린다. 요지는 무심하게 평소 나오코가 앉아 있고는 하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봐… 눈 내린다….”라고 말하지만 당연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요지는 그저 후루룩 소리내며 밥을 계속 먹으면서 막이 내려간다.
서양, 그러니까 유럽과 아메리카의 연극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들은 주로 대사로 사건을 설명하고, 전개하며 해결하는 반면에 마쓰다는 절제된 대사와 절제된 행동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이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재료임을 기막히게 보여준다. 여기에 껌벅 넘어간 거다.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 4악장 종결부분의 짧지 않은 휴지기. 그 정도도 아닌 현악사중주 중의 극히 짧은 완벽한 소리 없음 상태와 비교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이란. 이 양반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지만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책이 이것 말고 없다. 이 책도 절판. 정가가 7천원인데 상태가 별로인 중급 헌책이 1만5천원. 2만원 부르는 곳도 있다. 우리 희곡에 이런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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