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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꽤 그럴듯했다. 튀르키예 사람 하산 알리 톱타시더러 발칸 쪽에서는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고 한단다. 읽어보면 정말 그렇다. <성>과 <심판>을 합친 듯한 느낌. 카프카가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숱한 후배들이 그를 모사하고, 그와 비슷하게 세상을 조망하려 하고, 그의 세계를 다시 구현하려고 힘을 쏟으니. 그런데 톱타시는, 쇤네가 뭘 알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저 읽은 감상으로 말씀드립자면, 과하게 카프카의 세계를 모사하는 바람에 찬쉐나 크러스너호르커이처럼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거 같았다. 그리하여 요샌 이름 좀 났다 하면 어김없이 명단에 오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영원히 걸지 못할 것이다. 놀랍지? 어떻게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극동의 일개 서생이 나름대로 튀르키예 소설의 대표선수 가운데 한 명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지? 이유가 있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을 재미없게 읽은 이유는 ①작품 속에서 카프카가 너무 구체적으로 떠올랐던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었지만, 지금 독후감을 쓰기 전에 하산 알리 톱타시가 누구인지 구글검색 해보니, 세상에, ②2020년 12월에 성추행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였는데 자신이 톱타시에게 성추행을 당했노라고 선언한 여성이 약 스무 명에 달해, 그동안 톱타시의 책을 출판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에베레스트 퍼블리케이션스마저 전속계약을 파기할 정도였으니, 이런 작가를 다분히 정치적 성향이 돋보이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아무리 톱타시의 작품이 좋더라도 겁도 없이 상장과 상금을 던져줄 리 없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출판목록을 보면 2020년까지 15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2020년 이후로는 단 한 권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그는 튀르키예의 포스트모던-모더니스트, 튀르키예의 카프카로 명성을 떨쳤으나 결국 타의에 의하여 절필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16년부터 영어권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해 이제 잘 하면 돈방석에 올라갈 수 있을 찰나에 그놈의 손모가지 때문에 인생 거덜난 거다. 이런 성추행과 혼외 연애는 감출 수 없다. 조물주는 사람의 입을 그렇게 무겁게 디자인하지 않아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날 일, 아예 시도할 생각도 않는 것이 훗날 동네방네 사면팔방 쪽팔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거 뽀록나면 진짜 쪽팔릴 거 같다. 나 같으면 이민간다.
튀르키예 작가라면 대개 이스탄불 근처에 살고,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근방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톱타시는 그러나 더 동쪽, 수도 앙카라에서 가까운 작은 도시 바클란에서 태어나 자란 58년 개띠 아저씨다. 작품해설에서 바클란을 그냥 소도시라고 해 두었는데, 소설의 무대는, 만일 바클란이 정말 작은 ‘도시’라고 한다면, 이 도시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황량한 마을, 책 속에서는 편의상 읍이라고 했을 뿐인 오지, 한쪽으로는 마치 벽wall같은 절벽이 서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평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치욕스럽게 신과 국가에게 버림받은 곳이라고 무려 16년째 역임하는 읍장이 스스로 평한 삭막한 곳이다. 만일 이 읍에서 무슨 일이나 사건이 벌어지면, 읍장은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을 가야 도착하는 도시, 앙카라 급인지 바클란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도시의 관청에 가 일/사건을 보고하고 <성>에서 측량사가 그러했듯이 그저 말로만 알았다는 대답만 들을 뿐 아무런 대책이나 지시나 공문 없이 다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그래도 튀르키예는 아무리 독재정권이 수십년 동안 권세를 잡아도 읍장도 선거를 통해 뽑는 지방자치가 활성화했던 모양이라, 이번에도 읍장이 또 연임에 성공했다. 그동안 읍장은 4년에 한 번씩 당선 축하 파티라기 보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대낮부터 느긋하게 구운 닭과 파프리카를 안주로 잔뜩 라크(술)을 마셔대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읍에서 제일 먼저 실종된 사람은 이발사 즐근 누리였다. 읍장이 처음으로 읍장 선거에 당선하여 당선을 자축하기 위해 라크를 마시려 할 때, 즐근 누리의 안사람이 읍장을 만나러 집으로 쳐들어왔다. 여사님 하는 말이,
“이 화상이 어제 이발질을 잘 하다가 난데없이 ‘내 영혼이 오그라든다!’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집에서 뛰쳐나갔지 뭡니까? 여태 돌아오지 않아 동네사람들하고 온갖 곳을 뒤져봤는데 보이지도 않는 거예요. 아마 대처로 내뺀 거 같은데 그러면 세 아이와 쇤네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깜깜무지하니 읍장님께서는 어서 제발 제 서방을 찾아주시든지 어디서든 그 화상을 끌고 오십소서.”
누리가 왜 실종됐을까? 누가, 어느 기관이 슬쩍 접근해서 납치해간 걸까(K처럼)? 이발소 바깥에 한 발을 딛자마자 딱정벌레는 아니고 땅강아지로 변신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까? 주민들은 누리의 실종 뒤에 엄청난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실종과 비밀을 연상하자마자 한 순간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진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어떤 종류가 됐건 비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제 읍장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 먼 길을 떠나 도시에 도착해 상급기관에 들러 누리의 실종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강구해달라고 하지만, 도시의 관리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정말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건 아니고, 도무지 <성>의 여관에 틀어박힌 관리처럼 엉뚱한 말만 해대고 거의 쫓아 보낸 거다. 관청 하는 일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은 읍장은 도시의 거의 모든 커피집, 목욕탕, 여관, 이발소에 들러 ‘즐근 누리’라는 이름과 생김새와 체격을 말하고 보는 대로 집에서 애타게 찾고 있다고 얼른 돌아오라 말해달라고 부탁한 후 다시 말을 타서 하루 이상 걸려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을의 한 방향엔 여전히 건조한 먼지들만 풀풀 날리고, 아주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소식도 가져오지 않는다.
읍민들은 동요한다. 즐근 누리는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시체가 된 지 오래지만 공식 기록부에는 트럭 운전수로 기록했을 거야. 전국을 떠도는 직업. 주소 없는 직업이잖아. 그런데 도무지 풀지 못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국가는 누리를 제거할 가치가 있다고 봤을까? 사실을 알고 보면 즐근 누리의 정체가 K라서?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말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도붓장수가 그러던데. 다시 주민들이 머리를 굴린다. 만일 누리가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도붓장수가 틀림없이 국가 정보원이라는 증거야.
이때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 등장해 사람들을 꾸짖는다. 다들 정신이 나갔구먼! 도붓장수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은 게 벌써 몇 년 짼데! 그러나 도붓장수를 입에 올린 몇몇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를 보았다고 코란에 대고 맹세를 했던 거였다. 이야기는 갈수록 꼬이기만 한다.
몇 년이 흐르고 새로운 이발사가 마을에 도착한다. 평온한 모습이지만 사형집행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과거가 지워진 인물. 이이는 읍장에게 누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의 눈길로 누리의 아내를 40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 바라본다. 당연히 이이가 실종된 즐근 누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웃에 사는 구두장이는 생각한다. 누리가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머나먼 어딘가에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읍장은 마을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고, 누리의 아내는 누리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이발소를 써도 좋다고 승낙한다.
그리하여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몇 년에 걸쳐 이발소를 운영하고, 귀머거리 아이를 조수로 두었는데, 하루는, 하필이면 화자 ‘나’가 이발소에 대기 손님으로 기다리고 있던 날, 이발의자에 앉은 손님의 얼굴에 비누칠을 잔뜩 해 놓은 상태에서 면도날이 변변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조수에게 얼른 달려가 면도날을 사오라 지시한다. 그러나 소년은 이발소를 나가더니 감감무소식. 핏대가 오른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조수를 찾으러 나가더니 그도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 속에는 몇 건의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실종자가 여성, 특히 미혼일 경우에는 누명을 써 읍장과 읍의 사실상 경찰 역할을 하는 파수꾼에 의하여 고문을 당해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리는 청년도 생긴다. 그러다가, 세상에나,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이발사 즐근 누리가 누더기 꼴을 하고 돌아오고, 헤까닥 돌아버린 청년의 정신을 돌아오지 않은 채 허리가 잘라져 죽는 등, 실종에 이은 누더기 차림의 귀향과 여러 형태의 죽음이 마을에 내려 앉는다.
이게 다다. 포스트 모던.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기 보다 그냥 카프카의 사생아. 사생아라서 너무 닮았다. 앗참, 실수. 요즘 시대에 사생아라는 표현은 무례하다. 사과한다. 카프카의 체세포 복제품이라고 바꿔 말하겠다. 이 말도 먼 훗날엔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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