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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기억의 빛
  • 마이클 온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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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4
  • :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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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마이클 온다치는 1943년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태어난 캐나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대학교수 기타 등등인데, 부계 혈통이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다. 알코올 오남용으로 평생 고생하다 일찌감치 세상을 등진 아버지 머빈 온다치 Mervyn Ondaatje는 스리랑카 타밀족과 더치 브루거Dutch Brugher의 결합으로 태어났는데, 더치 브루거는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스리랑카 싱할라인이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독후감이 길어지는 위험이 있어도 스리랑카에 대해 좀 알아보자.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스리랑카에는 산 속에서 힌두교의 3억 마리가 넘는 숱한 신을 믿으며(신을 세는 단위로 ‘마리’를 써서 나는 지옥 갈 거 같다) 제일 큰 부족을 이루었던 싱할라 족과, 바닷가에 불교를 믿는 소수민족 타밀족이 사이좋게 살았다. 이후 마르코 폴로와 바스코 다 가마가 출몰하고, 섬 저 먼 바다에 앞을 가릴 만큼 큰 돛을 단 상선과 군함이 들이닥치더니 하늘 같은 흰 말을 타고 섬에 내린 하얀 피부의 서양 것들이 총을 쏘며 섬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해 제일 먼저 만난 원주민이 당연히 바닷가에 살던 타밀족. 서양인들은 타밀족에게 먼저 기독교를 전파하고 그들을 수하에 두고 온갖 잡일과 막일을 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다 개중에 똑똑한 사람도 눈에 띄어 조금씩 하찮은 권력을 쥐어 주었는데, 타밀족이 저 산 위의 싱할라 족보다 그나마 권력이 세지기 시작하고, 먹고 사는 것도 여유가 있어서, 싱할라 족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세월이 몇 백 년 흘러 이제 실론 섬에서 백인들이 떠나버리자, 여태 상대적 박탈감에 치를 떨며 불만이 고조된 다수부족 싱할라는 타밀족을 아예 거덜을 내기 위해, 차라리 학살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으로 탄압을 하면서, 나라의 이름도 실론에서 싱할라 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스리랑카로 했단다. 내가 뭐 아나, 셰한 카루나틸라카의 <말리의 일곱 개의 달> 독후감을 쓰기 위해 메모했던 것을 참고하면 이렇다는 거다. 그래서 정상적이면 타밀족과 싱할라족의 피가 합쳐지기 곤란하건만, 알코올 오남용자 머빈 온다치 씨는 싱할라족은 싱할라족이지만 포르투갈 또는 네덜란드의 피와 혼혈인 싱할라족이라서 출생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 도리스 그라티앤Doris Gratiaen은 하필이면 재수없게 오빠의 친구한테 시집간 거다. 20대 말에 과부가 되어 살기 팍팍했던 엄마 아래에서 배울 것 없이 커서, 알코올 사용장애가 심한 남편 머빈 온다치 소령과 결혼해 마이클과 질리언을 낳고 살다가 못살아, 못살아, 더 이상은 못살아 세 번 부르짖고 이혼을 감행해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아들이 11세가 되자 영국에서 마이클을 만나고 다시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했다. 결과적으로 참 잘했지. 그리하여 마이클 온다치는 스리랑카 캐나다인으로 비숍대학, 토론토대학, 퀸즈대학을 거치며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에 영국 요크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지금은(지금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데, 설마 2025년은 아니겠지, 사실이면 올해 여든두 살인데?

  왜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이의 대표작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를, 만일 영화만 보고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당신한테 원작을 꼭 읽어보라고, 그리고 영화가 왜, 어떤 방식으로 작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를 빼먹었는 지, 그게 고의였는지, 구성 상 어쩔 수 없어서였는지 한 번 판단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은데, 아뿔싸, <영국인 환자>의 우리말 번역문이 좋지 않아 차마 권하지 못하는 심정이 애달파서 그렇다. <영국인 환자> 독후감에도 썼던 것을 다시 인용한다면, 스리랑카인으로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온다치의 핵심 메시지(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였다.


  “‘미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난 아무런 상관하지 않아요. 세계에서 피부가 갈색인 사람들에게 폭탄을 투하한다면, 영국인인 거죠.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이 있나 싶더니, 이제는 미국에 해리 트루먼이라는 빌어먹을 인간이 있는 거죠. 모두 그런 것을 영국인으로부터 배운 겁니다.’ (중략) 그는 젊은 군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백인 국가에는 그런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 사랑 줄리엣 비노쉬에 넋이 나가 내용은 뭐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온다치의 핵심 논점은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온다치는 하여튼 <영국인 환자>에서 아시아인으로 전쟁과 전쟁의 종결을 바라보는 비관적인 관점을 드러냈는데, 오늘 소개하는 <기억의 빛>은 조금 다르다. <기억의 빛>만 가지고 온다치를 판단한다면, 그를 유색인이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이이는 한 해에 한 번 정도 고국인 스리랑카를 방문한다고 하고, 이젠 다 늙어서 여전히 그러는 지는 내가 전화를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콜롬보 공항에 내릴 때마다 누이동생 질리언을 만나 쌓인 회포를 풀고, 동생 식구들과 함께 정을 돈독히 쌓는 데 게으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의 빛>에서 주인공 ‘나’ 엄마가 부르는 이름 스티치, 아빠가 부르는 주민등록상 이름 너새니얼과 누나 렌 또는 레이철을 백인이 아니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리지널 잉글랜드인. 마이클 온다치 자신이 세계인, 코스모폴리탄이니까 불만은 없다.


  <영국인 환자>가 2차대전 막바지와 종전 직후의 장면을 그렸다면, <기억의 빛 War Light>는 전후 끈질기게 이어지는 전쟁의 후유증에 관한 소묘라고 생각할 수 있다. 1945년에 주인공 ‘나’ 스티치가 열네 살, 곧 열여섯 살이 될 누나 렌. 어린 남매가 특별하게 전쟁의 후유증을 겪을 일은 없다. 다만 후유증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 그러면 누구? 부모겠지 뭐. <영국인 환자> 같이 전투에 나가 싸우다가 심각한 상이를 입었나? 아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도브 샴푸, 바셀린, 기타 생활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의 고위급 간부직원이었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그간의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을 의미하는 유니레버 아시아 사무소의 총 지배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는 아버지의 개인적 커리어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동시에 가정에서도 중산층에서 한 단계 도약해 어쩌면 남들이 부러워할 부르주아 끝자리 정도에 도달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아버지는 당연히 제안을 수락해야 했고, 아이들도 만날 일에만 열중해서 덤덤해진 아버지쯤이야 1년 정도 안 본다 해도 뭐 그렇게 서운해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문제는 이상한 데서 터졌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싱가폴에 가야 한다는 거다. 세상에. 세상에 어떤 어미가 남편 따라 가느라 런던에 의지가지 없는 십대 남매 둘만 달랑 남겨 놓겠느냐고? 그러나 아직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런 일도 있는가 보다 싶어, 그냥 그랬다. 부모는 3층에 세들어 사는 월터에게 남매의 후견을 부탁했단다. 평소에 그냥 그런 이웃인가 싶었는데 부모와는 일로 좀 친했던 모양이지?

  이래서 아버지는, 때는 바야흐로 1945년이라 랭커스터 폭격기의 후예인 신형 아브로 튜더1에 올라 시속 480킬로미터로 몇날 며칠을 날아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어머니는 런던에 남아 몇 주 아이들 뒷바라지를 마감한 다음에 작은 은색 트렁크에 자기 짐을 챙겨, 떠났다. 남매를, 남매가 별로 정을 느끼지 못하는 후견인 월터, 남매가 ‘나방’이라 불러 훗날 진짜 이름 월터를 기억하지 못할 거구의 남자에게 맡긴 채.

  이쯤 해서 원래 제목 War Light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War Light, 전시에 적기의 폭격에 방어하는 동시에 아군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당연히 수송도 이에 포함되고. 이 책에서 수송이라 함은 나중에 밝혀지기를 런던 모 성당에서 제조한 니트로그리셀린과 폭탄을 런던 시내에 있는, 기상천외해서 누구도 그곳에 화약을 집결시킬 줄은 꿈에도 모를 장소까지 트럭에 싣고 야밤에 운송하는 일이었는데,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을까봐 헤드라이트를 켤 수 없어서, 아주 미미한 광도의 빛만 비추고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길을 헤쳐가야 했다. 이때 이 ‘아주 미미한 광도의 빛’을 War Light라고 한다. 다른 뜻도 있지만 하여간 책에서 말하는 War Light는 그렇다. 사전 찾지 마시라. 아예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찾아보시는 분 꼭 한 명은 있다. 누군지도 안다. 흐흐)


  한 눈에 보기에도 범죄자 비슷한 남자인 나방. 시간이 조금 지나 그나마 친해지자, 자신이 어떻게 어머니를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준다. 나방은 전시에 어머니와 함께 그로스브너 하우스 호텔 옥상에 있었다는 “새둥지” 참호에서 화재 감시원으로 일했단다.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공습하면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화재가 집중된 곳을 소방서에 알려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

  그러다가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진짜 했던 일은 새둥지에 세워진 고성능 안테나를 이용해 독일에서 발신한 모스 부호를, 놀라운 재능으로 누구보다 쉽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어머니가 이를 다시 대륙의 대 독일 저항투쟁 단체에 알리는 일을 담당했다는 거다. 쉽게 얘기해서 렌과 스티치의 엄마는 전직 정보원. 이를 알게 된 건, 엄마가 집을 떠난 얼마 후, 렌이 엄마가 가지고 가려했던 트렁크를 집에서 발견하고, 트렁크 속에 든 모든 물건 역시 그대로 있는 걸 알게 된 이후이다. 엄마는 결코 싱가포르에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모르지. 엄마는 여전히 영국 외교부 소속 정보부원이었으니까. 그래도 골든 부커상을 수상한 마이클 온다치가 주인공의 엄마로 상정한 인물이니 정보부 요원이라도 그냥 정보부 요원이면 좀 그렇지?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때에 따라서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이었다. 이런 요원은 같은 정보원 사회에서 당연히 적들이 비일비재하고, 언제 그들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을 지 늘 각오를 해야 하는 법. 저 위에서 말한 전후 후유증은 이걸 말하는 것이었고, 때에 따라 후유증은 간혹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집단의 학살의 시발을 만들기도 했었으니, 이런 요원의 자식 역시 후유증 또는 복수의 대상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건 너무 안이한 판단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방과 훗날 화살이라 불리는 요원에게 딸과 아들의 보호를 요청하고 잉글랜드 외무부의 새로운 지령을 수행하러 저 멀리, 발칸으로 숨어들어갔던 거였다. 어떠셔, 흥미진진하겠지? 그렇지는 않고, ‘나’ 스티치, 너새니얼의 성장기와 경험이 더 많거나 비슷한 분량이어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기대하지 말고 읽는 편이 훨씬 좋을 듯하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455번으로 중판을 찍었다. 초판은 1만9천원, 중판은 1만8천원. 천원 차이라도 이런 시도는 칭찬받아야 한다. 박수 세 번, 짝, 짝, 짝! 초판 번역은 아밀, 중판은 김지현.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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