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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세레나데>를 쓴 쥴퓌 리바넬리? 헛참, 그거…
책을 열면 O.Z. Livaneli가 쓴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한국에서 출판한다니 기쁘다는 얘기다. 문제는 다음 장에 실린 소설가 장강명의 “추천사”.
“낙원과도 같았던 작은 공동체에 탐욕스러운 외부인이 들어오고, 마을은 점점 망가져 마침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2008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독재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하지만 2022년 한국 독자들에게도 울림이 크다.”
출판사 호밀밭의 편집부장과 장강명은 몰랐을 걸? 이 추천사로 인하여 <마지막 섬>은 첫 두 페이지, 딱 두 페이지만 읽고도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개할 지 눈에 훤히 보이고 말게 될 것임을.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정말로 소설 초반부터 작가가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든 읽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지루해 어쩔 줄 몰랐다. 지루한 책을 읽을 때는 유독 허리와 무릎이 조근조근 쑤셔, 읽다가 벌떡 일어나 도서관 열람실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잦았다. 이게 뭐야, 마치 1980년대 의식화 교재, 의식화 교재이기는 한데 그것도 성인용도 아니고 고등학생용도 아닌, 초등생이나 중학생을 위한 생 기초 교재 수준에 그친다. 그런 거 있잖아. “아름답고 평화로운 다람쥐 나라에 너구리가 신발을 팔러 왔어요. 너구리는 늘 맨발로 사는 다람쥐한테 무료로 신발을 나누어 주었어요. 다람쥐들은 몇 년 동안 신발을 신고 다녀서 발의 굳은 살이 다 풀려 이제는 맨발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자마자 너구리는 갑자기 신발을 돈 주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신발 값을 받지 않아 많이 밑졌다고 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신발을 팔았답니다. 다람쥐들은 신발을 사기 위해 다 가난해졌고, 돈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자기 땅을 팔기 시작했어요. 다람쥐들의 땅도 다 팔 수밖에 없게 되자 너구리는 다람쥐들을 다람쥐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답니다.” 대충 어떤 식인지 기억날 거다.
아, 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그래도 리바넬리인데 혹시 알아? 마지막에 신묘한 뒤집기 결말이 놓여 있을 지? 결국 혹시 했다가 역시로 끝났지만.
작품은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 비밀’로 지켜왔던 그 지상 낙원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외딴 섬.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밤이면 자스민 향기에 뒤덮이는 숲 속에 자리한 낡고 오래된 집과 함께 세월에 맡겨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독립된 세상. 쥴퓌 리바넬리의 이 섬에 관한 묘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섬의 평화로운 자연환경은 마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해수면에 드리우는 우윳빛 안개와 저녁 무렵에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을, 그리고 갈매기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바람의 속삭임과 라벤더 향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일 동이 떠오를 무렵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해무에 휘감겨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쌍둥이 섬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다 나오며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은? 집마다 피어있는 보라색 부겐빌레아꽃은? 그리고, 한밤의 린덴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말 한 마디로 하자면 율도국이요, 결국 목이 잘려 죽은 토마스 모어 경의 말에 의하면 유토피아 자체인 섬, 마지막 남은 지상 낙원으로, 마지막 섬이다. 오래전에 대단한 자산가가 섬 전체를 매입해 자산가 수준으로 봐서 매우 소박한 별장을 짓고 살다가, 혼자 살기 적적했는지 지인 몇을 불러 자기 집 근처에 크지 않은 별장을 짓고 함께 살게 배려했다. 이렇게 해서 딱 40개의 별장, 절대로 40호를 넘지 않는 작은 촌을 이루어 그들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바지 차림에 매우 간소한 웃옷만 입은 채 수영을 하든지, 그늘에 매인 해먹에 누워 잠을 자든지, 낚시를 하든지, 하여간 무슨 수를 써서 매일의 권태만 벗어나면 그걸로 만족하다가, 드디어 해가 넘어가면 뜻 맞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얇고 긴 화이트와인 잔을 기울이며 살던, 율도국이요 유토피아였던 섬. 며칠에 한 번 육지에서 연락선이 도착하지만 접안 시설이 큰 배를 맞이할 수 없어 작은 보트를 타고 짐을 가져와 판매를 하는 구멍가게가 하나 더 있을 뿐. 그런데 잘 보시라. 처음부터 섬에는 문제가 있었으니, 건물, 즉 39개의 별장은 자산가(의 아들) 말고 초대에 응한 이들이 지어 그들 소유이지만, 섬, 즉 토지는 전부 죽은 자산가에게 상속을 받은 아들, 작품 속 40호 가운데 1호 별장 주인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건 언제나 작지 않은 문제가 될 것임을 독자는 애초부터 짐작하고 있을 수밖에.
그리고 나의 끈질긴 고질인 계급의식. 이 율도국 거주민 40가구는 도대체 무얼 해서 먹고 살지? 해가 뉘엿뉘엿 지면 아무렇게 막 우려낸 포도주가 아니라 육지에서 수송해온 질 좋고 비싼 화이트와인을 홀짝일 수 있으려면 그만한 수입이 있어야 할 터. 나중에 알려지지만 섬에서 유일한 소득원은 주민들 스스로 저 높은 나무에 기어 올라가 따서 껍질을 벗겨 내다 팔아 돈과 바꾸는 잣 수확밖에 없다. 그것도 사실 모두 1호 소유이기는 하지만 마음씨 좋고, 마음이 좋은 만큼 돈도 많은 1호가 눈 감아 주어 여태 팔아먹은 것인데, 잣이 아무리 겁나 많이 달린다고 해도 오직 그거 하나 따서 팔아 날마다 화이트와인 음용이 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기를, 원래 출신이 대단한 자산가 1호가 초청한 1호의 지인이었으니 1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인간들이었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육지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자가증식하여 꼬박꼬박 통장에 새로운 돈이 입금되는 인간일 것이라는 짐작. 이거 틀렸어? 율도국, 또는 유토피아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런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저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잣을 따온다고? 왜? 차라리 염병을 하지.
그래도 치사하게 이렇게 미리 딴지 걸지 말고 읽기 시작하자.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마을에 찾아온 인간은, 이미자 노래가사처럼 총각 선생님이 아니라 장기집권한 후 어쩔 수 없이 사임한 대통령이었다. 소설 속 계속 ‘전 대통령’이라 불릴 전직 군인 장군 출신의 이 무지막지한 깡패는 피노체트나 전두환 같은 기질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이이가 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24호 별장의 변호사가 숲속에서 조깅 도중 심장발작으로 죽는 바람에 공실이 된 24호 건물이 매물로 나온 것을 전 대통령의 수하가 보고하여, “전 대통령의 조용한 은퇴생활을 하기 위해” 육지에서 멀고, 거리가 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 오래 계속된 철권통치 후에 국민에게 외면당해 혁명의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속으로는 거의 강제로 사임시켜, 될 수 있으면 국민의 입방정에 오르지 않기 위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36호 입주자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잠시 빈 상태로 있었는데 ‘나’가 이혼 후에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던 유부녀 라라와 야반도주를 해 떠나왔을 때의 ‘나’는 수많은 상처와 실망 그리고 큰 아픔을 경험한 후였다고 주장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주인공이니까. ‘나’와 라라는 7호에 사는 소설가와 친하게 지냈는데, 7호가 전 대통령이 섬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악과 함께 크게 걱정을 하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안에 섬 전체가 황폐화될 것이며, 불행이 온 섬을 뒤덮을 것이라고 신음한다.
그리고? 당연히 7호 소설가의 예언대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전 대통령의 불 같은 성격과 폭압적인 의사결정과 결정의 집행. 어디까지나 주민투표를 통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민주적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전 대통령의 기만과 현혹과 유혹적인 선동으로 인해 섬은 급격하게 지옥으로 변해간다. 리바넬리가 그린 지옥도.
리바넬리 씨, 미안하다. 나는 지옥처럼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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