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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할리우드
  • 찰스 부코스키
  • 12,420원 (10%690)
  • 2019-04-25
  •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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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부코스키는 여러 작품을 읽은 걸로 알고 지냈는데, 지금 세어보니 딸랑 세 권 밖에 안 된다. <우체국>, <팩토텀>, <호밀빵 햄 샌드위치>. 근데 참 신기한 작가다. 1920년에 독일에서, 까마득한 조상은 폴란드 출신으로 짐작하는 독일계 미국인의 아들로 출생해, 전후 독일의 무지막지한 인플레이션을 피해 부모 손잡고 대서양을 건너 볼티모어에서 잠깐 지내다가, 열 살 이후 젊은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시나리오 작가.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지만 종종 짧지 않은 실업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 하인리히(또는 헨리) 부코스키 선생은 당대 가난한 가장들이 흔히 그랬듯 괜히 자존심만 점점 세져서 아들 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가볍지 않은 구타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도 조금 섞여, 십대 초반의 찰스 부코스키는 막역한 친구이자 알코올 외과의사의 아들 빌의 지도편달 아래 훗날 알코올 의존증 환자로 진입할 될성부른 떡잎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대학은 아니더라도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들어갔다가 2년만에 때려치우고 시와 소설 쓰는 일에 접어들었다. 근데 그것도 이 방면으로 이름을 내야 먹고 사는 것이라서, 이때부터 부코스키는 사회 저 바닥 일을 하며 근근이 호구지책에 급급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읽은 그의 장편소설에 그대로 다 나온다.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건, 당연히 ’먹고’ ‘사는’ 의식주 말고도 상당한 돈을 알코올을 구입하는 용처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한참 젊은 청춘이 알코올을 섭취했으면 술집과 골목에서 왕왕 주먹싸움도 벌였을 것은 명약관화. (나도 어린 시절부터 술을 마셨지만 천성이 귀여워 싸움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찰스 부코스키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손이 작아 펀치에 취약한 반면 맷집 하나는 아예 타고 난 체질이라 점점 싸움질에 익숙해지자 동네 양아치 가운데에서 추앙을 받는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막 사는 와중에도 부코스키는 가끔 술에서 각성한 상태가 되기만 하면 구식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 거의 열 손가락을 사용해 쉼 없이 타자를 쳐가며 시도 쓰고, 잡문도 쓰고, 단편소설도 쓰고, 아주 가끔 장편소설 습작도 했단다. 주로 시와 단편소설 및 잡문 위주이기는 했다. 첫번째 장편소설 <우체국>은 그의 나이 51세였을 때이니. 이렇게 주로 지하신문이나 하층 시민이 주로 읽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그냥저냥 십여 년간 우체국에서 잡일을 하는 직원으로 사는 부코스키를 주목한 남자가 있었으니, 독립출판사 블랙 스패로우 프레스의 존 마틴. 그는 부코스키에게 만일 전업작가를 한다면 평생 한 달에 1백 달러의 월급을 지급하겠다고 제의했고, 이를 수락해 그렇지 않아도 곧 잘릴 것 같던 우체국에다 당당하게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와 단 한달 만에 첫 장편소설 <우체국>을 출간하며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다. <우체국>은 내게도 처음 읽어본 찰스 부코스키였는데, 부코스키보다 2년 아래인 잭 케루악의 펑키 기질보다 훨씬 막가는 인물을 설정한 난리법석으로 읽었으며, 처음엔 그렇게 무지막지한 작가의 무지막지한 작품으로만 생각했다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거 참 이상한 매력이 있는 작가라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그나마 마음 하나는 따뜻한 동네 형 이야기 같아지면서 부코스키의 작품을 찾아 읽는 수준까지 바뀌어 버렸던 거다.

  이렇게 세상을 갈팡질팡, 난리법석으로 살아버린 젊은 시절의 찰스 부코스키. 작품 속 찰스 부코스키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행크 치나스키. 여기까지가 내가 전에 읽은 부코스키의 소년시절, 청년시절, 40대 우체국 시절이다.


  이제 65세가 된 노인 찰스 부코스키 또는 행크 치나스키. 그는 그동안 장편소설 네 편, 시집 열일곱 권, 단편소설집 몇 권, 에세이 몇 권 등 다양한 책을 출판하면서 주로 서민계층의 두터운 팬을 확보한 나름대로 유명 시인, 작가로 이름을 냈다. 중증 알코올 의존증에서 약간 빗겨나간 그는 딱 그만큼 경마에 취미를 붙였고, 나름대로 경마의 원칙을 세워 소소하게 돈을 벌어오는 수준이 되었는데, 이런 지경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꼬나 박았을까, 생각해보면, 유명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순다섯 살이 되었음에도 간신히 거지꼴을 면한 수준이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다 찌그러져가는 폴크스바겐 고물차를 몰고 다니며, 아직 자기 집 없이 월세를 전전하는 노령우대자. 이런 그에게 할리우드 영화감독 종 팽쇼가 연락을 해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묻는다. 그래서 젊은 아내 세라와 함께 팽쇼의 집에 갔더니 긴 검은 머리의 여자애가 하나 있다가 자기 이름이 포피Popppy라고, 다 합해 알파벳 p가 넷 있는 이름이라 하는데 세상에나, 별명이 브라질 공주인 포피가 치나스키가 쓸 시나리오의 후원자 중 한 명으로 선수금 1만 달러를 제시했던 거다. 하지만 행크 치나스키는 오로지 시와 단편에만 관심이 있어서 팽쇼 집에 있는 고급 와인만 실컷 마시고 정작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베니스에 전체 영화 촬영소를 소유하고 있는 데니 서버라는 젊은 제작자가 행크에게 시사실을 대여해주겠다고 해서 다시 가봤고, 그곳에서 감독 종 팽쇼와 함께 그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프랑스 배우 프랑수아 라신이 마음에 들어 기꺼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수아 라신. 백발인 동시에 금발. 불그죽죽하게 변해가는 분홍색 얼굴이 못된 장난을 치려 하는 남학생 같은 표정이어서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는 인상이라 넙죽 허락을 했는 지도 몰랐다. 근데 사실 프랑수아 라신은 멘탈에 조금 문제가 있다. 도박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도박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심사숙고, 경향과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시뮬레이션 게임에 몰두한다. 후에 종 팽쇼와 함께 숙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몰려 아프리칸 미국인들만 사는 게토 지역으로 이사해서도 닭 여섯 마리를 키우기 위하여 끝까지 게토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이다. 선량한 인간이되 나사가 몇 개 빠진 인물로 생각하면 여지없다. 자신이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실험하기 위해 카지노에 갔다가 거금 6만 달러를 몽땅 잃는 참변을 당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치나스키는 시나리오를 써 주기로 하고 선수금 1만 달러를 받는다. 이와 거의 동시에 실제로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이 미국보다 독일에서 먼저 큰 인기를 끌었던 바, 독일에 있는 대리인 카를 포스너로부터 책 세 권을 번역 출판해 선인세 3만5천 달러를 받았으니, 거의 한 방에 무려 4만5천 달러가 생겨, 졸지에 늙은 부자의 대열에 서게 됐다. 이리하여 치나스키는 세금 혜택을 목적으로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하려 집을 보러 다니고, 차도 새로 검정색 BMW 520i 한 대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고목나무에 꽃 핀 거다.

  행크는 자기 젊은 시절에 겪었던 모든 불행과 알코올 의존증과 난잡한 섹스와 싸움질을 총망라하여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정말로 우여곡절 끝에, 감독 종 팽쇼가 전기톱으로 자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까지 해야 했던 미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영화화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는 미키 루크가 치나스키 역을, 페이 더너웨이가 완다 역을 맡은 <술고래 Barfly>, 소설 속에서는 <짐 빔의 춤>은 프랑스 칸 영화제에 출품까지 해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랐으나 당연히 미끄러지고 만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환상의 장소 할리우드. 그러나 이 속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늑대 상태가 엄연히 존재하며, 쥐뿔도 든 것 없으면서도 낯바닥 하나 잘 생긴 거 가지고 세상만사 사는 데 걱정 한 번 해본 적 없는 스타들의 오만방자도 당연히 있으니, 오히려 우리 시정잡배들이 모여 사는 사바세계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곳에서 한 계절 시나리오 작업과 영화 제작의 한 자리를 꿰고 있었던 행크 치나스키, 또는 찰스 부코스키가 이 과정을 끝내자마자 뒤 돌아서, 그럼 영화 한 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걸 소설로 한 번 써볼까? 싶어 이젠 구식 타자기가 아니라 자기 전담 세무사가 권한 전동 타자기에 백지를 걸고 열 손가락을 이용해 타자를 누르기 시작하는 작품.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이니 당연히 재미있다. 그러나 전작, 외롭고 가난하고 길도 보이지 않은 부랑자 신세의 젊은 영혼의 방황에 비하면 좀 덜 재미있다. 역시 행크 치나스키는 동네 형일 때 제일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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