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 개띠 아저씨 마틴 맥도나. 아일랜드 부모가 영국에서 낳았으면 아일랜드계 영국인일까? 책 앞갈피에는 영국 런던에서 자랐다고 하고, 위키피디아는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보냈다고 하고, 하여간 지금은 이스트 런던에서 유명한 배우인 피비 윌러-브리지와 연애하며 골수백이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단다. 요즘엔 채식한다 그러면 오히려 좀 있어 보인다. 그래! 고기 좀 먹지 마시라. 고기 값 떨어지면 나나 열심히 먹게. 그건 그거고, 이 마틴 맥도나, 이력이 대단하다. 연극이면 연극, 영화면 영화 쪽으로 말 그대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미국 아카데미상 한 번, 영국 아카데미상 여섯 번, 골든 글로브상 두 번, 최고의 연극관련 상이라는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세 번 휩쓸었다. 이 정도면 가히 천재급이다. 남들은 평생 박 터지게 해봤자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을 가을 아침에 호박 떨어진 거 줍듯 하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원래 그런 거다. 이런 인간이 또 생기기도 괜찮게 생겼거든. 참 재수없어, 그지?
<필로우맨>은 맥도나의 숱한 대표작(천재잖아, 천재) 가운데 하나로 2004년 로런스 올리비에 상 최우수 신작 연극상을 받았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2005년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가 미역국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친애하는 대일고등학교 후배 최민식이 주인공 소설가 카투리안 역을 맡아 초연을 한 이후 꾸준히 계속 무대에 올리는 “인기” 작품이란다. 계속 공연하는 인기 작품이라면 당연히 불멸의 명작이거나 자극적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데, <필로우맨>은, 극작가가 천재라잖아 천재, 강렬을 넘어 충격적인 우화와 잔혹극을,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말로만 관객에게 잔혹한 우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내가 이 작품에 대해 차마 뛰어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막장까지 가는 극단의 공포적 파시스트 국가의 가장 악랄한 공권력을 가진 경찰 취조실이라 해도 그렇지, 아이고, 등장인물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욕설이 너무도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역자 서민아 역시 맥도나하고 같은 70년 개띠로 덕성여대에서 경영학과 복수전공으로 영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수료한 점잖은 분이 정말 지저분한 욕설을 우리말로 바꾸느라 고생 깨나 했음 직하다. 어느 수준인가 한 구절 정도 소개할까 싶어 정말로 책갈피를 여니 도무지 옮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남녀 생식기를 일컫는 비칭이 표준어 수준으로 등장한다는 말만 보태자.
앞에서 말한대로 무대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경찰서 취조실. 그러나 이 미지의 폭력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경찰은 취조하다가 고문 정도는 기본 상식으로 당연히 하는 것이고, 죄의 경중, 형사들의 기분 여하에 따라 그냥 간단하게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쏘아 즉결처분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최악의 장소이다. 이곳에 소설가 카투리안이 잡혀 들어왔다. 그의 형 마이클도 함께 딸려와서 옆방에 있는 상태.
소설 쓰는 것도 죄라고? 이 나라에서는 그렇다. 어떤 소설을 쓰느냐가 문제인데, 파시스트 국가라면 반정부적이거나 사회비판 또는 저항 문학, 하여간 정치적이겠거니 연상하기 십상이겠지만, 맥도나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으로 1993년 IRA의 워링턴 폭탄테러에 의하여 목숨을 잃은 비극을 우화로 한 블랙 코미디를 만든 적도 있기는 해도, 그런 건 아니고, 카투리안이 마치 19세기 초의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 같이 그로테스크하고 전혀 교훈적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투리안의 소설에 큰 영향을 받아 전혀 교훈적이 아닌 행위를 그대로 흉내내는 일까지 생겨서, 면도날을 속에 집어넣은 사과를 한 소녀에게 억지로 먹여 기어이 죽게 만들었다. 이 엽기적 살인을 진짜로 저지른 인간이 누구냐 하면, 소설가 카투리안의 친형 마이클. 연극은 영화와 달리 한 두 장소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친형을 범인으로 설정해 한 가족의 이야기까지 다룰 수 있게 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이다.
형사들이 생각하기에, 소설가라는 작자가 작품을 써서 독자가 그걸 읽고 행위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하지만 소설가는 천성으로 받은 일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팔자.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소설에 쓴 대로 행위 하는 걸 바라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카투리안 역시 아무한테도 “나가서 아이들을 죽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사가 보기에는 카투리안이 “나가서 아이들을 죽여!”라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암시”를 한 것처럼 읽힌다고 주장한다. 이런 소설도 있다:
옛날 옛적에 물살이 센 강변 옆에 마을 이야기. 몸집이 작은 맨발의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따돌렸다. 눈에 띄면 가난하고 작고 꾀죄죄한 아이를 때리고, 욕하고 놀려대도 천성이 밝은 아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워낙 밝고 착해서. 아이는 언젠가 누군가가 자기의 따듯한 마음씨를 알아주고 보상까지 해줄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아이 앞에 새까만 망토의 마부가 끄는 마차가 나타났다. 검은 두건을 쓴 마부가 무서워 아이는 벌벌 떨었지만 저녁으로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꺼내 마부에게 먹겠느냐는 뜻으로 흔들어 보였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아이의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었고, 아이의 가난하고 힘든 집안 이야기까지 다 들었다. 마부는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가득이나 부족한 네 몫의 절반을 이 늙고 지친 나그네에게 주었으니, 나도 너한테 무언가를 주고 싶구나. 오늘은 네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나이가 들면 아마도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내게 감사하게 될 거다.” 그리고는 날이 시퍼런 서양 낫을 휘둘러 오른발 발가락 다섯 개를 단번에 잘라버렸다. 그러고나서 아직도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주워 쥐떼를 향해 던지고는 소년과 쥐떼와 강과, 어두워가는 하멜린 마을을 뒤로 하고 떠났다.
이제 아시겠지? 저 앞에서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를 이야기한 이유를. 몇 년 후 이 나그네가 멋진 피리 하나 들고 하멜린 마을에 나타났을 때, 발가락이 없어 다리를 저는 바람에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한 예전 맨발의 아이 하나만 살아남을 예정이다. 이렇듯 엽기 그로테스크한 잔혹동화를 주특기로 하는 소설가가 카투리안이다. 이런 엽기성을 알고 보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학습한 것이라는 점도 엽기적. 부모한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이가 정신이 좀 흐린 마이클, 작은 아이가 똑똑한 카투리안. 부모는 마이클을 좁은 방에 가둬 두고 7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고문했다. 이제 다 자라 힘이 세진 카투리안은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 날을 잡아 베개로 아버지의 얼굴을 지긋이, 꾸욱, 오래 눌러 죽인다. 이어서 같은 베개로 엄마의 얼굴도 지긋이, 꾸욱, 오래 눌러 죽인다. 뭘로? 베개로. 그래서 필로우맨이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필로우맨이라는 베개로만 만들어진 한 남자가 있었다. 머리는 원형 베개. 단초로 만든 두 눈과 웃는 커다란 입. 웃느라 벌린 입에 난 이도 작고 하연 베개로, 온몸이 다 푹신푹신한 베개로 만들어졌다. 이 필로우맨이 말한다. 마이클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세상을 사는 거 자체가 고통이야. 그걸 겪다가, 겪다가, 겪고 난 다음에 결국 죽는 것보다 지금 깔끔하게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