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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시작으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만 열다섯 번 출간했다. 그리하여 나는 여성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작가만을 위한 세계문학 시리즈가 등장한 것으로 알았다. 작가의 젠더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구성도 만족스러워 여성 작가만 천착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작품만 좋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은행나무는 에세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순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름을 크게 내지 않은 제럴드 머네인의 작품 <평원>을 선택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에세 시리즈에서 처음 나온 남성 작가라서. 별 일이 다 있네.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에서는 사뮈엘 베케트의 뒤를 잇는 천재라고 이름이 높고, 호주 땅을 떠나본 적도, (하다못해 나도 타본 적 있는) 비행기를 탄 적도 없으면서 십 년이 넘게 꾸준하게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있단다. <평원>을 읽어본 내 소감을 노벨상과 관련시켜 말해보자면, 아뿔싸, 세월이 너무 지났다. 작품은 스웨덴 한림원 지하실에 사는 늙은 토끼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질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나하고 생일이 같은 1939년생으로 올해 85세. 한림원 토끼들은 이제 더 이상 늙은이한테 상을 안 주기로 결심을 한 것 같다. 스웨덴까지는 자기 차를 운전해서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살던 밀란 쿤데라도 한림원 구경을 못하고 죽었고, 커다란 팬덤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필립 로스도 스웨덴 행 티켓을 끊었다가 취소하고, 끊었다가 최소하고 또다시 끊었다가 취소하면서 죽었다. 그러니 제럴드 머네인도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만수무강에 좋을 듯하다.
제럴드 머네인은 1939년 초에 빅토리아주 멜버른 변두리에서 경마장 도박에 재산을 날린 철없는 아버지의 네 자매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났다. 숱하게 이사를 다니다가 작은 만灣bay에 살던 부유한 할아버지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 어린 제리는 수영도 안 배우고, 물도 바다도 마땅하지 않아 훗날 평원을 향해 내륙쪽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역자 해설에 나온 인생기가 위키피디아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열일곱 살에 맬버른에있는 라살 대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57년에 난데없이 가톨릭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만에 못살아, 못살아, 하며 뛰쳐나온 후 얼마나 질려버렸는지 아예 신앙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이후 13년간 공무원, 초등학교 교사, 공공기관 에디터 등을 하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교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때려 치운다. 그리고는 전업 주부(主婦 말고 主夫)를 선언, 세 아이의 양육과 가사에 힘을 쏟는다. 동시에 틈틈이 워드 프로세서나 PC가 아닌 구형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 양손 둘째 손가락으로만 자판을 두드려가며 시와 소설, 단편소설, 수필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아내가 먼저 떠난 일흔 살의 제럴드 머네인은 외딴 시골 마을 고로크Goroke의 ‘자기 방’에 머물고 있다.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과 연금을 받고 있으니 늙었다 해도 이제 작품을 쓸 최고의 환경을 마련한 셈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카프카를 인용하며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고 머물면 세상이 스스로 그 방으로 찾아올 것이라 한 바 있다.” (p.148) 카프카뿐일까? 루이 페르디낭 쎌린느가 쓴 <밤 끝으로의 여행>에 나오는 한 소년은 낡은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그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진정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정한 여행’은 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자연을 상상하고 정의하고 구성하는 일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짧은 시간이 지나면 직접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조차 왜곡될 것이니.
<평원>은 이런 의미에서 머네인의 작은 방에 스스로 들어온 호주의 광활하고 황량한 내륙 지역이었을 터.
17세기부터 시작한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당연히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시절과 똑같이 해변지역부터 유럽 문명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주로 호주 남동부에 몰린 대도시, 멜버른이나 시드니 같은 도시, 즉 ‘외곽 호주’에 머물지 않고 내륙 깊숙한 곳에 들어가 물론 농업도 일부 했지만 주로 거대 목축장을 운영했다. 말이 거대 목축장이지 희박한 인구밀도를 지녔던 백호주의 시대에 목장이란 소 한 두 마리가 목장 한 구석에 숨어버리면 찾는 데만 몇 주일이 걸릴 수 있고, 그것도 산채로 발견한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로 광대한 땅덩어리라는 의미다. 주로 대단히 건조하지만 한 번 비가 쏟아졌다 하면 여태 그냥 저지인 줄 알았던 건천이 도도한 강이 되어 흐르면서 이럴 줄 몰랐던 초기 개척자들을 8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까지 휩쓸어버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 번 내륙, 평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목축 부르주아로 구성된 넓은 땅 소수민들의 커뮤니티이기는 하지만 외곽호주 사람과 문화에 스스로 차별을 지었다.
토지와 가축을 토대로 한 부르주아들의 커뮤니티. 이들이 누리는 한정된 문화는 마치 수많은 식객을 거느린 맹상군 같은 고대 중국의 공자公子를 연상시킨다. 외곽 호주에서 자라고 공부하다 이제 평야의 것을 연구하거나, 예술로 표현하고 싶어하거나, 작중 주인공처럼 영화로 남기고 싶어하는 각종 학자, 예술가들은 어디인지 밝히지 않은 호주의 대평원 지대 부르주아들이 아지트 삼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위스키에 취해 있는 호텔로 모여 그들의 후원을 바라 열심히 자신과 자신의 작품 구성을 프리젠테이션 한다. 화자인 영화제작자는 이 가운데 한 부르주아의 마음에 들어 그의 저택 별관에 몇 년 동안 기거하며 영화를 찍고자 하지만 그러하지 못한다. 앞에서 페르디낭 쎌린느의 책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진정한 평야, 평야의 본질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작품은 결코 쉽지 않다. 내 경우를 말해보자.
처음엔 한 영화제작자가 평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데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위하여 평원의 호텔에 들어온다. 이 호텔은 권태에 절고 전 부르주아들이 들러 위스키를 마시며 하루 종일 예술가, 작가들을 면담하면서 누구를 후원할까 선택하는 장소이다. 이들은 남는 것이 시간과 돈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비록 해안지역의 호주인과는 관점이 다르나 나름대로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독특한 문화관과 예술관을 가지고 있다. 주로 평원에 대한 것이다. 오직 평원에 살았고, 그것도 아주 오래 살아서 평원이 내포하는 무수하고 뜻 깊은 침묵과 풍요, 때로는 헐벗음, 더위와 폭우 같은 자연현상, 외곽 호주인들은 알아채지 못할 핵심을 뜻한다.
화자 역시 이들과의 면담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동안 평야를 관찰하기도 하고, 별의 별 생각을 다 드러내는데, 나는 내가 뭐하러 평생 구경 한 번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 호주의 황량한 평원에 대한 글을 그것도 참 재미없게 쓴 것을 읽고 있는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책을 통해 비록 2백쪽도 되지 않지만 나는 틀림없이 인내심 함양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얼른 얼른 후다닥 읽어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디어 영화를 제작하는 화자가 부르주아 일곱 명과의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 장면을 시점으로 내가 읽는 속도는 매우 느려졌다. 이제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던 거다.
제럴드 머네인의 독특한 시각과 문장. 스토리는 차라리 없어도 좋다.
“(화자 ‘나’는) 긴 대화를 통해서 이곳 사람은 일생을 일종의 또 다른 평원으로 이해한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정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원인 가운데 실제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거의 매일 놀라고 있다. (중략) 자신의 좁은 지역을 마치 그 새롭게 발견된 머나먼 땅 너머라도 되는 듯 정교하게 묘사하여 동등한 영광을 얻는 이들이 수십 배 더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야기와 노래에서 ‘시간’을 말할 때면, 친숙하지만 두려운 평원처럼 그들에게 밀려오거나 물러난다고 표현한다.” (p.100)
오랜 세월 평원에 거주하고, 평원의 독특한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는 부르주아 목장주들은 자기 영지의 끝까지 말을 타고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면서 어디는 어떻고 등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셀린느의 <밤끝으로의 여행>을 떠올렸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 작품은 애초에 기대했던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여행 또는 방황을 목적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특정 목장주의 후원을 받아 그의 도서관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부터 영화제작자는 평원의 형상을 필름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갈수록 머네인의 문장은 독자를 확 잡아 끌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내가 (특정 부부의 아내) 그녀를 은밀히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현재 상황과 어떤 다른 여인이 차지하게 된 어떤 저택과 광대한 영지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은 들어가지 못한 드넓은 어느 평원을 사색하고 있는 것이다.” (p.110)
이제 평원은 다양한 의미로 변화한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평원은 평원인 채로. 부르주아라고 해서이 광막한 평원 속에서 늘 행복한 건 아니다. 질식할 정도의 권태와 우울은 노동할 필요 없어 저절로 길고 길게 확장하기만 하는 시간을 보내야만 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제 화자, 영화제작자를 몇 년간 후원한 목장주도 이렇게 말한다.
“날 보게. 내가 눈을 감고 있어. 곧 잠이 들 거야. 내가 의식이 없는 게 보이면 내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내 두개골을 깔끔하게 열어주게. 이렇게 술을 잔뜩 마셨으니 칼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맥이 뛰고 있을 그 창백한 뇌를 들여다보게. 칙칙한 색깔의 뇌엽들을 떼어내는 거야. 그리고 강력한 렌즈로 자세히 살펴봐. 그렇게 해도 평원을 알려줄 건 아무것도 보지 못할 거야. 평원은 오래전에 사라졌어, 내가 보고자 했던 그 땅은.” (p.133~134)
제럴드 머네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는 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평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머네인은 그것을 자기만의 방에 들어 앉아 오직 머리 속에서 이미 알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더 진중하게 읽을 것을. 경솔하게 달린 것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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