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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
  • 유진 오닐
  • 20,800원 (1,040)
  • 2024-09-27
  •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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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기 위해 화면을 열어놓고 시작하기가 쉽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할까?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오닐의 다른 극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이라서 그럴까, 등장인물의 분위기가 유사해서, 특히 3막, 두 주인공 제임스 타이론 2세와 조시 호건의 장면이 <밤으로의 긴 여로>의 어머니와 제이미를 연상시켰다. 독자의 가슴을 후벼 판다는 뜻이다. 특히 나처럼 알코올 의존증세가 있는 독자들은 더 그렇지 않았을까.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 크지 않은 토지를 소작하여 농장을 운영하는 필 호건 씨와 그의 딸 조시. 그리고 땅의 주인이자 단역 연극배우로 활약중인 마흔 살의 독신남 제임스 타이론 2세. 이외에 호건 씨의 막내 아들 마이크와 농장의 울타리를 이웃한 또다른 지주 스테드먼 하더가 잠깐 등장한다. 그러니까 소작농 호건 씨와 딸, 그리고 독신 지주 제임스 사이의 드라마인데, 유진 오닐의 후기작 답게 참 절절하다.

  오닐 자신이 네 번의 퓰리처 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대단히 우울한 가족사를 짊어졌다.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대중적인 연기를 하던 떠돌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훗날 모르핀 중독자가 된 어머니 사이에서, 선천적으로 알코올 의존에 의한 우울증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 같다. 형 제임스는 아버지의 부재와 알코올 중독이 가정이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는 막내 유진에게 질투와 사랑이란 애증을 갖고 있다가 결국 많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삶을 끊어버리고 만다. 오닐은 또한 자신의 알코올 의존증과 이에 따른 우울증 등으로 세 번의 결혼을 했다. 맏아들 유진 2세는 예일대 그리스 문학 교수를 하다가 역시 가족의 유전자 안에 도사린 알코올 의존증을 이기지 못해 마흔 살의 나이로 자살했고, 둘째도 헤로인 중독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아 자기 가솔들과 극빈하게 살다가 역시 자살해버렸으며, 막내딸은 열여덟 살 때 자기보다 서른 여섯 살이 더 많은 영국의 위대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버렸다.

  50대로 접어든 유진 오닐은 후기 시대로 들어간다. 이제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각종 기관에서 상을 받는 외적 출세에 관해서는 마음을 조금 접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1940년대 초반을 말하는데, 당시 나이로 50대면 이제는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지난날을 후회하며, 가끔은 시절 때문에, 내가 시절에게, 시절이 내게 가했던 가해를 떠올릴 때마다 부르르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랬던가,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 특히 “가족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이런 환경에서 위대한 극작 <밤으로의 긴 여로>를 만들었으며, 자신의 진짜 체험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죽고 25년이 흐르기 전에 발표를 하거나, 공연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죽은 지 3년 만에 희곡은 출판되었고, 스웨덴에서 초연의 막이 올라, 오닐이 사후에 네 번째 퓰리처 상을 받는 등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이후 미국, 미국을 건너 전 세상 극장가에 새로운 창작 방식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을 읽으면서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상하는 일은 사실 어쩔 수 없다. <… 여로>에 등장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 어머니와 아들 제임스의 망가지는 모습이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소작인 호건 씨와 지주 제임스의 형태로 바뀌기는 하지만. 호건 씨는 제임스 씨와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곳, 즉 집의 바깥, 주로 술집에서는 이해심 많고 사람 좋고, 활달한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는 건데, 집에서는 독선적이고 아들한테 구타도 서슴지 않는 폭군이다. 딸 조시 호건만 빼고. 이 조시 호건이 오닐의 작품 가운데 이례적인 주연급 여성이다.

  카슨 매컬러스의 고딕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키가 많이 큰 여성처럼 조시는 180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도 81킬로그램에 달한다. 크고 단단한 유방, 엉덩이와 허벅지하고 비교하면 날씬하게 보이는 굵은 허리. 특별히 근육은 보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튼튼한 길고 매끄러운 팔. 어느 남자보다 힘이 세서 보통 두 명의 남자가 할 수 있는 노동을 혼자 거뜬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조시에게 남자 같은 면이라고는 없다. 천생 여자. 거친 머리카락과 해를 많이 받아서 주근깨가 촘촘하고 그을렀지만, 검푸르게 푸른 큰 눈동자가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특히 미소가 매력적이다. 옷도 대충 일하기 편한 싸구려 원피스를 입었고, 일할 때는 대개 맨발 차림이다.

  이 거친 야수 같은 아가씨는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독재자 아버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맞붙어 주먹다짐을 한다 해도 도무지 완력으로 당할 수 없고, 말로도 마찬가지다. 주로 1막에서 호건 씨가 되로 주면 조시가 말로 되돌려주는 형국이다. 조시는 이제 아들 가운데 하나 남은 막내 마이크에게 마이크도 모르게 짐을 싸서, 아버지 침대 밑에 숨겨놓은 돈을 몽땅 꺼내 주며, 너도 나이가 찰 만큼 찼으니까 일찌감치 도시로 가 일을 하고 있는 형을 찾아가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은 자기도 알고 있는 큰 덩치의 여자 괴물이라서 관심을 받을 수도,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거나 괜찮은 남자의 배우자가 되어 아이 낳고 살림하는 주부로 살 수도 없으리라, 그래서 아버지 죽을 때까지 일을 돕다가 이후에 스스로 농장을 꾸려 사는 수 말고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시는 마을의 많은 남자와 만난다. 그냥 만날 뿐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에서는 조시 호건이 마을의 모든 총각들은 물론이고 유부남들도 숱하게 잡아 드셨다고 소문이 났다. 조시는 NCND,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킁, 코바람만 한 번 불뿐이다.


  이제 땅과 집의 소유자인 제임스 타이론 2세가 등장한다. 유진의 자살한 형의 이름과 같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며 사는 캐릭터다. 마흔 살 먹은 잘 생긴 남자. 농장에 내려오지 않을 때는 브로드웨이에서 분명 단역일 것 같은 배우로 활동하며 여성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조시도 그렇고 제임스도 그렇고,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많은 여성 편력은 여성을 판단하는 높은 수준의 시각을 갖추게 했고, 이런 제임스가 보기에 180센티미터, 81킬로그램의 전혀 예쁘게 보이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 조시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순정을 가지고 있고 소위 ‘따뜻한 여성성’을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며, 접근하고 싶어 한다.

  때마침 울타리를 마주한 이웃 농장주 하더와의 사이에 불화에 빠진 호건 씨는 하더가 비싸게, 적정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자기 소작지를 제임스한테 사서 나를 쫓아내려는 건 아닐까 싶은 ‘없는 자의 피해의식’에 싸이게 되고, 탁 보니까 제임스가 자기 딸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같으니, 둘을 혼인의 굴레로 얽어매면 어떨까, 궁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러운 작전을 지시하고, 역시 농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같은 걱정에 빠진 조시도 이에 동의하게 되는데, 밤에 제임스와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조시는, 그가 오면 술을 권해 아예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자기 침대에 올려 함께 자는 시늉을 하면, 딱 시간을 맞춰 아버지와 증인들이 총을 들고 방에 난입하면 결혼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런데 제임스를 보자. 어머니와 함께 서부를 여행하고 있다가 호텔에서 어머니가 뇌질환으로 급사해버리고 말았다. 이 시절에 제임스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어서 몇 년 간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던 시절. 그러나 어머니의 시신을 화물칸에 태우고 바로 앞 차를 전세내 혼자 동부로 오고 있으면서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이고 만다. 하나 남은 가족 어머니의 황당한 주검을 싣고 기차 안에서 제임스는 드디어 입술에 술을 댔으며, 함께 술을 마셔줄 짝을 찾기 위해 객석을 돌아다니다가 차장에게 제제를 받아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기어이 다시 나가서 늙고 못생긴 창녀 하나를 데려온다. 그래서 동부까지 오는 내내 며칠 동안 위스키에 절어 지내다가 너무 취해 어머니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한 아들. 어머니라는 형상, 또는 이미지 혹은 의지가지로 그렇게 큰 여성 180센티미터에 81킬로그램이 넘는 고딕식 미인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본다. <밤으로의 긴 여로>와 동시절에 쓴 마지막 작품이라서. 가족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의 측면에서.

  제임스는 알았다. 누구에게 듣거나, 무슨 증거가 있어서 안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았다. 동네에서 가장 많이 구설수에 올랐으나 전혀 까딱도 하지 않는 조시 호건, 이 아가씨가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제임스가 조시의 집으로 오겠다는 밤, 그는 오지 않고, 아버지가 먼저 와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그리하여 오해가 깊어진 조시는 급기야 원래 계획대로, 술을 먹여 억지로 동침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 약속을 하는데, 늦게나마 제임스가 조시의 집으로 걸어온다.

  이렇게 해서 앞에 내가 대강 이야기한 제임스의 스토리가, 점점 취해가는 와중에 노출되는 것이며, 그러나 그 끝은 동침의 침상 위가 아니라 방으로 가는 계단에 앉아, 제임스가 머리를 조시의 크고 단단한 유방에 기댄 상태에서, 자신과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연민과 용서를 바라는 긴 독백 또는 고백을 하는 거였다. 이렇게 제임스가 아닌 유진 오닐은 한 발, 한 발, 자신의 마지막으로 가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과도한 알코올 의존증에 따른 수전증 혹은 그때까지 병명이 알려지지 않았던 파킨슨 씨 병으로 그의 마지막 날까지 작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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