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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냈다가 시리즈를 접는 바람에 세계문학전집 444, 445번으로 갈아탔다. 모던 클래식 시절엔 한소공 작 <마교사전>이었다. 당시 읽어볼까 망설였었다. 이제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온 걸로 보아 민음사가 이 작품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믿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재미있다.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 넓은 땅과 다양한 민족, 무시무시한 번식력을 지닌 나라. 이 가운데 저 동정호洞庭湖 남쪽, 즉 후난성湖南省 멱라강 인근 마차오(馬橋)라는 산골 벽촌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와 주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 즉 허구다.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한 의미에 천착하지만 픽션인 만큼 어느정도 작가가 왜곡한 것일 수도 있으며, 주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 그렇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구라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독법일 것이다.
요새 내가 민음사를 영 같지 않게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
마차오 마을에 관한 내력을 소개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건륭 58년, 마차오푸에 마싼바오라는 자가 한 친척 집 잔치에서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인간 어머니와 신견(神犬) 사이에서 태어난 진명천자(眞命天子)의 환생으로 연화태조 (蓮花太祖)인 자신은 연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중략) 1959년 음력 정월 18일, 진간총병 (鎭竿總兵) 안투(몽골인), 부장 이싸나(만주인)가 병사 800명을 두 길로 나누어 진압에 나섰다.” (p.29~30)
건륭 58년이면 조선 정조 시절로 1793년이다. 그때 일어난 반란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인 1959년에 마오저뚱 시절에 진압했다고? 그럼 연화국의 존속기간이 1959-1793+1= 167년이란 얘기 아냐? 그럼 하나의 왕조로 봐도 되겠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쪼잔하게 숫자 오타 하나가 아니다. 모던 클래식에서 낸 <마교사전>을 보면 확실히 이 내용을 다시 쓰긴 했지만,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을 중국어 발음으로 고쳤을 뿐 내용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말만 중판 또는 개정판이지, 공역한 역자 심규호나 유소영, 그리고 민음사에서 편집 일을 해 먹고 사는 자들은 그냥 날로 먹겠다는 듯, 어느 놈팽이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판을 찍으면서! 개 잡아먹은 데 가서 곡하고 재배할 인간들.
게다가 초반에 읽으면서 내가 지금 중국 후난성 찌그러진 작은 마을에서 쓰는 언어와 사람 사는 인류학적 이야기를 왜 궁금해하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일야서>를 재미있게 읽어 한사오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만일 중국 독자라면 이 책 역시 흡족할 수 있겠지만 굳이 다른 나라 사람인 내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자꾸 이런 잡생각이 들기도 했던 걸 숨기지 않겠다. 다른 독자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만 극복하면 <마차오 사전>도 한사오궁, 중국 현대문학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문사의 필봉에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다. 표의문자가 한 단어 속에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그래서 글자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지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집단이라 문자/언어에 대한 심각성이 다른 어느 나라 인종들보다 막중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다 언어로 먹고 사는 작가의 직업적 사색까지 보태졌으니 언어/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일 역시 마땅하리라 싶다. 다만 요즘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아 한자어에 멀미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괜히 정말로 읽었다가 욕이나 한 태배기 하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하시기 권한다.
촌사람들 사는 이야기야 채만식, 이기영, 이무영, 이문구 등을 보유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특별한 게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문자, 단어가 갖고 있는 색다른 이야기 몇 개만 풀어보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일 앞에서 이야기할 초나라 굴원의 고사. 초나라 궁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던 굴원이 머리를 산발하고 맨발로 멱라강변을 유랑하며 다니다가 시대를 탄하며 <어부漁夫>에서 이렇게 읊었다.
“세상 모든 것이 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늘 나만 홀로 깨어있네.”
그리고 비가 갠 멱라강 흙탕물 속으로 퐁당 빠져 드런 한 세상, 접었다.
세상에 이런 오만이라니. 세상 사람들은 굴원屈原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우리나라 만화가 고우영도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굴원의 죽음을 추모했지만 평소에 나는 이이를 조금 한심스럽게, 많이는 오만방자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했다. 현대 중국인인 한사오궁은 마차오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전제로 기원전 278년에(민음사의 연표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으니 이걸 워쪄?) 굴원이 혼자 깨 있어 그 대가로 오히려 혼자 죽었으니 이 아니 어리석으냐고 주장한다. 즉 깰 성醒, ‘깨 있음’이 ‘어리석음’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는 거다. 중국에서도 마차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중국인 가운데 ‘깨다’의 의미인 ‘성醒’에 좋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 ‘성醒’자와 같이 어울려 우리에게 늘 경각심을 주는 단어 ‘각覺.’ 두 글자를 합해 각성覺醒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고 있어서 ‘각覺’이 좋은 글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각覺’은, 당연히 마차오 마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지만, “멍청함을 의미해 아둔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철학으로는 “깨어남이란 우둔함이며, 잠을 잔다는 것은 총명함을 의미”하니까. 한사오궁은 중국 현대사의 난관,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 같은 것을 몸으로 겪으며 고달프고 소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생존하려면 마차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깬 상태를 말하는 성醒이나 각覺만큼 어리석은 단어를 또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먼 시절 굴원처럼 스스로 멱라강에 투신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다른 하나는 2권 198쪽에 나오는 ‘연상憐相’, 가련한, 슬픈 모습이다. 이걸 마차오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쓴단다. 마차오에는 아름답다(미려:美麗)라는 말이 없다. 이에 한사오궁은 중국어 표현에서 아름다울 미美 자는 ‘연憐’과 인연이 많다고 주장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것,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 이게 ‘연상憐相’이라니. 일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슬플 비悲를 심미적 감각에 서린 아름다움으로 사용한 적이 많다고. 이 짧은 챕터를 읽으며 반가웠다.
오래전 맬컴 라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의 독후감에서 “오랜 세월 아리고 가슴 저며왔던 단어 ‘슬픔’의 진정한 의미와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만 잊어버려왔던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멋을 한껏 부리며 썼던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이 챕터 ‘연상憐相’이 반가웠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그래, 슬픈 것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슬픔은 궁상맞겠지만, 아름다운 건 거의 슬프다는 말이지. 그래서 연憐이건, 비悲건, 애哀건 간에, 한사오궁이건 가와바타건 간에 호모 사피엔스의 정서는 늘 통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밥 먹었어?”
마차오 마을 사람들도 늘 이렇게 인사한다. “밥 먹었어?”
사람들은 밥을 먹었건 안 먹었건 간에 “예,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 우리나 마차오 사람들이나 다 그렇다. 그런데 만약 마차오 식이 아니라 곧이 곧대로 “밥 먹었니?” 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안 먹었어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같으면 “그래, 그렇구나.”하고 심상하게 지나갈 것 같다. 나는 일단 그렇게 물어봤으니 그걸로 끝난 거니까. 하지만 마차오 사람들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2권 106쪽에 “밥을 먹다, 봄날의 용법”에 나온다. 재미있다. 웃음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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