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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책이 도서관에서 눈에 들어왔다 하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선택을 한다.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찍은 날이 2015년 내 생일날. 그때 가격으로 2만2천원을 정가로 매겼다. 이후 펜데믹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눈먼 돈이 국토를 뒤덮어 한 순간에 인플레이션이 휩쓸고 간 지금도 2만원이 넘는 책이 나오면 일단 경계를 하고 들춰보기 시작하거늘 단편 여섯 작품을 싣고 본문이 달랑 240쪽에 불과한 2015년 책값이 2만2천원에, 다른 출판사하고는 달리 할인도 5%밖에 해주지 않아 현금 2만9백원을 줘야 읽어볼 수 있던 책. 저번에 이렇게 얘기했더니 행인 한 명이 지나가다가 “책을 가격으로만 생각하느냐.”고 한 말씀 주셨다. 책도 상품인 한에 가격은 언제나 중요하다. 나는 땅을 밟고 사는 생활인이지 구름 위에서 넥타르를 마시고 사는 고결한 인격이 아니다. 그리하여 《마키노 신이치 단편집》도 오랜만에 일본 소설 서가를 뒤지다가 눈에 띄어 얼른 고르고 봤다. 지만지에서 찍은 작품들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니까 품질에 관한 기대는 별로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 1896년에 가나가와 현, 오다와라 시의 오다와라 가문의 오랜 저택/고택에서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키노 신이치는 일본 사소설을 많이 쓴 작가로 책 《마키노 신이치 단편집》에서도 자기 부모를 비롯해 신상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데, 그것으로 유추해보면 아버지 대에 거의 모든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두 내외가 하고 싶은 건 모두, 자유분방하게 다 해본, 전적으로 작품을 그대로 믿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밝히는 전제로 말하자면, 막장 부부였던 모양이다.
작품의 주석을 보면, 마키노의 아버지 마키노 히사오는 잠깐 소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아들이 태어난 지 일곱 달이 되었을 때 난데없이 미국행 배에 올라 9년 동안 놀고 돌아온다. 히사오는 명목상 보스턴 유학생이라 이때 클래스메이트도 당연히 있었다. 후에 클래스 메이트는 결혼을 해 F라는 딸을 낳았고, 이 F는 하사오의 아들 신이치와 계속 편지 왕래를 비롯한 우정을 이어간다. 피가 끓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 마키노 히사오가 미국 땅에서 9년 동안 수절을 했다는 건 믿지 못한다고 쳐도, 그가 N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이에 혼혈의 혼외자식을 두었다고 마키노는 여러 작품에서 떠들어 대지만, 일본의 전문가, 평론가들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구라라고 결정을 봤단다. 소설이 원래 적절할 구라를 치는 장르니까 독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 주자. 보스턴에 9년 동안 있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일본의 규중에 박혀 있게 된 엄마는 밤마다 바느질만 하다가 바늘로 애꿎은 허벅지만 찌르며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긴긴 밤을 세웠을까? 물론 190X년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소학교 선생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허벅지를 건사하는 방향으로 선택했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다.
세이신淸親이란 남자가 있었다. ‘고향 저택에 상주하는 머슴 같은 존재’라고 각주에 달렸지만 머슴보다는 윗길리고 집사한테는 처지는 정도의 지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를 어머니는 애인으로 선택하는데, 이게 정말인지 구라인지는 여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세이신이 맞건 아니건 간에 어머니는 틀림없이 한 명 이상의 애인, 한 명일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놀랄 필요는 없고, 누군가가 있었다는 건 맞는 거 같다.
마키노 할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아이 하나 만들어놓고 미국에 가서 몇 년이 흐르도록 소식 몇 자 없지, 며느리는 소학교 교사한다고 만날 밖으로 돌아치며 틀림없이 연애를 하고 있는 푼수지, 불쌍한 손자는 에휴, 할 수 없이 내가 맡아 키울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여 어린 마키오에게 온갖 정성을 바쳐 날이 갈수록 나약한 어리광쟁이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9년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자기가 보스턴에서 벌인 난봉질은 모르쇠하고, 아내의 바람기는 조금 눈치를 챘는지 결코 좋은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대신 ‘오초’라는 이름의 가이샤 출신을 첩으로 들여 살림을 차린다. 그래도 정실 아내를 전혀 모르쇠할 순 없는 법, 귀국 4년만에 마키노에게 누이동생을 하나 만들어준다.
이렇게 ‘바람직한 가족 관계’ 속에서 살면서 마키노도 점점 나이를 먹어 어느새 스물다섯 살이 됐고, 이제 저 옛날 흥부의 큰아들이 흥부한테 말했듯이, “아버지, 아버지, 부랄 밑이 근질근질하니 장가 보내주!” 할 수 있는 때가 되자 그냥 미모의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 스즈끼 세스한테 연애를 걸어 안다리후리기를 시도, 자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 히데오英雄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부모는 부모랍시고, 혼전 임신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를 하다가, 자기 손자가 세상에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끝까지 반대하노? 결혼시키고 말았다.
마키노 집안에서 보면 낙혼이라 낙심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집안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옛 이야기. 마키노 가문도 이미 쇠락할 만큼 쇠락한 상태. 스즈끼 가문은 재산은 물론이고 교육수준, 집안환경 같은 게 형편없다. 게다가 우리의 작가 마키노 신이치는 어려서부터 다른 건 몰라도 부부 관계, 부부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은 모르겠고, 부부 사이라 해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호에 익숙한 인간이라 현대 일본의 젊은이 사이에서 창궐하고 있는 질병 가운데 하나인 매독 바이러스를 어디서 수집해 와, 아내의 생식기 전반에서 배양하는 일도 벌어진다.
한 집안의 가장 마키노를 생각하면, 노동의 능력, 노동에 적응할 적응력을 아예 갖추지 못한 룸펜 인텔리겐치아. 열라 소설 같은 글을 써서 얼마라도 생기면 절대로 가정을 위해 내놓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환락을 위해 당장 써버리고 늘 궁상맞은 가난을 선택하는 인간. 늙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아주 내놓고 옛 하인 세이신과 살림을 차려, 주로 돈 문제로 고향에 내려가 세이신과 다툼이라도 있으면 늙은 세이신에게 엎어치기를 당해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돌아와 두어서너달 고향쪽으론 오줌도 안 누는 치졸한 인간이다.
여태 내가 위키피디아 보고 마리노 신이치의 바이오를 옮긴 건 줄 아시나? 아니다. 책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소설 내용을 순서없이 와그르르르 적어 놓았을 뿐이다. 이게 가능한 건, 일본의 사소설이니까. 내가 정말 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가에서 하필이면 이 책을 잡아 뺐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마키노의 문장이 좋아 우리나라 이상李箱도 그가 고향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목을 매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경악을 해 그해 9월에 빛나는 작품 <날개>를 썼으며, 날자, 날자, 에라 쓰펄 날고 말자 싶어서 10월엔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갔다가 다음 해 4월에 폐결핵이 도져 자기도 기꺼이 마키노의 뒤를 따랐다는 건데… 1930년대에 이렇게 촌스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경배할 수준이었나 싶다.
“낮에는 야산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하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유쾌한 무협담을 나누자. 나는 ‘사유의 사유’를 거듭하며 감람산을 꿈꾸는 철학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디오게네스의 나무통을 굴리고 있는 시인을 경멸하고, 통일을 위한 통일로 연신 무미건조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물리학도와 절교하고는, 유쾌하게 모자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낯선 야행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통쾌했다.” (<엘리베이터와 달빛>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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