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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인 악사
  •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 13,500원 (10%750)
  • 2021-01-22
  •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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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생몰이 1853~1921, 주요 작품은 1886년 결혼하고 10년간에 집중해 있다. 폴타바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인 아버지는 당시 시각으로는 놀라운 정도로 뇌물을 받지 않는 정직한 지방판사였으며, 어머니 에벨리나 스코레비츠는 폴란드 출신으로, 코롤렌코가 어렸을 때는 도무지 자신이 어느 족속/종족에 속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제일 먼저 정식으로 배운 언어가 엄마의 모국어인 폴란드였는데, 1863년 폴란드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선택에 대한 강요로 러시아 국적 및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866년, 코롤렌코가 겨우 열세 살일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에 다니다 혁명 사상을 가진 젊은이가 (당)할 수 있는 많은 일을 다 (당)하고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 언론인, 인권운동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주의자”로 이름을 높인 이다. 진짜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면 아이고, 일단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앞으로 작품(집)이 나온다 해도 또 읽지는 않을 거 같으니 굳이 이이의 바이오를 더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아빠가 뇌물을 받지 않아 당대 시각으로는 마치 돈키호테 같은 희한한 지방 판사였다는 거, 엄마 이름이 ‘에벨리나’였다는 것을 밝힌 건, 청렴한 지방판사 아빠는 <나쁜 패거리>의 일찍 홀아비가 된 정의로운 지방판사가 등장하며, 엄마는 이 책의 타이틀 롤인 <맹인 악사>에서 폴란드 귀족 출신 토지 관리인의 딸이자 여주인공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작가의 사생활이 작품 속에 슬쩍 나오는 걸 발견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지 않으신가? 나는 그런데. 뭐 그렇다는 얘기다.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초상.  일리야 레핀 그림


  읽기에 괜찮은 단편소설 셋과 타이틀 롤 중편소설 하나를 실은 작품집이다. 중단편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금 위험하다. 그래도 이 책에 실린 <맹인 악사>는 178쪽에 이르며,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구 판형의 편집을 감안하면 웬만한 요즘 한국 장편소설 이상의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에 부담이 크지 않다.


  우크라이나 남서 지방의 부유한 지주 포펠스키 씨 집안 일이다. 작품은 포펠스키 씨의 젊은 아내 안나 미하일로브나 포펠스카야의 출산 장면부터 시작한다. 산고를 치르고 있다. 초산이라 독한 고통 끝에 사내 아이를 낳는데, 엄마는 진통 후의 나른함이 아니라 유난히 그악스러운 울음을 우는 아기가 걱정이다. 저 작은 것이 저렇게 힘들게 우는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라는 본능적인 두려움. 물론 독자는 이미 짐작을 한다. 제목이 ‘맹인 악사’이니 아이는 맹인으로 출생해 훗날 악사,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게 맞다. 아이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시신경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그게 서러워 유난히 울부짖듯 울었을 것이라고 엄마는 평생 생각했겠지.

  가족의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아기의 외삼촌 막심 미하일로비치, 그리고 아기. 이렇게 네 명이다. 아버지 포펠스키 씨는 우크라이나 남서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착실하고 근면한 농촌 지주이다. 선량하고 친절하고 일꾼들 잘 보살피고, 취미로는 물레방아를 만들거나 다시 개조하는 걸 좋아한다. 쉬운 얘기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얘기다. 아무리 건드려도 성내지 않는 온화한 남성. 그러니 맹인 아들 하나만 딱 낳고 다시는 아이를 만들지도 않았지. 근데 우크라이나 물방앗간은 우리와는 달리 남녀상열지사가 생기지 않는 곳인 모양이다, 그지? 엄마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비슷하게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는 헌신적 엄마. 그런데 문제는 외삼촌 막심이다.

  외삼촌 막심은 키예프와 키예프의 가장 험한 동네인 시장에서 제일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쳤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그리고 코사크족. 근데 생각을 조금 바꿔보자. 이 동네 출신 가운데 유명한 작가가 몇 있다. 그 가운데 러시아 문학에 가장 큰 자취를 이룬 니콜라이 고골. <타라스 불바>를 봐도 그렇고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를 읽어도 그렇고, 이 근동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악마적 폭력성을 (아니겠지, 아니겠지만 휘까닥 바꿔 생각해보면) 약한 미덕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듯도 하다. 하여간 지역의 대표 어깨로 활약해 장바닥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 가지고도 주민들에게 무한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막심은, 당연히 젊은 시절에 그랬다는 건데, 어느 날,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리발디와 한 패를 이루어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투신했다. 거대한 몸집과 대단한 완력을 쏟아내는 막심이 가리발디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 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겠지. 그러다가, 한 번은 장창을 꼬나들고, 19세기지만 소총의 연발 사격 속도가 부실해 백병전이 전투를 가름하던 때라 정말 말 위에서 긴 창을 휘두르던 시기인데,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꾀바른 오스트리아 군사 하나가 말의 발모가지를 타격하는 바람에 적진 한 가운데에서 낙마를 했고, 이걸 그냥 둘 오스트리아 군사들이 아니어서 자근자근 짓밟아주었고, 조금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 독립군이 구출을 해 목숨보전을 했으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며, 왼손도 이젠 그냥 시늉으로만 달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어떡해? 남의 나라인데. 다시 우크라이나로 와 키예프의 집구석에 들어가기엔 보는 눈이 성가셔, 마침 매제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여동생 안나의 집에 쳐들어가 함께 살고 있었던 거다.

  이제 장애로 인해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늙은 전사는 폭력성 대신 만신창이가 된 몸 속에서 뜨겁고 선량한 심장이 고동치고 덥수룩한 억센 머리털로 뒤덮인 크고 네모난 머리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사고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는 말이다. 누이 안나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맹목적인 배려를 하는 건 아이의 시각을 대체할 예민한 다른 신경기관이 발달하는 데 오히려 크게 방해할 수 있다고 조언하며 아이가 주어진 상황 아래 자신에게 허용된 (시각을 제외한)외적 인상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교육을 맡게 된다. 그리하여 막심 외삼촌은 선천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난 표트르 포펠스키의 스승으로 아이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맹인 악사>는 선천적 맹인 표트르 포펠스키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해, 유년, 소년, 사춘기, 청년, 혼인 등 연대기 적 서사로 썼다. 주인공이 맹인 표트르이기 때문에 주연급 조연인 막심이 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철저하게 시간 배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은 현대 소설 중에선 아주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간을 10으로 본다면 소위 “현대” 소설은 4, 5, 6 정도, 아니면 7쯤에서 시작해 예컨데 7, 8, 3, 4, 5, 6, 1, 2, 9, 10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섞는 것이 일반이라 이 작품처럼 1, 2, 3… 9, 10 같은 나열은 진짜 오랜만에 읽는다. 아마도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작품에서는 읽었던 것 같다.

  <맹인 악사>는 1886년에 발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선배 작가들보다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는데, 나는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읽으려 노력해도 그들을 능가하기는커녕 비슷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게네프야 러시아 토종이라기보다 유럽을 모방한 측면이 강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물론 더 앞으로 나가면 고골은 확실하게 러시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을 썼고, 이런 면에서 코를렌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히려 선배 세대 작가들보다 코롤렌코의 스타일은 전혀 진화하지 못한 것으로 읽었다. 하긴, 선배들의 그림자가 워낙 크고 깊기는 하다.


  “그런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감정이 결핍되어 흔히 지나치게 냉정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게 보인다. 그들은 세속적 삶의 열정적 호소에 둔감하며 마치 아주 명백한 개인적 행복의 길을 가듯이 애처로운 본분의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 그들은 눈 덮인 산봉우리처럼 냉랭하고 장엄하다. 일상의 비속은 그들의 발아래에 널려 있다. 심지어 중상과 험담은 마치 백조의 날개에서 진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듯 눈처럼 하얀 그들의 의복에서 굴러떨어진다….” (p.244)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출간한 독일 소설에서 볼 듯한 문장과 사유법이다. 이미 서유럽에서는 이런 경향을 졸업하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향유하는 단계였다. 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을 출간하고 10년 가까이 흐른 시점이고, <제르미날>이 1년 전에 나왔으니 아쉬울 수밖에.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다음으로 하고, 오히려 같은 지역 사람인 니콜라이 고골에 비해서도 한 수 너머 접히는 구성과 문장과 스토리, 이것들을 다 합해 ‘스타일’ 아닐까 싶다. 다만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읽을 만하……지만 추천할 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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