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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작가 한설야가 1925년부터 48년까지 쓴 단편소설 17편을 실은 단편선.
한설야가 누구야? 학교 다닐 당시에 한설야는커녕 정지용조차 정X용으로 표기해야 했던 시절이라 한설야는 정말 늦게, 아주 늦게야 알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먼저 한설야에 관해 뒤져봤다.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190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할 때의 ‘삼수’ 군수를 지내고 이후 차례로 의사, 광산업을 경영한 나름대로 부르주아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때도 함흥 하면 제법 큰 도시인데 수재로 이름이 났던지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당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해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동기동창이 된다. 이후 함흥고보로 전학해 1919년에 졸업을 했지만 딱 그 해가 기미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인생 처음으로 석 달 동안 소위 ‘나랏밥’을 먹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공부하다 돌아와 이것저것 하다가 마음먹은 바가 있어 1923년에 도일,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가담했다. 그러나 1923년의 도쿄라니. 당시 도쿄에 살던 조선 유학생들은 관동대지진에 이은 조선인 학살 사건에 기겁을 해 거의 대부분 귀국선에 올랐는데, 한설야, 아니지 한병도도 불과 몇 개월만에 돌아와, 그것도 유학생이라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그 날 밤>으로 등단, 만주 봉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27년에 귀국해 카프에 가입한다. 잡지 편집과 조선일보 기자 등을 하다가 카프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이이가 아들만 넷인데 막내 아들이 태어난 해에 전주 감옥에서 1년 동안 두번째 ‘나랏밥’을 먹었다. 만주 봉천에 살다가 귀국하는 이야기, 임신한 아내를 두고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가 이 단편집 《과도기》에 여러 번 나온다. 자식 가운데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얘기도 당연히 나온다. 1943년엔 전쟁이 세 불리하게 되자 발악을 하기 시작한 일본 경찰에 비밀 결사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세번째 ‘나랏밥’을 자시다가 1944년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엔 잠깐 상경해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좋은 요릿집에서 잘 때려 먹은 뒤에 돌아갔다. 그러니 한설야는 “월북작가”가 아니다. 애초에 생활하고 작가 활동을 북쪽에서 했다. 그냥 살뜰하게 공산주의 작가라고 보면 된다.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잘 나가다가 1962년 12월에 숙청당했다. 1963년에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춥디추운 자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가 모진 목숨 이어가다가 1976년에 숟가락 놨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복권이 되어 지금 한설야는 백골이나마 애국열사릉에서 누워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경향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인 한설야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본 것이 《과도기》를 읽은 최대의 수확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전부, 말 그대로 한 편도 빠짐없이 사회주의적 계몽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같은 공산주의 진영의 작가라고 해도 이기영이나 이태준, 일찍 죽은 강경애하고 비교도 못할 만큼 재미(재밋대가리) 없는 소설만 쓴 거 같다.
게다가 마지막 두 편, <모자>와 <혈로>는 가관이다. <모자>는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장교가 북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가난한 소녀를 보며 대 파시스트 전쟁 당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학살을 당한 자기 딸을 오버랩 시키는 작품이며, <혈로>는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이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일본군대를 격멸시키는 영웅위인전 성격이 짙다. 하여튼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런 짓을 했으니 대부분의 부르주아 출신 문인들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숙청을 당해 골로 간 데 비하여 꽤 오래 잘 먹고 잘 살았겠지만, 나치와 일본 군부보다 더 파시스트 적 독재정권 아래 작가 생활을 하는 자체가, 말을 말자. 이게 무슨 소설이고 문학작품인가 말이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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