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희재 작가님의 에세이 <다정한 날들이 단단한 인생을 만들지>를 읽었다.
스물두 살,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난 작가님이 생전 처음 마주한 낯선 언어와 생활 속에서 실수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 만난 ‘다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 에세이였다.
1부에서 4부까지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 중 나는 ‘꼬마친구 사샤’라는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샤는 작가님이 파리에서 친구의 소개로 베이비시터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만난 아이다. 처음 만났을 때 낯을 심하게 가려 엄마 품에 꼭 붙어있던 아이는 하원과 하원 이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친해졌고, 유치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저 멀리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사이가 되었다고. 네 살 꼬마 사샤와의 대화는 작가님의 프랑스어 수준에 딱 맞아서, 사샤는 종종 작가님의 프랑스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다는 얘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여기서 등장한다.
어느 날,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사샤 엄마로부터 호출이 온 것. 다행히 그날 아침 수업이 없어서 곧장 사샤네로 달려갔는데, 사샤의 등원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작가님이 방금 일어나 비몽사몽한 사샤의 환복을 도와주려던 순간, 사샤 엄마가 작가님을 멈춰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히는 건 너의 일이 아니야. 사샤 스스로 하게 내버려둬. 아이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해주지 마. 유치원에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 사샤가 혼자 준비하도록 기다려줘.”
그 말에 작가님은 잠자코 사샤를 지켜보았고, 사샤 엄마의 말대로 네 살배기 아이가 혼자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신발까지 야무지게 신더란다. 나는 작가님의 이 에피소드에 부끄럽지만 감탄을 했다. 내가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동생들을 돌볼 때 엄마가 그러는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동생을 도와줬었는데, 외국에서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독립적으로 키우는구나 싶어 그들의 육아 방식에 눈길이 갔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외출하는 부모님을 보며 따라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사샤를 두고 “우리 부부도 오붓하게 데이트할 시간이 필요해. 같이 패션쇼를 보러 가거든.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 그러니 사샤가 우는 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런 사샤가 올해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 인스타그램으로 사나흘에 한 번씩 작가님을 너무 만나고 싶다는 애틋한 메시지를 보내며, 매년 1월 1일 새해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고. 가족 같았던 사샤네와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도 사샤네에 정이 들어버렸다. 이외에도 작가님이 독일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외롭지 않게 친구가 되어준 언니들 이야기나 앤티크 식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독일 남자친구의 어머니 이야기 등등 작가님의 온기 가득한 유럽 생활 이야기가 책 전반에 담겨있어서 에필로그까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했던 이유는 누군가의 다정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나 역시 단단한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의를 호의로 받을 줄 알고, 때로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호의를 전할 줄 알며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줄 아는 작가님의 그 마음이 있었기에 그들이 떠난 자리에 다정함이 남은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