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그런데 왜 더 자주 만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만 보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왜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함께 받아들이고 매일 서로 시시콜콜 잡담하며 안락함을 찾지 않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린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 인간들인 것이다.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을 때 영혼에서 모호함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표현했다. 모호함이라는 먹구름. 너희 아버진 마술 같은 사람이었지. 눈길, 손길,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게 그랬어. 엄마는 이 문장을 끝맺을 때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해는 부적 같은 단어였다. 엄마 말로는, 이해를 받지 못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를 받으면 마음이 정돈되며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63
에마와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영원한 친구 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처칠은 세계를 향한 야심이 개인 간의 충실한 마음을 짓밟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칠은 틀렸고, 영원한 이익 같은 것도 없다고. 나와 에마의 관계를 무너뜨린 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대한 배반이었다.
우리 내면세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언제나 전환 중인 상태라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다. 그는 그런 전환들 자체가 바로 실제라고 생각했으며 경험이란 “그 수많은 전환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납득은 고사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깨달음이지만 분명 설득력이 있다. 정서적 공감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 평범한 날 아무 때고 결혼이나 우정, 혹은 업무 관계가 ‘돌연’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일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5-86
작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을 읽었다면, 올해는 비비언 고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