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는 어쩐지 선뜻 손이 안 가는 작가였다. 그런데 '흑인임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고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구입한지 몇 달 지나고 페이지를 펼쳤지만 금세 독파한 책.
일종의 액자 구성의 소설이다. 60대 작가인 네이선은 남들과의 교류없이 혼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의 콜먼 실크라는 그리스 고전문학 교수가 그를 방문한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고 대학에서는 학과장을 맡아 혁신적인 인사와 제도를 도입한 콜먼. 하지만 그는 강의에 계속 결석하는 학생들을 무심코 'spooks'라고 불렀고 이것이 인종차별로 몰려 결국 강단을 떠난다. (콜먼은 'spooks'를 '유령'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다른 뜻으로 '흑인, 검둥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콜먼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작가인 네이선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런 분노도 잠시, 70대인 콜먼은 청소부인 30대 여성 포니아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또 한번 세간의 비난과 소문을 일으킨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으로 평생의 불명예를 얻은 콜먼이 사실은 흑인이었고, 젊은 시절 자신의 흰 피부와 푸른 눈으로 백인, 그중에서도 유대인으로 행세했다. 그가 부모 형제와 절연하고 유대인으로 인종을 세탁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게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는데 콜먼의 가계를 훑어 올라간 설명까지 덧붙여지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미국인 중 어떤 인종인지 잘 모르겠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
평생 다른 사람들(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을 속여온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밖에도 젊은 하층 여성과의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소문, 오해와 편견이 주는 섬뜩하다. 또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 하다.
콜먼과 포니아 뿐만 아니라, 포니아의 전남편 레스터, 콜먼을 음해하는 프랑스인 여교수 델핀, 그리고 네이선까지. 모든 이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무척 깊이있다. 인간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탐구하고 또 입체감있게 쌓아올리다니.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게 절로 경이감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1998년, 빌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섹스 스캔들로 뜨겁던 때였다. 당시 클린턴의 성추문 자체 보다도 그의 위증이 미국인들을 더 분노케 했다고 한다. '거짓말과 그것을 둘러싼 소문'이라는 현상을 보고 아마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나 싶다. 여러모로 주제를 탁월하게 접근한 작가다.
몰입감도 있고 장르적이기까지 하다. 2003년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필립 로스, 완전 인정.
그 동안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