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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골방

"여기서 '번역의 정치성'이 문제로 부상한다. 언어상에 위계가 존재하기에 번역도 비대칭적이다. 피지배 문화는 헤게모니 문화의 저작을 번역해 수입한다. 역방향의 번역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저작물은 가치 있는 원본으로 여겨지며, 보편적이라는 외양을 두른다. (...) 

그리하여 '번역의 정치성'에 관한 사고는 번역 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에 관한 문명적 관점에 기댄 인종주의적, 식민주의적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 알파벳으로 된 언어에는 '인간'을 지시하는 용어에 두 가지 계열이 있다. 한 가지는 영어라면 휴먼(human)이나 휴머니티(humanity)의 어원을 이루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학(anthropologie)이라는 학문의 이름에 사용되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anthropos)의 계열이다. 이 두 계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비대칭적 위계관계가 가로놓여 있으며, 그 비대칭성은 원본과 번역문 그리고 언어 간의 위계와 결합해 근대 지식체계의 골조를 이룬다. 

먼저 인간에 관한 연구는 인류학이라 불리지만, 인간을 총칭하는 경우에는 후마니타스 계열의 용어가 사용된다. 후마니타스는 그 말 자체가 인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인간이 지닌 지식을 가리킨다.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인간(후마니타스)을 연구한다. 이때 대상이 되는 인간(후마니타스)은 종족적, 신체적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이다. 즉 인문학(후마니타스)이란 인간(후마니타스) 주체의 자기인식이다. 또 다른 인간 연구인 인류학은 안트로포스를 다룬다. 그런데 서양의 인간은 인류학의 대상으로 포함되는 일이 드물다. 대신 후마니타스(서양인)는 안트로포스(비서양인)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인식주체인 생각하는 인간은 후마니타스며, 인식대상인 종족적, 육체적 인간은 안트로포스다.

이런 인간의 위계 도식은 근대지식 체계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서양인은 후마니타스로서 보편적 앎의 기준을 소유한다. 유럽과 미국의 지식은 표준으로서 통용된다. 그러나 비서양인은 스스로 앎을 생산하지 못한다. 비서양인의 경험은 서양산 지식의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며, 비서양의 상황은 서양 이론의 빛으로 조명되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렇듯 자료 제공과 이론 생산의 역할 분담은 특수자와 보편자의 대립으로 소급된다. 특수자는 경험의 직접성에 매여 있으나, 보편자는 논증적 지식, 추상적 개념을 매개해 자신의 직접성을 초월한다.

인간의 위계 도식은 근대지식 체계의 근간을 형성하지만, 그 이전에 근대성 자체의 동학이기도 하다. 서양의 근대는 근대에 선행하는 전근대를 극복하는 과정이었겠으나, 지정학적으로는 비근대, 더 명확하게는 비서양을 지배해가는 과정이었다. 자주 거론되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계열은 연대기적 순서를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이 순서는 언제나 지정학적 틀에서 배분되어왔다. 그리하여 공간상의 차이가 시간상의 낙차로 전위되고, 비서양에서 발생한 사건은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적 구도에 의해 그 의미와 위치가 정해진다. 지정학적 차이가 바로 역사적 위치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역의 정치성'이라는 각도에서 번역이 수행하는 위계 구도의 재생산을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 속으로 들여야 하는 것이다."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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