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Ex Libris
20230411 #시라는별 86

총독부에 다녀올게
- 이바라기 노리코

한국의 노인 중에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
유유히 일어나
˝총독부에 다녀올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조선총독부에서 소환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버티던 시대
불가피한 사정
이를 배설과 연결 지은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온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소년이 그대로 자라 할아버지가 된 듯
순수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럿이 일본어로 몇 마디 나누었을 때
노인의 얼굴에 공포와 혐오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일본이 한 짓을
그때 보았다


일본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웃나라 한국의 글과 예술을 애정했다. 어린 시절 읽은 조선 민요의 소박함과 기지에 끌려, 조선의 자기와 그릇, 각종 불상과 민화도 섭렵해 나갔다. 이웃나라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반백년을 살고 난 어느 날 남편을 잃고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생의 빈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한글 공부는 자연스레 그를 한국의 시인들에게 인도했다. 윤동주, 조병화, 신경림. 그들의 시를 읽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쓸모없어지는 시절은 전쟁과 함께 온다. 승리만이 모든 것인 세상에서 소소한 시, 그림, 책, 꽃, 낭만 같은 것들은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이바라기 노리코가 소녀였을 때, 일본은 전쟁을 선포했다. 소녀는 헌책방에 숨어들어 새와 달과 사랑을 노래하던 천 년 전 시를 읽으며 살벌한 시대를 보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녀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공습으로 불탄 긴자 거리를 터널터널 걸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 이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 . . . . . ] (정수윤 옮긴이의 글 중)

일본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인간이 인간을 총칼로 짓밟는 짓을 ˝멍청한 짓˝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침묵하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이 되어˝(<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중), 그들 중 억압 받은 자들의 편이 되어, 그것을 넘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편이 되어, 시를 썼다.

<총독부에 다녀올게>는 역사 의식이 없는 시인이라면, 반성할 줄 모르는 시인이라면, 결코 쓸 수 없는 시가 아닐까. 일제시대를 산 소년은 자라 할아버지가 되었다. 해방 된 지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 일본어에도 노인의 얼굴은 ˝공포와 혐오˝로 일그러진다. 그 표정 속에서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 일본이 한 짓을˝ 볼 줄 아는 시인.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을 이렇게 솔직하고도 시원하고도 간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이어서,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마음에 든다. 1999년 출간된 시집 『기대지 않고』 저자 후기를 읽고 이 시인이 더욱 좋아졌다.

[어느 날, 내몽골에서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H라는 일본 청년이 보낸 편지였는데, ˝삼림지대 자원봉사 일로 일 년 동안 내몽골에서 지낼 예정인데 여기서 읽으려고 당신의 시집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미지의 청년이고 추정 나이는 25세.
간결하지만 정감 있는 편지였다.
이런 젊은 사람도 있구나 싶어 놀랍기도 했고, 몽골의 천공에 펼쳐져 있을 수많은 별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삼십 년 지기 친구이자 편집자인 나카가와 미치코 씨가 새 시집을 내자고 강력하게 권했을 때도 좀처럼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내몽골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문득 여덟 번째 시집을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왔기 때문이다.
원고도 완성되기 전에 표지그림이 먼저 도착했다. 의자 그림이어서 초고에 있던 <기대지 않고>로 표제까지 정해져버렸다.
이번뿐만 아니라 항상 외부에서 다양한 힘이 작동해서 떠밀리듯 어떻게든 형태가 이루어져 왔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인생 전체에서 나의 의지로 분명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경험은, 손으로 꼽아 딱 다섯 번뿐이었다.] (1999년 가을, 이바라기 노리코)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