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 Libris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기시 마사히코
  • 12,420원 (10%690)
  • 2016-10-05
  • : 2,364
20200719 

‘무의미한 인생의 의미‘

이 책을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줄 여겼더니, 알라딘 이력을 뒤져보니 올 초였다. 완독을 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린 셈. 지인의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소장용이라는 느낌에 중고로 구매했는데, 어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역시 사길 잘했어였다. 추천한 지인은 뒤로 갈수록 별로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좋았다. 기시 마사히코의 다른 책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이 책을 읽고 다시 확인한 점은, 내가 이런 류의 담담한 문체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란 사람은 정작 호들갑을 떠는 부류에 가까운데, 왠일인지 글은 너무 유려하거나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거나 심지어 건조한 문체 쪽이 더 끌린다. 바꾸어 말하면, 시시콜콜 구구절절 휘황찬란 미사여구, 이런 글들을 칭송하기는 하나 아주 선호하지는 않는 듯.

아무튼, 기시 마사히코의 글은 수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게 만드는 동력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학자들이 곧잘 빠져드는 ‘학자연‘하는 잘난 척이 없어 보인다. 그의 글에는 어려운 용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지적 우위를 자랑질하는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든다. 글이 어렵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술술 읽히지만도 않는다. 그의 문구들은 읽고 나서 쉬어 가는 템포를 던져 준다. 너도 이런 생각 해봤니? 못 해 봤으면 한 번 해볼래? 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써보려 한다.

정확히 반백 살이 넘은 후로, 전에 없이 인생의 허무함을 자주 느낀다.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살아봤자 무슨 기쁨이 있을까, 더 산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해낼까.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실현해 보려 한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어떤 계기로 딱 접었다.
지금은 ‘자살‘을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삶을 더영위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들 뿐.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67년생이다. 그가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쓴 것은 2013년과 2014년으로 반백 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무수한 인생들, 특히 거리의 인생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저자가 50년이 채 되지 않은 자신의 인생과 50년보다 짧거나 긴 여러 인생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걸러낸 생각을 말한다.

˝되풀이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누구나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든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적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191)

‘이럴 리 없었던‘ 자신.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혹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우리는 ‘어떤‘ 자신을 꿈꾼다. 그 꿈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는 듯하다. 또한 하나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그 꿈대로 삶이 나아가지도 않는다. 일류 대학만 가면, 대기업에 취직만 하면, 고시에
합격만 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내 집만 생기면 등등등.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문제는 삶이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살고 또 살아야 한다. ‘이럴 리 없었던‘ 자신과 더불어.

그럼 왜 살아야 하지.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 더욱 수렁이고 더욱 미로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되도록 ‘의미‘ 따위 묻지 않는다. 그냥 산다.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니까.

˝우리 인생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대단한 천재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완전한 육체도 아니다. 보잘것없는 자신과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214)

˝무의미한 우연˝이지만 그럼에도 이 인생에 실낱 같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음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5)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날마다 아내를 보러 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그 아내분은 우리 엄마보다 훨씬 젊은데 치매가 일찍 오셨고 치매 속도도 빨라 언어와 운동 감각을 거의 잃고 온종일 누워 계신다. 요양원은 경기도 양주 장흥. 어르신이 사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다. 자차를 쓰지 않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두 시간이 걸려 요양원에 오신다. 어르신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다. 어르신은 점심 시간에 맞춰 요양원에 당도해 아내와 점심을 함께 먹고(도시락을 싸 오신다) 한 시간 넘게 말 없는 아내 곁에 앉아 계시다 집으로 돌아가신다. 어느 날엔가, 날마다 오는 것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어르신께 물었다. 어르신의 대답은 이랬다.

˝집에서 돌보던 때에 비하면 전혀 안힘들어요.(어르신은 늘 존대어를 썼다) 내가 다리 성해서 날마다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내가 날 못 알아보고 내가 다녀갈 줄도 모르지만, 그게 어떤 때는 마음 아프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보고, 내가 기억하면 되지. 내가 오래도록 기억해야지 하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면 다리에 힘이 생겨요.˝

나는 어르신의 말에 눈과 가슴이 동시에 뜨거워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내 어미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만, 내가 다년간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아프지 않은, 병이 들지 않은 이들은 말한다. 저렇게 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렇다. 저리 사는 내 어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날마다 아내에게 다녀가는 어르신이 한 말처럼 내게도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다. 엄마의 저런 삶조차 하나의 삶이라고.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기억하면 된다고. 나 또한 기억을 잃으면 내 자식이, 자식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엄마를 돌본 나를 기억해 줄 거라고. 삶의 기억은 그렇게 순환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엄마가 환히 웃는 시간은 고작 15분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것조차 금세 까먹지만, 엄마의 이 삶도 기꺼이 껴안게 되었다. 또한 아직 멀쩡하다는 인간들이 잘 저지르는 시건방진 동정과 안쓰러움에서 약간 놓여날 수 있었다.

기시 마사히코의 책은 내게 이런 이야기와 사색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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